최종편집 2024-03-29 15:54 (금)
제주4.3 행불인 수형자 ‘억울함’ 70여년 만에 풀었다
제주4.3 행불인 수형자 ‘억울함’ 70여년 만에 풀었다
  • 이정민 기자
  • 승인 2021.01.21 1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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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법 21일 국방경비법 위반 등 10명 재심 재판서 무죄 선고
재판부 “국가 정체성도 찾기 전 이념 대립에 목숨마저 희생”
검찰도 “증거 없다” 무죄 구형…항소 안 하면 최종 무죄 확정
피고인 모두 사망 유족 청구 자격 인정 유사사례 잇따를 듯

[미디어제주 이정민 기자] 70여 년 전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목숨을 잃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인이 모두 사망한 상황에서 유족의 재심 청구 자격을 인정하고 내린 판결이어서 앞으로도 유사사례가 잇따를 전망이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장찬수)는 21일 1948~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 등으로 군사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당하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4.3 행불인 수형자’들의 재심 재판을 열고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가 선고된 피고인은 고(故) 오행률씨와 고 김경행씨, 고 서용호씨, 고 김원갑씨, 고 이학수씨, 고 양두창씨, 고 전종식씨, 고 문희직씨, 고 진창효씨, 고 이기하씨 등 10명이다.

제주지방법원. ⓒ 미디어제주
제주지방법원. ⓒ 미디어제주

이들은 1948년부터 1949년 내란죄 혹은 국방경비법 위반 등으로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하다 사형되거나 6.25를 전후로 처형됐다. 사형 선고 기록이 남아있거나 사망 통보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채 사라진 사례도 있다. 재심은 이들의 유가족이 2019년 6월 청구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이날 재판은 피고인석을 모두 비운 채 진행됐다. 진술거부권에 대한 고지도 없었다.

검찰은 이날 이들의 공소사실을 특정하며 무죄를 구형했다. 공판 검사는 재판정에서 "공소사실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한 측면이 있는데 이번 재심에서 피고인들의 공소사실 일시를 특정한 것만 해도 피고인 방어권 행사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피고인들이 내란죄, 국방경비법 위반 등을 했다는 것이나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다"며 "이러한 사정을 참작해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다. 특히 "피고인들의 생사 여부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 한 재심 청구인들이 이번 재판으로 마음의 짐을 덜기 바란다"며 "재판으로 실추된 명예가 회복되고 아픔과 고통도 조금이나마 치유되길 바란다"고 피력했다.

변호인도 최후 변론에서 당시의 상황을 '참극'이라고 표현하며 무고함을 강조했다. 변호인은 "4.3으로 인한 희생과 피해는 '참극'이고 유족은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중산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가 형무소에서 병사하거나 총살당했다"고 이야기했다. 또 "올해도 73~74년 전처럼 눈이 많이 내렸다. 그 때 맨발로 눈밭을 헤매다 총에 맞아 죽거나 형무소에 끌려갔다. 혹독한 겨울이었다"며 "실체적 진실에 따라 검사의 무죄 구형에 감사한다. 다시는 법정에서 이와 같은 변론이 없길 바란다.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했다.

21일 제주4.3 행불인 수형자에 대한 제주지방법원의 재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재심 청구 유족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21일 제주4.3 행불인 수형자에 대한 제주지방법원의 재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재심 청구 유족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재판부는 이날 검찰 구형과 변호인 최후 변론이 끝난 뒤 곧바로 선고했다. 형사 재판은 구형과 최후변론이 이뤄지는 결심공판 후 별도의 선고기일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도 없고 양측 모두 무죄를 주장한데다, 피고인들을 대신해 참석한 재심청구인들이 고령인 점 등을 참작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형사재판에서 범죄 입증 책임은 검사에게 있지만 검사는 공소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이는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무죄 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한 뒤 "국가 정체성도 찾지 못한 시기에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피고인들의 목숨마저 희생됐다"며 "유족들도 연좌제의 굴레에 갇혀 살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와 함께 "오늘 (무죄) 선고로 피고인과 유족이 굴레를 벗고 나아가길 바란다"며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지 않고 편하게 정을 나누길 바란다"고 부연했다. 이번 판결은 검찰이 1주일 내 항소하지 않을 경우 최종 확정된다.

한편 이번과 같은 사례로 330여명이 재심 개시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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