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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건 8할이 그때 그 집
나를 키운 건 8할이 그때 그 집
  • 미디어제주
  • 승인 2020.12.1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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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건축 [2020년 7월호] 칼럼
조선희 제주문화예술재단 전문위원

#몸이 기억하는 집

번지수는 잊어버렸지만 내가 ‘우리 집’으로 기억하는 최초의 집, 마루 밑에 장작이 그득 쟁여져 있던 단아한 일자형 한옥의 기억이 선명하다. 내 인생 최초의 사진도 이 집에서 찍혔다. 배냇머리서부터 자란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봉긋한 배 때문에 앞섶이 약간 들린 반팔 스웨터에 체크무늬 짧은 고무줄 치마를 입은 여섯 살의 내가 기둥에 기대어 선 채 수줍게 웃고 있던 곳이 그 집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번지수는 물론 집안 구석구석, 거기서 맞닥트렸던 상황이나 장면까지를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집은 258-7과 100-475이다. 그러나 지금, 258-7과 100-475는 없다.

#100-475

서울 봉천동 비탈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했던 100-475는 벌써 20년 전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었다. 아슬아슬하게 공간에 매달린, 어설프기 짝이 없는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옥상은 온갖 푸성귀가 심긴 스티로폼 상자와 고무대야가 물탱크 주변으로 조르르 놓인, 어머니의 텃밭이었다. 멀리 관악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발 아래로 족히 열 개가 넘는 붉은 네온 십자가가 반짝거리는 동네가 펼쳐져 있었다. 처음 살아보는 양옥(洋屋)의 반(半)지하실에는 네루식(레일식) 연탄보일러가 있었다.

100-475의 반전 매력은 거실 바닥에 있었다. 남들은 알아챌 수 없는 조그만 구멍이 뚫린 거실 마루판을 열어젖히면 바로 물이 찰랑거리는 커다란 물탱크였다. 그 물탱크가 곧 반지하실 천장의 일부를 이루는 구조였다. 밤이 되어 수압이 올라가면 물탱크는 저절로 채워졌다. 고지대인 탓에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는 한 여름, 옥상의 탱크 물마저 다 쓰고 나면 우리는 거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비상식수를 퍼 올렸다. 6남매 중 다섯 명이 이 집에서 결혼을 했고, 내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났을 때 비로소 부모님만의 단출한 노후가 시작되었다. 내가 결혼 전까지 쓰던 방에서 두 아이의 산후조리를 하였으니 100-475는 내가 어른이 되어가는 시간을 함께 해준 셈이다. 그리고 이 집에서 우리는 아버지를 잃었다.

100-475가 가장 빛나던 때는 아버지 생전, 6남매가 불린 대식구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까르륵대던, 실로 짧은 시간 동안이었다. 혼자가 되신 어머니는 재개발을 앞둔 100-475를 떠나, 더 이상 비탈길이 아닌 전철역 근처 평지의 아파트로 옮기셨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그 아파트에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해야 했다.

#258-7

광주 월산동의 258-7마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건 불과 두어 달 전이다. 코로나 시국에도 미룰 수 없는 출장 용무가 생겨 휑하니 광주에 다녀오게 되었다. 공항에서 회의 장소로 이동하면서, 258-7 동네로 에둘러가는 길을 택했다.

아, 50년 전의 258-7은 그 자리에 없었다. 도로변으로 드리워진 기나긴 공사 차단막만 3월 을씨년스러운 바람에 펄럭일 뿐. 긴 골목의 초입에는 대성이네 점방이 있었고, 그 안집에는 내 친구 한영이가 살았더랬다. 이제는 없어진 골목 끝 파란 나무대문집 막내딸이 나였다. 길쭉한 직사각형 땅을 3등분한, 그 가운데 도막에 놓인 남녘의 전형적인 일자형 집 258-7. 왼편으로는 거의 집채만 한 창고와 오른편으로는 역시 집 넓이만한 텃밭이 있었으니 지극히 불합리한 공간 활용의 사례라 할 만했다.

258-7의 불합리성의 결정판은 우리 집 뒷담벼락 위로 난 길이었다. 그 집을 지어 이사하고 난 후에 뒷마당 담벼락을 축대 삼아 길이 생김과 동시에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방 안에 꽁꽁 숨지 않는 이상 윗길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는 꼴이었으니 실물거래에 있어 치명적인 단점을 지닌 집이었다. 하지만 히말라야시다, 태산목, 배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 포도나무, 모과나무들과 넝쿨장미, 텃밭의 고구마며 옥수수와 들깻잎, 상추 등과 함께 일곱 살배기 계집아이가 열네 살 소녀로 자라는 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6남매 중 유일하게 258-7에서 결혼한 큰언니가 첫 조카를 안겨 주었을 때 나는 ‘막내딸’에서 ‘막내이모’로 신분이 격상되는 듯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아버지가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 258-7은 더 이상 우리 집일 수 없었다. 거기까지가 258-7과 우리의 운명이었다.
 

#없어졌으되 사라지지 않는 집

이 나이에 이르도록 내가 살았던, 나를 살렸던 집은 물론 이보다 훨씬 많다. 거쳐 온 집들을 찬찬히 더듬어볼 때마다 스멀스멀 되살아오는 숱한 기억들. 어머니의 태(胎)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내 몸이 담겼던 물리적 공간, 그 집들에서 나는 만들어져갔다. 그 집들에 깃들어 사는 동안 나는 내 키와 몸무게를 산술적으로 합한 숫자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마음의 넓이와 정신의 깊이를 채워왔으니 나를 키운 건 8할이 그때 그 집들이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없어졌으되 결코 사라지지 않을 집들이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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