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갔다는 쪽에서 ‘땅땅땅’ 총소리…왜 죽었는지 밝혀 달라”
“오빠가 갔다는 쪽에서 ‘땅땅땅’ 총소리…왜 죽었는지 밝혀 달라”
  • 이정민 기자
  • 승인 2020.10.19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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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방법원 19일 ‘4.3 행불 수형자’ 재심 청구 사건 유족 신문
“경찰서 갔는데 사람들 ‘눈 가린 채’ 트럭에” 90대 할머니 눈물
80대 할아버지 “엄마 꿈에 작은 형 ‘엊그제 ‘팡팡’ 안 들립디가’”
재판부 “진술만 들어도 마음 아파 빠른 시일 내 개시 여부 결정”

[미디어제주 이정민 기자] 70여년 전 제주4.3 당시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망하거나 행방을 알 수 없는 '행불인 수형자'의 유족들이 재판부에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장찬수)는 1948~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군사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을 당하거나 행방을 알 수 없는 이들의 재심 청구에 대한 심리를 19일 속행했다.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된 피고인 수만 40명이고,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유족이 재판에 출석했다.

이날 심리는 피고인을 대신한 유족 신문으로 진행됐다. 소송 대리를 맡은 변호인(문성윤 변호사, 법무법인 원)이 먼저 신문한 뒤 검찰이 몇 가지 신문을 하고 재판부가 묻는 형태다.

27일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위반(강간 등 살인)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받은 박모(51)씨에 대한 항소심 두 번째 공판이 열린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 미디어제주 자료사진
19일 제주4.3 당시 '행불인 수형자'에 대한 재심 청구 재판 심리가 열린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미디어제주 자료사진

이날 오빠(故 문기호씨)를 대신해 참석한 문정어(96) 할머니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오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 문기호씨는 1925년생으로 신엄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1949년 봄 퇴근해 애월읍 고성리 집으로 향하다 체포됐다.

문 할머니는 "오빠가 잡혀간 것을 동네 아주머니 2명이 보고 알려줬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다 1개월 정도 지나 제주시 관덕정 부근에 있던 제주경찰서에 있는 것을 알고 면회를 했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오빠는 어린 나에게) 엄마 말만 잘 듣고 있으면 몇 달 지나서 나갈테니 같이 놀자고 했다"며 "면회도 잘 안 시켜줘서 몇 번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문 할머니는 자신이 살던 마을이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지는 모습도 봤다. 문 할머니는 "오빠가 잡혀가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우리 집이 타는 것을 봤고 동네가 다 탔다. 이 후엔 제주시내에 있는 외가에서 지냈다"고 말했다.

또 "8월 중순엔가 (오빠가) '목포로 가서 6개월만 살면 된다'고 해서 그 날 경찰서에 가보니 경찰서 문이 다 열려있었고 사람들이 눈을 가린 채 트럭에 실려 있었고 여러 대가 여러 사람을 싣고 가는 것을 봤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트럭이) 제주공항 쪽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와) 그 쪽으로 가다 당시 서문파출소 인근 다리에서 제지 당했는데 그 즈음에 '땅땅땅땅' 총소리가 계속 났다"고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문 할머니가 오빠의 생사를 확인한 것은 근래 수형인명부에 오빠의 이름이 있다는 유족회의 연락에 의해서다. 유골은 제주공항 인근에서 찾았고 4.3평화공원에 안치됐다. 문 할머니는 재판부에 "너무 억울하다. (오빠가) 무슨 죄로 처형됐는지 밝혀 달라. 오빠가 결혼도 못하고 무슨 죄로 이렇게 됐는지 꼭 밝혀 달라. 한이 맺힌다"고 이야기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작은 형(故 김여순씨)을 잃은 김여권(80) 할아버지도 증인석에 앉았다. 김 할아버지는 작은 형이 1949년 대정경찰서에 자수한 뒤 몇 번 면회를 한 뒤 연락이 끊겼다고 회상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행방불명인(행불인)유족협의회 관계자 등이 18일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지난 6월 제출한 재심 청구에 대한 조속한 심사 진행을 촉구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제주4·3희생자유족회행방불명인(행불인)유족협의회 관계자 등이 지난 2월 18일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지난해 6월 제출한 재심 청구에 대한 조속한 심사 진행을 촉구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김 할아버지는 "대정읍 신평리(현 안덕면)에 살았고 아버지는 옹기 기술자, 작은 형은 기와 기술자였는데 4.3 당시 중산간 마을에 해안으로 가라는 '소개령'이 내려져 모슬포로 갔다. 작은 형은 '젊은 청년이 중산간에서 내려가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혼자 마을(집)에 남았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신평리 소개 후 토벌대가 12월쯤 마을에 불을 질렀다. 그 때가 하늬바람이었다. 연기가 모슬포까지 가득했다"고 부연했다.

김 할아버지는 "이듬해(1949년) 봄에 부모님이 (타버린) 마을에 갔다가 옹기굴에 숨어 살았다는 작은 형을 만났는데 '대정경찰서에서 자수령을 내렸다'고 해서 자수를 시켰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면회는 작은 형이 경찰서 유치장에 3개월에 한 번 분뇨를 치울 때 경찰서 밖에서 잠깐씩 이뤄졌다. 세 번 정도 만난 뒤 소식이 끊겼다.

김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잠을 자다 일어나 '꿈에 아들(작은 형)을 봤는데, 엊그제 팡팡(탕탕)하던 소리 안 들립디가(들렸나요)라고 하더라'라고 했다"며 "그 때부터 작은 형이 죽은 걸로 생각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김 할아버지가 작은 형을 찾은 건 몇 해 전 제주공항 인근 유해발굴에서다.

김 할아버지는 "유전자 감식으로 (작은 형의 유해를) 알게 됐다"며 "4.3평화공원에 안장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작은 형 생일에,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 제삿날에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집 안에 이런 사고가 있었다. 명예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재판부에 부탁했다.

재판부는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술만 들어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말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에 따라 이날 피고인(유족) 신문을 종결하고 검찰 의견서가 제출 되는대로 검토해 빠른 시일 내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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