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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고 온 것들에 대하여
내가 두고 온 것들에 대하여
  • 미디어제주
  • 승인 2020.08.03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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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건축 [2020년 3월호] 칼럼
- 김수열 시인
김수열 시인.
김수열 시인.

#1

내가 살던 무근성 집엔 꽤 깊은 우물이 하나 있었다. 여름철이면 탑 아래서 멱을 감던 우리는 뽀뿌린 빤스 한 장 걸친 알몸으로 우르르 우물가로 내달렸다. 고사리 같은 손아귀엔 보말, 조쿠젱기 그리고 이따금 오분작이 들려 있었다. 우물가에 닿으면 고추 내놓고 킥킥대며 입술이 파래지도록 우물물을 뒤집어썼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달이 나고 말았다. 우물 있는 집이라고 텃세를 부리다 그만 우물에 퐁당 빠지고만 것이다. 나는 두레박을 부여잡고 내 허세를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줄초상집 맏상제처럼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친구 하나가 옆집 형을 데리고 왔다. 형은 긴 장대를 들여 주었고 나는 쇠꼬챙이에 꽂힌 통닭처럼 매달려 여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저승 문턱에서 돌아온 내가 닭똥 같은 눈물로 애걸복걸 형에게 했던 첫 마디,

“형, 우리 어멍한테 말허지 말아예. 우리 어멍 알면 난 끝장이우다! 혀엉!”

형은 약속을 지켰고, 형의 말이라면 나는 하느님 섬기듯 따라야만 했다. 그 즈음으로 기억한다. 무슨 연유에선지 어머니는 우물 위에 양철지붕을 덮어 출입을 금했고 벗을 잃은 우물은 시나브로 바닥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2

때론 바다가 무서웠지만 바다를 바라보는 건 그저 좋았다.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더욱 좋았다. 물마루에 걸린 아스라한 별빛을 본 건 아마 국민학교(나는 초등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 2학년 무렵이었을 거다. 별이, 그것도 뭇별들이 아득한 물마루에서 찰랑대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지만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물마루에 떠있는 별들을 보면서, 비로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별들의 고향은 바다라고.

아, 그렇구나. 별은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로 스미는 구나. 그럼 별은 언제 하늘로 오르지? 밤을 지새우며 진물이 나도록 물마루를 지켜봤지만 하늘로 올라가는 별들을 끝내 보지 못했고, 다음날도 그랬다. 하는 수 없다. 탑 아래 사는, 아버지가 어부인 친구에게 물어볼 수밖에.

“무싱거? 너, 또라이 아니? 저건 갈치 잡젠 배에 불 싼 거 아냐, 이 갈치대맹아!”

졸지에 나는 갈치대맹이가 되었고, 내 마음의 별은 터진 풍선처럼 꺼지고 말았다. 근데 나는 지금도 우긴다. 별이라고. 그건 집어등이 아니라 물마루에서 놀던 별들이라고.(참고로 그 친구는 훌륭한 뱃놈이 되었고 나는 고만고만한 시인이 되었다.)

#3

80년대 후반, 반려자를 만나기까지 무근성에서 살았다. 서가축병원 지나 장공장 골목에 내 유년에서 청년까지의 시간과 공간이 남아 있는 셈이다.

내가 살던 마당 너른 기와집은 누구에겐가 팔려 흉가처럼 추레하게 있다가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대신 콘크리트 건물이 흉물처럼 들어앉았다. 그래서인지 무근성엔 가기가 싫다. 아니, 쉽지가 않다.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죄 지은 마음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우연히 무근성에 가게 되면 낯선 이방인처럼 힐끗 지나치고 만다. 그때 그 골목, 그 집들이 마치 내게 ‘너,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사니?’ 하면서 째려보는 것만 같아 뒷목이 뻣뻣해진다. 천둥벌거숭이로 나뒹굴던 시절은 무근성을 떠나오면서 멈춰버린 것이다. 먹돌마저 매립되어버린 탑동 바다를 서성이다 쭈뼛쭈뼛 옛날 장공장 골목으로 들어선다. 불현듯 내 유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하 교장네 집 공부만 하던 원형이형, 그 앞집 풍금소리 담을 넘던 부산으로 이사 간 양갈래 댕기머리 그 아이, 쌍둥이네집 애자누나 숙자누나 무근성 펠레 종표형 그 동생 종보, 한쪽 다리 절면서 유난히 축구를 좋아하던 상욱이형, 마당 너른 네커리 기와집 윤할망네 집 문간방에 살던 주씨 성을 가진 새침때기 미령이, 우물이 깊은 집 민수형 현수형 그리고 준수, 우리 골목에 제일 먼저 테레비를 놓은 집 충하형 충희형네 집, 몰레물할망네 집 그 손자손녀 순둥이 성훈이 요망진 진의, 딸만 일곱 순실이 순생이네 집, 방학 때면 동네 아이들 불러 모아 골목청소 감독하던 제일 무서운 집 골목대장 원우형네 집 그 아래 원진이형, 어머니 심부름으로 됫병 들고 간장 사러 갔던 집 그 집 딸 이름이 영숙이였나 언제나 내외하던 그 아이, 장공장 옆 어느 날 죽은 상수형 그 형 죽어 동네 아이들 곤밥 달게 먹여준 집 그 아래 상종이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 「장공장 골목」(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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