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7:06 (화)
이세환 건축사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이세환 건축사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 미디어제주
  • 승인 2020.07.20 11: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건축 [2020년 2월호] 이슈
양성필 건축사사무소 아키제주
이세환 건축사(1938-2019)

아침에 세수를 하려는데 손가락이 쓰려왔다. 손을 다칠 일을 한 적이 없는데 검지 위로 가는 칼자국이 생겨 있었다. 이게 무슨 상처일까 생각하는 순간에 어제 만졌던 트레이싱 도면이 떠올랐다. 이세환 선생의 아들인 승택 씨랑 트레이싱 도면을 만지면서 1990년대 초반에 첫 직장에서 도면을 그리던 이야기를 하였다. 선생의 예전 작품들을 볼 수 있을까 찾아갔던 고인의 사무실에서 트레이싱 도면을 들춰보다가 트레이싱지에 손을 베인 것이다.

처음 직장에서 트레이싱 도면을 만지다 손을 베인 기억이 떠올랐다. 사무실 안에서 청사진 냄새가 풀풀 나던 기억을 갖고 있는 건축사들이 많을 것이다. 이미 사라진 풍경이지만 우리의 가까운 역사도 많이 변하였다. 우리가 고정되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가까운 과거도 잠깐 잊고 있는 사이에 멀리 달아나서 내 곁에 없는 공간으로 가버리고 만다.

한 사람의 사라진 과거를 돌아보고 회상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사라진 과거를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물론 트레이싱 도면 몇 장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생이 동아대를 졸업하였던 1966년은 건축사 시험제도라는 것이 생긴 바로 이듬해였다. 1965년 시험을 통해 건축사 2급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전국에 몇 명이나 되었을까? 초기의 건축사들에게 건축사라는 직업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1970년 이세환 선생이 설계사무소(이세환건축사사무소)를 개설할 당시 제주도에는 1급 건축사 4명과 2급 건축사가 8명이었다. 서귀포에는 오제민 건축사와 김백교 건축사 두 분 만이 개업을 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건축사는

960명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비판적으로 말하면 혹자는 호시절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제주에만 300명이 넘는 건축사가 있는 현실에서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일 뿐이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다른 건축사라는 직업인으로서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선생의 1970년대의 작품은 알려져 있는 게 없다. 70년대 개업은 하였으되 2급 건축사로서의 역량범위의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1970년대에는 서귀포에서는 감귤산업이 인기를 끌면서 감귤저장고의 설계의뢰가 많았으며, 새마을 운동의 영향과 1970년의 서귀포시가지의 1호, 2호, 3호광장을 연결하는 가로망의 완성으로 새로운 주거지의 설계가 매우 많아서 직업으로서의 건축사는 호황을 누렸던 것은 사실이다.

작품으로서의 선생의 성향을 거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2명이 시험보러 가서 혼자 2급건축사시험에 붙었다고 하면서도 “뭐 딸라고 헌게 아니고, 아이들 데리고 집사람 데리고 기차 한 번 태워달라고 그래서 서울 올라가서 시험본 게...” 하는 식으로 본인의 노력을 쉽게 말해버리는 놀라운 가벼움에도 이유는 있다. 그렇게 스스로의 작업 또한 작품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성품이었다. 하지만 필자가 서귀포에서 매우 디자인이 좋아보였던 단독주택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던 선생의 디자인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서귀동 322-5번지 주택(1981년 사용승인)은 서문로터리에서 1호광장으로 올라가는 경사지에 지어진 주택이다. 길에서는 담장 너머로 건물의 측면만을 볼 수 없었지만 이전의 집들과는 다른 날렵하고 균형 잡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귀포에서 1970년대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초반의 집들은 전면에 포치가 있고 눈썹지붕과 기성품 난간과 같은 것으로 특징지어진 모습들이었다. 화장석을 수평줄눈를 두어 마감하고 창문의 상인방 선으로 건물 전체의 몰딩을 두르고 상부와 몸체를 구분한 모습은 벽체 전체를 하나의 마감으로 하는 것이 상식이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상당히 세련된 입면이었을 것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게다가 길이 있는 방향으로 코너에 창을 둔 모습은 매우 독창적인 시도이다. 당연히 경사지의 길로 인한 개방된 방향으로 남성리의 풍광을 실내로 끌어 들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생전의 사무실 도면들.
생전의 사무실 도면들.

서홍동에는 폭 5미터의 골목을 끼고 2층집이 줄지어 있는 단지를 만날 수 있다. 이 골목에 면한 주택들은 모두 선생이 설계했다는 거주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다시금 골목 안의 주택들의 모습을 보면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같은언어를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설계는 누가했는지 혹시?) 이세환 건축사가 했어요. 여기 열 개는 그 분이 했어요. 한꺼번에 설계가 나왔어요. (그래도 집들은 도면이 다 틀리지예? 제각각..) 그렇죠. 구조는 다 다르죠. 평면도는 자기들이 조언을 받고, 각자가 다 다르게 했죠. (설계할 때 그러면 처음에 설계사무소에서 제시를 먼저 합니까?) . 먼저. 제시했어요.
- 2019917. ○○(, 1948)

서홍동 374-30번지 주택(1983년 사용승인)을 보면 역시 화강석의 몸통과 창문의 상인방 위로는 백색의 마감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은 화강석이 아닌 제주현무암을 마감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동일한 패턴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보인다. 이렇게 상인방의 높이를 맞추고 재료를 정리하는 방법은 입면의 수평성이 강조되면서 다양한 크기의 창문들이 잘 정돈된 것처럼 시선을 유도한다. 실제로 선생이 설계한 주택의 입면들은 군더더기 없이 정렬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디자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필자는 문예회관(1985년 사용승인)의 입면에서 그러한 패턴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198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전통건축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시기였고, 문예회관의 입면은 제주전통민가의 입면의 패턴과 디자인의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필자의 견해로는 선생의 주택에서 보이는 이러한 패턴 역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습득되어진 전통적 입면의 해석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서홍동 374-30번지 건축주인 김○○씨는 선생이 제안했던 안방과 침실을 분리하였던 평면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고 하였다. 지금은 안방에 침대를 두고 손님맞이는 거실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패턴이지만, 당시까지도 손님을 안방으로 들이는 관습이 남아있었다. 때문에 침대생활을 원했던 건축주의 의도와 당시의 생활패턴을 고려하여 침대방을 따로 두자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생이 건축사로서의 독창성과 설계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여기는 제사를 지내야 된다...미닫이문 있는 방은 꼭 하나가 있어야 돼요. 첫째. 그리고 방은 네 개. 부엌 하나, 꼭 필요하다면은 부엌의 일부분이 마루가 되니까... 그 밑에 조그마하게 만들어 가지고 사다리 타고 곡식도 놓고... 저장고.
 - 2018
63. 이세환 선생

건축사에게 시대의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분이 이해하였던 1970년대의 시대상황이라는 것은 감귤 저장고로 기억되는 정신없이 도면을 양산해야 하는 시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의 선생의 작품들은 자신의 디자인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에 일호광장에 지어진 근린생활시설(서귀동 299-6번지) 역시 그러한 시기에 디자인된 건물이다. 선생의 나이 40대 후반의 시기에 가장 왕성한 디자인 욕심을 부릴 수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창문은 지금처럼 커튼월과 같은 과감한 개방감을 줄 수는 없는 시기였다. 하지만 평면적인 입면을 피하기 위한 시도는 기둥의 앞에서 뒤로 셋백되는 창문으로 만들어진다. 상가의 창문에는 깊은 처마를 만들고, 창대 아래에는 먼지가 쌓이지 않게 경사벽면을 만들었다. 그리고 계단실로 인한 입면의 변화를 줄이기 위해서 계단 상부의 입면을 뒤로 빼어서 입면의 변화를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이 또한 입면을 정돈하는 기법으로 구상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상가건물의 창을 기둥의 뒤쪽으로 빼면서 처마를 만들거나 조경공간을 만드는 방식은 서귀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또한 여러 차례 시도된 입면의 패턴중 하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사무실 운영하면서 사무실의 분위기는 예 이세환건축사 다녔던 그때 분위기를 많이 따라가려고 노력을 헴수다게. 조금은 자유분방하게. 되도록이면 직원들이 알아서 해주는 걸 원칙으로...
- 20191223. 이동기 건축사.

한때 16명의 직원까지 있었다는 선생의 사무소에서는 많은 서귀포의 후진들이 거쳐 지나갔다. 이동기 건축사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쾌활하였던 선생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본인도 사무실의 운영을 그렇게 밝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고 하였다. 선생의 기억은 이렇듯 작품이 아닌 인간적 삶의 모습으로도 기억에 남아있다. 어쩌면 이들을 통해서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이세환 스타일의 건축이 또 다시 세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로는 알면서 기억하기도 하지만 모르는 사이에 젖어들기도 한다.

건축사협회에서는 이제 우리의 기억들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선배들의 삶을 무의미하지 않게 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건축사들의 삶 또한 무의미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이 될 것이다. 좋은 작품을 발굴하고 기록하고 작품의 의도를 살피는 작업들은 누구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역에 머물러 있다는 한계를 지역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단편적으로나마 이세환 선배의 작품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더불어 생각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