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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와 『숨은 밤』
<브이 포 벤데타>와 『숨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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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5.1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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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16>

제임스 맥티그 감독의 <브이 포 벤데타>(2005)는 독재와 혁명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전형적인 가상의 독재 국가와 그것에 맞서는 전형적인 혁명가 캐릭터를 내세워 한결 같은 메시지(통제와 저항)를 전달하는 직설적인 화법을 취한다. 선악과 피아가 명쾌하게 나뉘는 단순함은 미학적으로는 실패에 가깝지만 대중영화로서는 가타부타 불편하게 생각할 거리가 없는 통쾌한 미덕이 된다. 설령 혁명가 ‘브이’가 파괴와 혼란을 이용해 대중을 선동한다는 점에서 독재자 서틀러와 동전의 양면처럼 닮아 있다고 해도, 대중의 지지와 관객의 사랑을 얻기 위한 코드들로 빈틈없이 짜인 그의 캐릭터는 비판적인 사유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그는 몬테크리스토처럼 치밀하며 햄릿처럼 비극적이고 우아하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방대한 운문의 대사들처럼 브이의 캐릭터 또한 과잉되어 있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저건 미친놈인가?’하는 싸한 눈빛을 보내는 이비의 역할 덕에 그러한 작위적인 유치함은 애교스럽게 넘어간다. 브이는 실체를 가진 인간이라기보다 그가 터트리고자 하는 국회의사당 건물처럼 하나의 상징(symbol)으로 인식되고자 한다. 그 ‘상징’이 이끌어가는 혁명에 사람들은 동조하여 스스로 가면을 쓰고, 결말부에서 관객은 광장에 몰려들어 가면을 벗고 불꽃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시민 중 하나가 된다. 이비의 말대로 브이는 “나였고, 당신이며, 우리 모두”인 것이다. 그러나 이비의 내레이션은 혁명의 대열로부터 조용히 빠져나온다. 이때의 내용은 도입부에서의 내레이션과 연결된다.

“우린 사람이 아닌 신념을 기억하라고 배웠지. 사람은 실패하니까. 체포되고 처형되어 잊히니까. 나는 신념의 힘을 직접 봐왔어.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죽이고…… 죽는 것을 보았지. 하지만 신념에는 입 맞출 수 없어. 만지거나 잡을 수도 없지. 신념은 피 흘리지 않아. 그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아. 그것들은 사랑을 하지 않아……(We are told to remember the idea and not the man. Because a man can fail. He can be caught, he can be killed and forgatten. I've witnessed firsthand the power of ideas. I've seen people kill in the name of them… and die defending them. But you can not kiss an idea, can not touch it or hold it. Ideas do not bleed. They do not feel pain. They do not love).”

왜 영화가 이비의 시선을 따라가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1605년 가이 포크스의 사형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어느 여인의 독백으로 시작되고, 곧바로 이비와 브이가 각자 몸단장을 하며 외출을 준비하는 화면이 교차된다. 통금 시간에 비밀경찰(핑거맨)을 마주쳐 위기에 처한 이비를 구해주며 브이는 처음 서사에 등장한다. 이후 위기에 처한 브이를 거꾸로 이비가 구해주며 둘이 본격적으로 얽히는 사건 직전에도 하나의 삽화가 있다. 방송국에서 일하던 이비는 경비원이 보던 TV 드라마에 흘긋 시선을 던지며 저런 쓰레기 같은 걸 보느냐고 툭 쏘아붙인다. 이 드라마 화면은 이후 브이가 방송국을 점거하는 장면/이비가 방송국에 찾아온 경찰을 피해서 숨는 장면과 교차되며 한 번 더 나온다. 멋진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미녀를 구출해내는 진부한 영웅 서사다. 왜 영웅은 (그냥 세상만 구해도 되는데) 미녀를 필요로 할까? 바꿔 말해, 왜 이야기의 주인공은 왜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을 필요로 하는가? 비단 브이만 그런 것은 아니다. 브이의 거처에 함께 은신하던 중 이비는 자신이 연모하는 상사 디트리히를 재회하기 위해 은신처에서 빠져나간다. 얼마 안 있어 디트리히가 반정부적 행각 때문에 비밀경찰에 체포되고, 함께 있던 이비도 붙잡혀서 심문 당한다. 이때 그녀는 옆방의 죄수가 벽 틈새로 보내오는 쪽지를 받는다. 쪽지에 적혀 있는 것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가족에게서 쫓겨나고, 끝내 체포되어 죽어가는 죄수 자신의 자서전이다.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긴 쪽지는 끝난다.

김유진의 장편소설 『숨은 밤』(2011)은 방화로부터 시작한다. “불은 구유에서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첫 문장과 동떨어진, 불을 피해서 두 아이가 산을 오르는 장면이 소설의 도입부이다. 한 아이는 소설의 화자인 ‘나’이고, 다른 아이는 불을 지른 범인인 ‘기(基)’이다. 소설은 부모도 없고 제대로 된 집도 신원도 없는 두 아이가 흉흉하고 몰인정한 분위기의 고립된 시골에서 어떻게 홀로 살아가는지를 덤덤하게 그려나간다. 교환할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은 이방인에게 더없이 냉혈한 공간에서, ‘나’는 천천히 자취를 지우고 죽어가듯 순응하지만 기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해보려고 발버둥 친다. 학교에 다니려고 한 시도가 실패한 뒤 기는 마을 곳곳에 불을 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는 단순히 복수심과 파괴 욕구 때문에 방화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동조하지도 않는 ‘나’에게 기는 자신의 범죄들을 무용담처럼 고백하고, 보란 듯이 ‘나’ 앞에서 작은 불을 내어 타인의 물건을 태워버리기도 한다. 방화는 “구유에서 시작”된 자신의 존재를, 모욕당하고 거부된 기의 분노와 복수심을 드러내는 수단이지만 그 이야기 또한 관객을 필요로 한다. 그 불을 지켜보며 자신 곁에 있어주는 ‘나’가 없으면 기의 방화에는 의미가 없다. 이비가 디트리히를 재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브이를 떠난 것처럼, ‘나’는 철없는 기가 아니라 부모를 대신해 자신을 돌봐주며 어탁을 가르친 어른 ‘안(雁)’에게 애착을 갖는다.

기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누굴 싫어해?/ 나는 나를 싫어해./ 그럼 누굴 좋아해?/ 나는 안을 좋아해./ 왜 안을 좋아하지?/ 안이 내 곁에 없으니까. (김유진, 『숨은 밤』, 문학동네, 2011, p.202.)

그러나 안마저 어느 날 거처를 떠나 돌아오지 않자, ‘나’는 빈 집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린다. 결국 기는 그 집에 불을 질러서 ‘나’를 끌어낸다. 둘은 함께 산에 올라 불타는 마을을 내려다본다. 함께 동굴에 숨어들어 함께 잠들고 아침을 맞는 두 아이는 그들만의 창세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방점은 그‘들’에 찍힌다. 아담 혼자서 창세기를 시작할 수 없었듯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에 매혹당할, 최소한 함께 있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기에게 물었다.// 너는 누굴 싫어해?/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 그럼 누굴 좋아해?/ 나는 너를 좋아해. (위의 책, p.203.)

<브이 포 벤데타>는 정확하게 ‘복수를 위해’ 존재하는 브이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브이의 욕망이 복수 자체보다 그것을 지켜보고 그 정당성을 승인하며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 즉 이비에게 향해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비가 11월 5일을 혁명의 불을 지른 가면이 아닌 그 가면 뒤의 남자로 기억한다는 마지막 독백은 그것을 반증한다. 그 점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범죄로, 또는 혁명으로, 이기적이고 유치한 자기과시로, 또는 대의를 위한 선전으로 보는 것과 별개로 그들 자신의 욕망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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