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23:43 (목)
달리기의 추억
달리기의 추억
  • 홍기확
  • 승인 2020.05.04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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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27>

18초. 100미터 달리기에서 내가 가장 빨리 달린 기억의 기록이다. 빨리 달리기에서, 특히 운동회에서 1등은커녕 2~3등을 한 기억도 드물다.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도무지 탄생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달리기 시합에서 나는 3등을 했다. 도착점에 오자마마 얼굴도 모르는 선생님이 성가시다는 듯 내 팔을 낚아채어 도장을 찍어주었다. ‘3등’

1등을 한 아이에게는 환한 얼굴로 스케치북을 주었다. 2등을 한 아이에게는 웃는 얼굴로 공책을 주었다. 3등은 누구도 찾지 않았다. 4등은 옆에서 울고 있었다.

그 때 알았다. 잘하면 보상을 받는구나. 나는 생애 처음으로 경쟁이라는 걸(그때는 몰랐지만) 겪었던 것이었다.

 

경쟁은 보상에서 생긴다. 100미터 달리기조차 순위에 차등으로 보상을 한다. 보상에 큰 격차가 있다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게다가 경쟁에서 통과식과 같은 절대평가보다, 아무리 잘하더라도 순위가 있는 상대평가와 같은 평가체제는 더욱 경쟁을 심화시킨다. 또한 그 결과는 우열(愚劣)과 성패(成敗)를 만든다. 열등하고 실패한 자는 포기하고, 뛰어나고 성공한 자는 더욱 달린다. 결국 《지위경쟁》이라는 책을 쓴 마강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쪽에서는 과로가, 한 쪽에서는 실업이 넘친다.’

 

다시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1등은 1등을 하기 위해 달렸다.

2등은 1등을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

4등은 원체 느린 아이였다.

나는 3등을 했다. 그럼 나는 뭐지?

 

1등은 죽어라 달렸다.

2등은 죽도록 달렸다.

4등은 죽기 직전까지 달렸다.

3등인 나는 달리라고 하니 달렸다.

 

1등은 원래 빠른 놈이다. 다리가 금수저로 되어 있다.

영화 《알라딘》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인 지니의 말이다.

‘권력과 지위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소원이 될 수 없다.’

내가 1등을 하면 좋을까? 달리기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뭐.

 

2등은 엄청난 노력파다. 하지만 다리는 은수저다.

속담이 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

내가 1등을 이기려다 실패해서 2등을 하면 좋을까? 숨만 가쁘지 뭐.

 

4등은 재능이 없다. 다리가 흙수저다.

달리기를 하지 말았어야지. 공평한 게임이 아니지 않았나? 왜 아이들의 체력조건, 건강상태, 흥미유무를 떠나, 가나다 이름번호순으로 4명씩 잘라 불공평한 게임을 하는 것인지? 4등이 예정된 불공정한 규칙이었다면, 게임에 참가하지 않았어야 했다.

 

3등이었던 나. 그냥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재능과 다리능력, 노력도 보통이다.

하지만 불공정한 게임이라도 참가에 의의를 두었다. 부모가 보고 있었으니까. 달리기하면서 엄마와 아빠가 어디 있나 찾다가 좀 천천히 달린 점도 3등을 한 이유라면 이유다.

 

우리 가족은 마라톤을 한다. 속도는 아내가 제일 빠르고, 그 다음이 나, 마지막으로 아이가 결승점에 들어온다.

우리는 각각의 속도로 달린다. ‘결승점’이 아닌 ‘도착점’에 각각 도착한다. 그리고는 마지막 주자를 기다린다. 우리는 성적표가 아닌 기록증을 받는다. 땀을 닦고 서로를 격려한다.

 

초등학교 운동회의 달리기는 스포츠를 통한 사회화의 시작이 아닌, 무모하고 기준 없는 무한경쟁의 시작이다. 원래 달리기란 타인과의 승부(勝負)가 아닌, 자신의 승리(勝利)가 목적이다. 아직까지 달리기의 추억 중 나쁜 상처가 남아있는 걸 보면, 학교라는 ‘제도’에 잘못이 있지 않을까?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 감귤박물관운영담당
현 서귀포시 공무원노동조합 사무국장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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