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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카이사르의 순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카이사르의 순무」
  • 최다의
  • 승인 2020.04.1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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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15>

피터 웨버 감독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3)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실존 인물과 실재하는 작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17세기 네덜란드 풍속을 담아낸 화면과 푸줏간의 핏물이며 걸레질하는 비눗물 냄새로 숨이 턱턱 막히는 분위기 또한 생생하지만 이 이야기는 분명한 픽션이다. 줄거리를 대략 요약하면 미술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그걸 펼칠 기회는 갖지 못한 그리트가 생계를 위해 델프트의 화가 베르메르의 집에 하녀로 취직하고, 장인적인 고집 탓에 작업이 자꾸만 미뤄져 파산 위기에 놓인 베르메르는 그녀의 미감에서 영감을 받아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라는 명작을 완성해낸다. 그러나 불륜을 의심받고 그리트가 쫓겨나는 것으로 그림에 얽힌 전설은 일단락된다.

일단 베르메르는 전업화가라기 보단 화상을 경영하던 사업가 겸 감정가였고, 진주 귀고리를 한 그 그림 속 여자가 하녀였는지 귀부인이었는지는 그야말로 아무도 모를 일이다. 영화는 전설에 낭만의 색채를 입힌다. 그리트가 1인칭 화자인 시점을 통해 덤덤하게 자기 이야기를 이어가는 소설보다 영화의 색감은 한결 습윤하다. 영화에서도 무표정한 그리트의 얼굴에 복잡하지만 틀림없이 연약하지는 않은 분노가 단단하게 차오르는 순간들은 곧잘 포착된다. 영화가 소설처럼 그리트의 시선으로만 서사를 따라갔다면 영화는 비도덕적이고 무능한 상류층들이 어린 하녀 하나를 못 뜯어먹어 안달인 이 썩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존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마치 베르메르의 화폭 같아서 구질구질한 일상의 순간을 ‘그림 같은’ 원경으로 잡아낸다. 그리트가 힘겹게 빨래를 삶고 뜨거운 비눗물에 손을 데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조차 그 공간에 햇빛이 사방으로 반사하는 수많은 색채들은 경이롭다. 그리트가 풍경의 일부가 될 때 그녀가 분노하건 슬퍼하건 그녀는 세계 안에서 아름답다.

그래서 그리트는 그 똑똑한 성격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의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낭만의 세계로, 부드럽고 따뜻한 ‘인디안 옐로우’ 색 동화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다. 구름이 하얀 색이 아니라 푸른색과 노란색과 은빛인 곳으로, 보석과 기름이 색채가 되는 마법 같은 공간으로. 그녀가 <굿윌헌팅>처럼 개천에서 솟은 용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화의 세계에서 공주의 방해꾼은 마녀(밥맛없고 질투심 많은 마님?)와 용(비열한 난봉꾼인 후원자?)뿐이지만 그녀는 환하게 빛나는 왕자의 형상을 찢어내고 그 뒤의 현실로 걸어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림과 미학에는 일자무식이지만 솔직하고 성실한 푸줏간 소년 피터와 함께 평범하고 안온한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그림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서.

구병모의 『빨간구두당』(창비, 2015.)에 실린 「카이사르의 순무」는 동화 속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문장들은 건조하고 냉정하다. 악마가 찾아와 밭의 작물을 내놓으라고 시비를 걸더니 제분을 못 이겨 스스로 몸을 반으로 쪼개버리고, 쪼개진 악마가 묻힌 밭에선 집채만큼 커다란 순무가 자라더니 순무에 붙어있던 악마의 뼈는 순무가 바쳐진 왕궁에서 노래까지 부른다. 이런 세상이니 사람들은 자기가 동화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이라도 할 성 싶지만 그렇지는 않다. “애당초 그들은 삶에 깔린 자갈 같은 피로에 불신이나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 삶 또한 현실의 어느 흔한 자갈밭만큼 팍팍해 “생활을 위해,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동을 위해 스스로의 실루엣을 기꺼이 지우거나 돌출부를 깎아 냄으로써 한없이 둥그스름해지고, 그러므로 언젠가는 평평해지며 밋밋해지는 일이 당연한” 것이다.

환상에 잠시 고개를 들이미는 ‘실수’를 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 빈곤한 삶에서 환상과 동화란 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힘없는 하녀가 아름다운데다 재능이 걸출한 것은 그리트 자신에게 재앙이었다. 천재 화가와 천재 견습생의 교감은 후원자의 비아냥대로 “뻔한” 불륜일 뿐이다. 베르메르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녀를 내쫓고 아내와 화해한 뒤 후원자와도 차차 상황을 풀어가겠지만, 만약 그리트가 까딱 실수해서 동화의 호수 속으로 한 발을 잘못 디뎠더라면? 베르메르의 또 다른 그림 속 붉은 드레스를 입은 하녀가 주인의 사생아를 배고 쫓겨났다는 소문은 그리트의 미래가 될 수도 있었을 우울한 청사진이다.

시체를 암매장했던 밭에서 난 기괴하게 거대한 순무를 왕궁에 바치러 간 농사꾼 부부는 뼈가 부르는 노래 탓에 살인자로 몰린다. 부모는 옥에 갇히고 고향은 진상 조사를 빙자한 약탈과 방화로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 어린 남매는 간신히 숲으로 도망친다. 다리를 저는 동생의 손목을 붙잡고 달리면서 소녀는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뜨면, 고단하나 단조롭기에 평화로운 일상을 침범했던 환각의 습기가 바싹 마르고, 모든 것이 익숙한 세계의 올바른 자리에 돌아”가길 절박하게 바란다. “그러나 밤의 목을 조르는 듯한 짐승들의 울음소리에 소녀는 다른 어디도 아닌 여기가 현실임을 잊지 않는다.” 이 동화의 끝은 딱히 희망적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리 우울하진 않다. 현실에는 늘 한 가지 얼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게 현실의 나쁜 점이자 좋은 점이다. 눈앞의 사람은 왕자가 아니라 그녀처럼 가족과 농토를 잃은 불우한 떠돌이일 뿐이지만 “비로소 소녀는 눈앞의 남자와 그의 손이 실제임을 믿는다. 팔을 뻗어 그것을 잡자 거칠고 난폭한 현실이 손안에 뿌듯하게 만져진다.”

한 때의 동화는 꿈결처럼 지나간다. 그것이 악몽이든 좋은 꿈이었든 동화가 끝나면 주인공들은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코렐라인>처럼 그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그렇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소설 원작은 하녀 일을 그만 둔 뒤 피터와 결혼해서 평범한 농가 아낙으로 살아가던 그리트에게 옛날 그 진주 귀걸이가 돌아오자 그리트는 그것을 팔아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제 자신은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다면서 그리트는 하녀는 이제야 자유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는 귀걸이를 받은 그리트의 경련하는 듯한 표정을 클로즈업하며 침묵 속에서 끝난다. 그녀는 주변의 경고와 악의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베르메르를, 그가 보여준 빛과 물감, 색채와 구상의 세계를 사랑했던 것 같다.

이제 모든 동화의 시절은 끝나버렸는데, 그래도 하녀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가 되어야 할까. 그리트는 더 이상 그곳에서 착취당하고 모욕 받던 그 하녀의 시선이 아니라 영화를 따라가던 카메라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모멸과 폭력으로 얼룩진 그 시절에 칠해진 아름다운 색채—후원자는 베르메르가 그림을 칠한 인디안 옐로우 물감을 보며 그것이 ‘소의 오줌’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갖고 저급한 농담을 해댄다. 그림을 이루는 아름다운 노란색과 그 원료 사이의 간극은 그리트가 처한 상황 자체에 대한 암시이다—가 그 기억마저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들었다. 영화 속의 그녀는 그래서 소설과는 달리 귀걸이를 쌌던 천을 구겨버리는 서러운 몸짓에도 불구하고 귀걸이를 쉽사리 팔지 못할지도 모른다.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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