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5:30 (화)
얄미운 안개 속 작은 얼음꽃
얄미운 안개 속 작은 얼음꽃
  • 황병욱
  • 승인 2020.01.20 1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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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저, 별빛 제주 버스 여행일기]<3>

2020년 1월10일은 그 전날 한라산 눈 소식이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버스를 타고 영실로 향했다. 1,100고지를 지나는 찰나 하얗게 옷을 입을 모습에 부푼 꿈을 안고 영실매표소에 도착했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1,100고지는 나무 어깨 하얀 가루가 뿌려져 한층 멋을 냈고 그보다 더 위층에(윗세오름) 있는 분칠한 녀석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파란 얼굴을 드러낸 하늘 위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이 살짝 미웠다.

버스에서 내리니 시간은 8시 30분. 늦지도 않고 이른 시간도 아니었지만, 눈앞에 그려진 모습에 전신의 맥박이 간질간질했다. 땅에 발이 닿는 즉시 정상을 향해 마구 내달렸다. 영실 매표소에서 산행 입구까지 거리는 2.5km, 다시 정상까지 5.8km 정도 ( + ) 합이 8km 정도로 오늘 대략 걷게 될 거리였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겨울 산행에 있어 웬만큼 땀을 흘리지 않고 두텁게 입은 겨울 잠바로 산의 모습을 쉽사리 볼 수 없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한라산 성판악을 오를 때였다. 렌즈를 통해 사람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를 담기 위해 산행길 위 구석구석 숨어있는 사람을 찾은 걸음에 헉헉대고 있을 때 쌩하니 누군가 옆을 지나갔다. 아니 지나간 게 아니라 스치고 사라졌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가파르진 않지만, 성판악 코스의 거리는 9.8km, 그걸 뛰어서 오르는 것은...

"미쳤다. 저러다가 심장 터지고 말지. 누가 한 사람 잡을 작정인가? 죽어야지 정신 차릴까?" 두뇌는 그렇게 말했다.

 

숨이 찼는지 잠시 걸음이 느려졌고 그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혹시 어디서 왔어요." "ㅇㅇㅇ에서 왔고, 씨름부입니다." 이야기의 중점은 뛰어 백록담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젊고 어리다지만 기온, 고도의 기압, 험난할 돌길로 인해 심장은 정신없이 나대고 다리의 관절이 놀라 삐걱댈지도 모른다. 감독의 생각은 비합리적이라 생각했다.

왜! 1,100고지의 상황보다 열악한 겨울의 모습을 보였다. 실망이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쩌다 이끼 낀 마냥 병풍바위에 하얀 눈이 눈물을 흐른 모습에 감탄사를 날렸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은 온통 나무 가지위에 하얀 가루가 도포되어 있기만 바랬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행객의 말들이 귀속을 스쳤다. "정상에 눈꽃이 있어요. 빨리 가보세요." 이런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을 상황이다. 산행에 있어 다 죽어가는 불씨의 희망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씨름선수처럼은 아니라도 심장이 터져 나올 때까지 계단을 밟고 올랐다. 한참을 올라 우거진 나무 사이로 서서히 나타난 겨울 동자가 눈꽃잔치를 열었다. 생각보단 못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쉬움을 녹았고 아름다움에 감탄을 내뱉었다. 감탄을 내뱉을 수 있던 건 눈꽃이라서 아니라 그보다 좀 더 업그레이드된 얼음꽃을 대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태양에 녹고 얼고, 비와 눈이 번갈아 내린 요즘 날씨로 요런 난생처음 얼음꽃을 볼 수 있기에 기뻤다. 겨울왕국의 올라프가 방문한다고 이런 풍경은 영접하지 못할 것이다. 손을 내밀면 뽀송뽀송 따뜻할 거 같지만 만지는 순간 파르르 몸을 떨며 오한이 몸서리쳤다. 겨울로 인해 생명을 다한 구상나무의 어깨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감에 있어 보는 이의 마음에도 따스한 겨울의 감동이 전해졌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단 한마디"와~~" 모든 게 담겨 있다.

1,700m의 윗세오름을 지나 남벽 분기점 가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백록담과 좀 더 가까워서일까. 조금밖에 보이지 않던 하얀 솜뭉치는 한적한 곳 숨어서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영실 입구 아랫동네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까지 선사해주니 목줄 풀린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고 또다시 달궈진 몸 구석구석엔 땀이 차올랐다. 한참을 같은 공간에 멍하니 서 있다 보니 어디선가 밀려오는 희뿌연 안개가 꿀맛 같은 풍경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행복해 보이는 나를 보고 심술을 부리는 것이다. 멍하니 서 있던 난 안개 속 긴박함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 다시 내 마음속 태양의 불꽃을 활활 태웠지만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안개는 그쳤다 끼기를 반복하며 나를 가지고 놀았다. 그 후 안개는 모든 것을 감추고 난 그저 순응한 채 자리를 떠야 함을 깨달았다. 조금 더 머문다고 더 많은 것을 보여줄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가 치닫고 달아오르는 태양에 뚝뚝 흘리는 얼음꽃의 눈물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행히 눈과 카메라의 저장장치에 쏙쏙 집어 놓았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 "별로야 힝~ " 그러나 눈은 그녀에게서 떼어지지 않는다. 정상에서 1시간을 보냈지만 짧다.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녀도, 보고 봐도 질리지 않았다. 하산할 시간 그냥 내 마음을 이곳에 남겨두고 간다. 아쉬움에 손가락은 셔터만 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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