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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아웃>과 「회복하는 인간」
<인사이드아웃>과 「회복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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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1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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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12>

피트 닥터 감독의 <인사이드아웃>(2015)은 열한 살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사는 다섯 가지 감정(기쁨, 슬픔, 두려움, 분노, 메스꺼움)들이 하루하루를 해결해가는 모험 드라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통솔하는 ‘기쁨’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잇는 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이다. 한편 언뜻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배경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 라일리의 감정들이 말 그대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녀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는 것일까.

한강의 단편집 『노랑무늬영원』(문학과 지성사, 2012.)에 수록된 「회복하는 인간」(2011)은 한 여자의 하루하루를 덤덤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 삶을 되짚어간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언니가 있었다. 삶이 순조롭고 윤택하기 그지없었던 언니는 어린 날에 원치 않는 임신을 했고, 소파수술 때 동행해준 동생과 돌연히 연을 끊어버린다. 자신의 오점을 알아버린 동생이 언젠가 그로 인한 편견으로 자신을 상처 입힐 게 두려웠으리라. 그들은 언니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뜰 때까지 화해하지 못한다. 소설은 그녀가 병원에서 발목을 들여다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그녀가 장례식에 다녀오던 길에 삔 발목의 덧나버린 상처가 회복해가는 이야기이다.

감정은 일종의 화학물질 같은 것이다. (실제로 몸속에서 합성되는 화학물질에 의해 유발되기도 하고.) 어떤 조건과 원리에 의해 유발되고 작동하며 효력을 발휘한다. 나트륨 금속이 물을 만나면 이온화와 발열 반응에 의해 수소 폭발이 일어나듯 감정도 그런 식으로 ‘일어난다’. 사람은 눈물을 참을 수는 있겠지만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대신에 사회화된 사람은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 열한 살 라일리에게 일어난 일은 최악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악화되어 낯선 곳으로 떠나오게 되고, 이삿짐은 사라지고 좋아하는 하키도 뜻대로 되지 않는 등 불행한 일만 연달아 일어난다. 라일리의 머릿속 컨트롤 센터에서 ‘기쁨’은 ‘슬픔’이나 ‘분노’가 통제권을 잡으려 할 때마다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려 애쓴다. 라일리를 주어로 놓고 다시 말하면 그녀는 불안하고 실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스스로 ‘밝아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셈이다. 라일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모든 감정들과 라일리의 몸 속 구성원들은 그녀를 행복하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기쁨’은 ‘슬픔’을 따돌리고 밀쳐내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이건 슬픔의 원이야. 모든 슬픔이 이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해(This is the circle of sadness. Your job is to make sure that all the sadness stays inside of it).”

‘슬픔’을 아예 원 속에 가두어버리며 ‘기쁨’이 했던 말은 라일리가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며 다짐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라일리의 머릿속 ‘기쁨’은 자꾸만 통제권을 잡으려는 ‘슬픔’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슬픔’과 함께 컨트롤 센터 바깥의 미로에 굴러 떨어지고 만다.

「회복하는 인간」의 주인공은 자신의 상처를 무덤덤하게 방치한다. 그토록 사랑했던 언니가 자신이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고, 화해하지도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느끼게 하는 감정들을 외면한다. 그녀가 삔 발목의 아픔과 거기에 뜸을 뜬 화상이 악화되는 동안의 고통을 외면하는 장면은 그녀가 자신의 머릿속 감정을 외면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어떤 세포들은 회복 불가능하게 죽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그녀는 더 이상 어떤 통증도 감각하지 못한다.

더 이상 감각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 방법이다. 슬퍼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라일리가 기쁨과 슬픔을 잃어버리고 분노, 두려움, 메스꺼움마저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돌아보자. 사회화된 사람은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통제한다고 했지만 고작 열한 살 아이에게 그 모든 힘든 상황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누구나 괜찮아지고 싶은데 괜찮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침내는 기쁨도 슬픔도 돌아오지 않고 처음부터 자신에게 그런 것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죽은 언니에 대한 기억을 두서없이, 그러나 무감각하게 떠올리던 「회복하는 인간」의 그녀는 ‘흉터’에 기억이 미친다. 어려서부터 무모했던 데다 부모에게서도 방치되었던 그녀는 몸 여기저기 흉이 많지만 아름다운 언니에게 남은 흉터는 단 하나 뿐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과 어릴 때 술래잡기를 하다가 넘어져 다친 흔적이다.

그녀가 그 봉합 수술을 받는 동안 어린 당신은 눈이 빨개지도록 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수술실에 함께 들어갔기 때문에 당신은 복도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고, 그래서 더욱 무서웠던 것이다. 마침내 수술실에서 걸어 나온 그녀는 울먹이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했다. 커다란 멸균 가제와 반창고를 우스꽝스럽게 이마에 붙인 채 머뭇머뭇 반복해 말했다.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한강, 위의 책, p.31.)

어린 시절 언니가 했던 위로는 시간이 지나 그 자신을 떠나보낸 동생에게 뒤늦게 닿는 조언이 된다. 어떤 상처들은 불가해하게 시간을 양분 삼아 회복한다. 그녀가 “먼 화요일 오후의 레이저 치료실에서, 간호사가 습윤 테이프를 뗀 순간 처음으로 선홍색 피가 흘러내리”고, “처음으로 그 자리가 쓰라리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결코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흐느끼게 하는 그 슬픔이 찾아올 것이다.

라일리의 컨트롤 센터로 돌아가려고 애쓰던 ‘기쁨’은 좌충우돌 끝에 ‘슬픔’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슬픔이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능력이며, 보다 다채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한 조건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라일리에게 선득 슬픔이 돌아온다. 부모와 처음 스케이트를 탔던 기억이나 장난치는 그녀를 보며 부모가 웃던 기억 등 그저 행복하기만 했던 기억들이 이제 그녀를 슬프게 한다. 라일리는 가출을 포기하고 부모에게 돌아온다. 라일리는 ‘이런 말하는 거 싫으시겠지만’ 이라고 운을 뗀다. 부모가 자신이 늘 ‘밝게’ 있어주길 원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라일리는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억눌렀는지), 일련의 일들이 얼마나 외롭고 힘겨웠는지 고백하다가 울기 시작하고, 부모는 괜찮다며 그녀를 끌어안는다. 감정을 버릴 수는 없듯 필요 없는 감정이나 있어선 안 될 감정도 없다. (슬픔이나 분노도 물론 그렇다) 다만 그것을 차근차근 드러내고 마주하며 풀어갈 수 있는 관계가 ‘건강한’ 관계일 뿐이다. 라일리는 천천히 회복한다. 슬픔 속에서. 슬픔이 가득한 세계에서. 슬픔이 슬픔을 위로하는 느리고 가만한 체온 속에서.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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