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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 유 씨 미>와 「올빼미의 없음」
<나우 유 씨 미>와 「올빼미의 없음」
  • 미디어제주
  • 승인 2019.11.2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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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10>

루이스 리터리어 감독의 <나우 유 씨 미>(2013)는 번역이 되면서 ‘마술 사기단’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마술사들의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이 액션 영화의 골자를 생각하면 부제가 직관적인 것에 비해 원제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곳에서 모여든 네 명의 거리 마술사들이 ‘디 아이’라는 전설상의 마술 조직으로부터 전언을 받고 모이면서 시작된다. 그들이 도착한 장소에서 첫 번째로 보게 되는 것은 ‘Now you don’t’라는 문구다. 이것은 마술을 주제로 하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관용구인데, 마술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사라짐(속임수)과 다시 나타남(원상복귀)이다. 이를 테면 마술사가 모습을 감추기 직전이 ‘Now you don’t’이고, 그가 짠하고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하는 말이 ‘Now you see me’라고 할 수 있다. 네 명의 마술사가 그들을 불러낸 ‘디 아이’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한 채 그가 짜놓은 무대에 들어서는 것이 도입부이므로, 결말에서 그들이 진실을 마주쳤을 때 그 문구들의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나우 유 씨 미>는 ‘Now you don’t’가 ‘Now you see me’로 이행하는 과정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잃어버린 것이 되돌아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모든 사건이 복선과 진상이 맞물려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위한 이야기이다.

결말의 진상에서 알 수 있듯, <나우 유 씨 미>에서 네 명의 마술사들이 실행했고 연루되었던 모든 사건들은 결국 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상처에서 기인한다.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2010)에 수록된 표제작의 난해하게 얽힌 이야기의 파편들도 마찬가지이다. 소설 속의 ‘나’가 한 친구에게 보낸 다정한 편지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집 주변의 전나무가 베어져 버렸고, 그 때문에 당신이 좋아했었던 그 전나무 위의 올빼미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은 장례식이다. 매장을 끝낸 뒤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면서 ‘나’는 혼란스럽게 뒤엉킨 맥락 없는 추억들에 마구잡이로 빠져드는데, 후반부에 가서야 그 모든 추억 속에서 ‘나’의 시선이 향하는 당신이 바로 처음에 나왔던 편지의 수신자이며, 그 장례식의 망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올빼미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죽은 당신이며, 「올빼미의 없음」이라는 제목은 ‘Now you don’t’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이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장례식에서 ‘나’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모든 사악한 거짓말이, 그의 최악의 농담이자 나를 향한 최대의 독설인 이 헛소동이, 과연 어떻게 된 일이냐고”(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창비, 2010. p.135.) 절규한다. 상실감 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해보려고 애쓴다. 그가 왜 죽었고, 어떻게 죽었으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지금부터 나는 오직 무력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고 말 것이다. 한 사람이 가고, 그런데 그 사람을 하데스로부터 결코 데리고 나오지 못한다면, 한 인간의 모든 정신적 행위는 결국 생을 향한 허망한 교태 이상의 그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배수아, 위의 책, p.148.)

글쓰기, 특히 소설쓰기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태도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언뜻 보기에 그저 무의미하고 우발적인 사건들이 인생의 전부라면, 삶의 고통과 종내 그것이 도달하는 죽음이 아무 의미가 없다면 사람은 그것을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결국 ‘생을 향한 허망한 교태’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닐지라도 결국 사람이 삶을 위로하고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무언가다. 타인들의 무심한 이기심과 속임수들이 불러온 결과로 부당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나우 유 씨 미>의 주인공은 결국 어떤 마술로도 그 사람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복선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단지 무의미한 것이 아닌, 완벽하게 처음과 끝이 맞물리는 이야기로, 박수갈채 속에서 끝나는 마술로 만들어낸 것이다.

두 작품은 우리가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비밀을 간직한 열쇠를 던지는 “마술 같은 순간”으로 끝나는 영화처럼, 소설은 그의 죽음을 그가 언젠가 들려주었던 “독일과 같은 중부유럽의 전래 믿음”과 연관 짓는 메르헨적인 분위기로 마무리된다. 영화에서 ‘믿음’은 마술의 본질로서 언급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네 명의 마술사가 벌인 범죄를 뒤쫓는 FBI 수사관 딜런에게 그의 파트너인 인터폴 요원 알마는 그가 유난히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자 마술사를 싫어하는 이유라도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딜런은 마술은 관심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라도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그런 사기꾼들이 싫다’라고 답한다. 알마는 그 자리에서 딜런에게 간단한 카드 마술을 연습해서 보여주면서 그를 웃게 하고는 “이용당한 기분인가요? 아니면 잠깐이라도 즐거웠나요?” 라고 묻는다. 네 명의 마술사의 마지막 공연에서도 ‘믿음’에 관련한 이야기는 그 골자가 명료하게 반복된다. 마술을 속임수가 아닌 웃음을 주는 멋진 순간으로 만드는 것은 누군가 앞에서 무방비하게 의심과 경계를 내려놓는, 그리고 그러한 신뢰를 배반하지 않는 믿음의 관계이다. 사라졌던 마술사가 돌아오는 순간에 관객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마술이 완성되듯,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믿음이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우리가 삶의 진실을 모두 알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에 의해 애도는 위안을 얻는다.

마지막 순간 빛이 세차게 네 얼굴에 쏟아졌고, 그러자 네 얼굴은 빛 속에서 빛보다 밝은 색채가 되어 그대로 사라졌다. 두 개의 꿈속에서, 한 사람이 가고 있다. 나는 그 안을 응시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볼 수가 없다. 단지 그것이 이곳을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배수아, 위의 책, p.154. 「올빼미의 없음」 마지막 문장.)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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