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1 01:15 (일)
흰머리
흰머리
  • 홍기확
  • 승인 2019.11.20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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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23>

독서와 공부는 철저하게 분리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가장 강조했던 것은 독서는 공부가 아니라, 바로 휴식이라는 점이었다. 휴대폰 게임을 해도 쉬는 시간에 책을 읽게 습관을 들였다.

당연히 공부는 본인이 원하는 경우가 아니면 시켜본 적이 없다.(서울대 수석합격자 부모님의 인터뷰와 비슷하다) 다만 책을 읽지 않으면 혼냈다.

훨씬 어릴 적부터 책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면 부모에게 가르쳐 달라고 작전(?)도 펼쳤다. 밥상머리에서 아이에게 뭐 새롭게 안 것 없냐고 유도질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아이가 먼저 부모에게 퀴즈를 내거나, 새롭게 안 사실을 말해 준다. 어제는 아이에게 겨울에 해가 빨리 지는 과학적인 이유와, 천연색소를 무엇으로 만드는지, 지금 읽는 소설의 줄거리를 배웠다.

순자(荀子)의 수신(修身)편을 읽다가 한 구절을 만났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지만 둔한 말도 열 배의 노력과 시간을 들이면 준마(駿馬)를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한없는 목표를 추구하고 끝없는 길을 달려가려 하는가? 그러면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끊어지도록 애써도 평생토록 미치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목표가 되는 곳이 있다면 천 리가 비록 멀다고는 하더라도, 혹은 늦기도 하고 혹은 빠르기도 하며, 혹은 앞서기도 하고 혹은 뒤지기도 하겠지만, 어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길을 가는 사람이 한없는 목표를 추구하며 끝없는 길을 달려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가려는 곳이 있는가 알지를 못하는가?’

아이가 드디어 공부를 시작했다. 갈 길, 즉 목표를 발견했다.

이유를 물었다. 예쁜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어린나이에 너무 현실적인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아이는 엄마가 아빠를 선택한 것도 아빠가 똑똑해서라고 들었다 했다. 나는 이내 수긍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공부해야 할 이유가 지구온난화를 막거나, 행정고시를 보기 위해서나, 세계의 가난을 해소한다는 등의 이유를 댄다면 그것도 참 어이없는 것일 테니까. 좋다. 열심히 공부해서 예쁘고 게다가 똑똑한 여자를 만나라고 기원해본다.

아이가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질문을 한다.

“그런데 방금 공부한 것들이 왜 생각이 안 날까? 자꾸 까먹게 돼.”

옳구나! 나의 공부방법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드디어 등장했다. 나는 아이의 질문이 반갑다. 그리고 즉시 답변할 수 있는 가치관과 지식이 있어 기쁘다. 가슴이 펄럭이며 속사포처럼 답변을 날린다.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 그 중 99.99%를 까먹는 게 당연하지. 한 권의 책을 읽으면 한 문장이나 한 구절만 건지면 그 뿐이야. 새로운 사실을 지식이라고 하는 데 이런 건 금방 까먹어. 하지만 네가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고민하고, 책이랑 대화를 나누며 머릿속에 정리되면 그걸 가치관이라고 하고 지혜라고 하지. 이것들만 만들면 되는 거야.”

아이는 반신반의 내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이 때가 가장 난감하며, 내 머릿속은 나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다.) 나는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지식이 아닌, 지혜를 얻는 게 바로 공부야. 너도 얼마 전 읽은 무려 10권의 시리즈로 된 소설책에서 얻은 건, 겨우 간략한 줄거리나 주인공의 이름 정도겠지. 하지만 너는 생각하면서 똑똑해 진거야. 생각을 연결하고,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서이지.

게임과 다른 점은 게임은 바로 승패나 아이템 같은 보상이 바로 주어지지만, 책은 지혜라는 열매를 얻기까지 시간이 걸려. 결론적으로 공부를 하면 지식은 잊더라도, 지혜는 쌓이는 거니까 까먹어도 상관없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이미 너는 똑똑해지고 있어!”

아이는 이내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공부를 시작한 지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아이는 습관을 들인다며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공부를 하고는 잠을 잔다. 아빠에게 어른들이 읽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고, 영화도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의 활약상을 다룬 걸 어디서 찾아서는, 함께 영화로 ‘공부하자’고 한다. 나는 책을 빌려 주었고, 영화는 같이 보았다.

순간 고민이 생겨났다. 아이가 너무 앞서나간다는 고민.

왜 초등학교 6학년이 그린피스에 감동하고, 세계의 가난을 걱정하며, 부(富)의 불평등에 고민하고 있는 거지?

어릴 적. 나는 어른들의 책을 자주 읽었다. 삼촌이 남긴 세계철학명저 30권을 초등학교 때 읽고, 헌책방에서 싸게 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한문본을 옥편을 찾으며 공부한 식이다. 수많은 고민이 생기며, 머리가 반백(半白)이 되었다.

덕분에 초등학교 때 별명이 ‘할아버지’였다. 이런 고민들은 대학교 4년 내내 도서관에 파묻혀 책을 읽으며 하나씩 해결해나갔다. 졸업할 때 보니 어느새 새치는 없어지고 흑발이 되어 있었다. 중국영화 ‘백발마녀전’처럼 정말 고민이 많으면 머리가 하얘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며, 이제 어른들이 읽는 책은 그만 읽으라고, 어린 나이에 머리 하얘진다고, 네 나이에 맞는 좋은 책을 읽으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의 답변으로 아이는 자기 스스로와 나에게 혁명(革命)을 선사한다.

“아빠도 그랬으면 나도 그러면 되는 건데? 그리고 난 지금도 흰머리가 엄청 많아서 학교에서 별명이 ‘할아버지’야. 게다가 아빠 유전자 때문에 이런 건데 뭐. 추천하고 싶은 책이나 알려 줘.”

아이의 별명도 나와 같이 ‘할아버지’라니!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아이의 흰머리가 부쩍 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거울을 보았다. 하루에도 새치가 몇 개씩 늘어난다. 작년만 해도 1~2개만 보였는데, 올해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 이제 셀 수 조차 없다. 이제 아이는 아이 나름의 이유로 흰머리가, 나는 내 나이의 이유로 흰머리가 늘어나고 있나 보다.

앞서 순자(荀子)의 수신(修身)편의 일부분이 다시 생각난다.

‘그러나 목표가 되는 곳이 있다면 천 리가 비록 멀다고는 하더라도, 혹은 늦기도 하고 혹은 빠르기도 하며, 혹은 앞서기도 하고 혹은 뒤지기도 하겠지만, 어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아이를 키우며 육아에 대해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부모란 아이를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위한 이정표(里程標)만 세우면 된다고.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결국 나는 은근히 아이의 목표에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근한 개입의 증거는 과거의 어릴 적 나와, 지금의 어린 내 아이와의 공통점.

흰머리다.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 감귤박물관운영담당
현 서귀포시 공무원노동조합 사무국장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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