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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과 「왼손잡이 여인」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과 「왼손잡이 여인」
  • 최다의
  • 승인 2019.09.1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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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8>

프로이트는 어머니가 나간 동안 실패를 가지고 노는 손자를 관찰한다. 실패를 던지면 그것이 가고, 다시 당기면 그것이 온다. 가고, 온다. 가고, 온다. 실패가 사라진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것을 눈치 챈 프로이트는 그것에 빗대어 고통스러운 ‘부재’를 극복하는 심리를 설명했다. 그냥 놀고 있었을 뿐인 아이의 조부가 하필 프로이트라서 생긴 일이지만 그리움이 불안으로 변질되는 긴 기다림 동안은 누구나 프로이트의 손자처럼 철학적인 존재가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온통 지배한다는 사실을 그만큼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겠는가.

라세 할스트롬과 조 존스톤이 감독한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2018)은 고전을 원작으로 차용한 디즈니 영화답게 뻔하지만 따뜻한 메시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자애롭고 영민했던 발명가 어머니가 요절하자 어린 클라라는 상실감으로 마음을 닫고, 대부의 성탄 파티에서도 어머니가 남긴 유품의 열쇠를 찾는 데에만 집착한다. 원작의 환상적인 소재를 차용하되 독특한 캐릭터로 변모시킨 각색은 신선하지만 성탄 가족 영화라는 점을 고려해도 영화의 전개는 클라라가 열쇠를 찾다가 환상세계에 발을 들인 시점부터 눈에 띄게 엉성하고 진부해진다.

클라라의 어머니 마리는 어린 시절에 장난감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환상세계에 네 개의 왕국을 세우고 통치했지만, 그녀가 왜 그 세계를 떠나야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마리가 회수해갔던 그 기계의 열쇠를 클라라를 이용해 되찾고자 하는 악역 슈가플럼이 왜 타락했는지도 영화는 명쾌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소 상징적인 관점으로 작품을 읽고자 한다. 부조리하고 노골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있는 김숨의 단편 「왼손잡이 여인」(『2015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자선대표작)과 영화가 맞닿는 지점은 화면상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말 그대로 ‘부재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부재하는 것이 클라라의 어머니이자 왕국들의 창조주이며 여왕이었던 마리라면 「왼손잡이 여인」에서 부재하는 것은 아내의 왼손이다. 정확히는 아내의 인식 속의 왼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는 ‘왼손이 사라졌다’며 당황한다. ‘나’의 눈에는 그날 찌개를 끓이느라 조기 비늘까지 한 조각 묻힌 그녀의 왼손이 분명히 보인다. 그 인지부조화 때문에 소설의 화자인 ‘나’는 멀쩡한 왼손을 놔두고 왼손을 찾느라 차도에 멈춰서고 의수 상점을 습격하는 아내만큼이나 제정신을 잃어간다.

‘나’는 일련의 상황을 신경 쓰지 않으려야 그럴 수가 없지만 시종일관 아내의 이상행동을 잔인할 정도로 무관심하게 방치한다. 아내가 결국 왼손을 실제로 잃게 되는 것은 ‘나’가 분에 못 이겨 그녀의 손을 골절시켰고 깁스를 푸는 날을 차일피일 손이 썩어갈 때까지 미루었기 때문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남편인 ‘나’의 무심함은 약자⸱소수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사회의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나’와 아내의 병적인 거부감과 집착은 사실상 동일선상에 있으며, 다분히 원초적인 심리 차원의 표상으로도 읽힌다.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그녀의 왼손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김숨, 「왼손잡이 여인」, 『2015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15, p.89.)

후천적인 노력으로 오른손잡이에서 왼손잡이가 된 그녀에게 왼손이란 그녀의 정체성과도 같다. 어릴 때 사고를 당해서 왼손을 절단해야 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던 그녀는 아마도 왼손이 ‘버림받지 않기 위해’ 후천적인 왼손잡이가 된다. 주로 쓰는 손을 인위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무서울 정도의 집념과 행동력이지만 “토끼처럼 순해서” 그나마 그녀를 사랑했다고 고백하는 ‘나’는 아내의 그런 점을 그다지 눈치 챘던 것 같지 않다. 왼손이 사라졌다며 혼란스러워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냥 오른손으로 수저를 들라고 핀잔할 뿐이다. 상식적으로 실제로 왼손이 사라졌다고 해도 유감스럽지만 남아있는 오른손을 쓰는 삶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라진 것이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일 경우이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아이에게 세상에 그런 여자는 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 속 슈가플럼에게 마리 여왕은 대체 불가능한 어머니와도 같다. 그녀는 마리의 딸인 클라라가 환상 세계로 돌아왔다고 해서 클라라를 왕좌로 모시지 않고, 마리의 열쇠에 대한 상속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슈가플럼과 그녀의 적수 마더진저는 의견을 같이한다. 그들에게 클라라는 그녀가 모든 면에서, 심지어 기계를 다루는 천재적인 능력까지 그녀의 어머니를 빼닮았다 해도 마리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열쇠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유품에 집착하던 클라라의 모습은 마리의 딸 즉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유품의 의미가 ‘너는 너 자체로 가치 있으며 너 자신이야말로 너에게 필요한 누군가이다’라는 전언임을 깨달았을 때에야 클라라는 그 강박에서 벗어나고 마더진저는 더 이상 마리의 빈자리를 위협하지 않는 클라라를 받아들이고 돕기 시작한다.

현실 세계에서 마리는 양친을 잃은 충격으로 마음을 닫고 다락방에서 나오지 않던 소녀였다. 그녀를 안쓰럽게 여긴 드로셀마이어(그는 후에 마리의 아이들의 대부가 된다)의 기지 덕분에 그녀는 환상 세계로 발을 들이고 생명을 얻은 장난감들을 돌보는 동안 마음을 치유하고 다락 바깥으로 나온다. 그 세계가 단지 마리의 어린 시절을 치유하기 위한 환상으로 기능했음을 감안하면 왜 환상 세계의 모든 질서가 그토록 순진하고 엉성한지, 왜 마리가 사랑했던 그 장소를 떠나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는지가 분명해진다. 실패를 던졌다 당김으로서 상징적인 어머니의 부재와 귀환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던 프로이트의 손자처럼, 마리는 자신을 떠나버린 양친의 역할을 장난감들에게 대신 수행함으로써 상처를 극복한다.

그러나 이는 남겨진 장난감들, 특히 그녀를 너무도 사랑했던 슈가플럼에게는 또 다른 상실이다. “우릴 버리고도 우리가 계속 착하기를 바랐어? 난 더 이상 착하게 굴지 않을 거야!” 라는 슈가플럼의 절규는 어린 소녀가 만들었던 천진난만한 세계에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는 균열이며, 그 내면 깊은 곳의 상처이다. ‘나’는 기능을 잃은 아내의 왼손이 끝내 썩어서 절단되도록 그것을 방치하고, 슈가플럼은 마리가 만들었지만 더 이상 마리가 돌아올 수 없는 왕국들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하려 든다.

부재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을 지배한다. 부재를 부재로 인정하는 것만이 어머니의 유품 속 거울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어머니의 그림자가 아닌 자신의 삶을 되찾는 클라라처럼 ‘애도’를 온전히 끝낼 수 있는 길이지만 그것은 너무도 동화적으로 행복한 결말이다. 프로이트 자신조차도 딸과 손자를 잃었을 때 가고, 오고, 가고, 오는 그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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