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17:25 (목)
전염병, 두 번째 이야기
전염병, 두 번째 이야기
  • 홍기확
  • 승인 2019.09.11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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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17>

아이는 내게 전염되었다.

논리적인 말투, 물건의 성분을 보고 분석하는 습관.

역사적 사실의 냉철한 판단, 인간의 사회적 행동분석(?)까지….

어느 날 식탁에서 아이가 감자과자를 먹을 때였다.

성분을 살피고 칼로리를 분석한 후, 일일권장량이 표시된 나트륨과 한 끼 식사에 담긴 나트륨 양을 %단위로 분석하며 다양한 제품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계산이 잘 안 되는지 아이는, ‘아빠 때문에 이렇게 말투도 딱딱해지고 뭐든 분석하게 됐잖아!’라며 난리를 피운다.

그러자 다급히 아내가 나선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인격이 있는 거야. 제5인격이라는 휴대폰 게임도 있잖아.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에 처할 때마다 우리는 인격(persona)을 다르게 바꿔. 네가 엄마를 대할 때의 애교, 친구를 대할 때의 쿨함, 아빠와 얘기할 때의 논리. 모두 다 너의 다른 인격들이 발현되는 거지. 결국 아빠랑 있을 때만 논리적이잖아? 인격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바뀌는 거니 신경 쓰지 마.”

아이는 대답한다.

“그렇구나. 알았어.”

나는 놀란다. 초등학교 6학년이 이걸 이해해? 그리고 아내는 왜 초등학교 6학년한테 맞춤형 설명을 안 해주는 거지? 그리고 질풍노도 사춘기 소년은 왜 이렇게 쉽게 저항 한번 없이 수긍하는 거야!

10대, 20대를 거쳐 지금은 나도 이른바 ‘사회화’가 되었고, ‘사회생활’을 할 줄 안다. 사람들과 적당히 섞이고, 적절한 대화를 할 줄도 안다. 책과 사회생활에서 배운 대로 온갖 테크닉을 동원하여 사람의 눈을 보고 말하고, 알맞은 대화법에, 풍성한 주제로 테이블 진도를 주도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만나는 건 여전히 힘들고, 피하고 싶다.

아이가 친구가 몇 없어서 고민이다. 어울리는 친구라고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 출석부를 찍는 2명뿐이다. 하지만 주변에 많은 멤버와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을 보니 부러운 모양이다.

나는 고민에 답변한다.

“지구 인구가 77억 명인데 그 중에 친구가 2명이던 20명이던 큰 차이인 걸까? 아빠도 휴대폰에 저장된 아는 사람은 1,800명이지만 친구는 달랑 2명밖에 없어. 친구를 사귀는 건 쉽지만 친하게 지내고 관리하는 건 어려워. 네가 키우는 화분 2개에 물을 줘본 적도 별로 없잖아? 엄마가 대신 주지. 지금 있는 2명의 친구들만 있어도 충분, 아니 넘치는 거야.”

아이는 내 논리를 공격한다.

“하지만 친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나는 방어한다.

“네가 말하는 친구의 의미는 진짜 친구가 아니라, ‘아는 사람’인 것 같네. 네가 결혼할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네가 죽었을 때 진심으로 울며 슬퍼할 친구가 몇이나 될 것 같아? 이런 친구는 현실적으로 많을 수가 없지.”

아이는 결론 내린다.

“그래? 그럼 2명도 괜찮겠네. 괜히 고민했네.”

아이는 아내에게 온갖 애교를 부린다.

아이는 나에게는 온갖 논리를 펼친다.

아이는 아내와 나에게 전염되었다.

수많은 교육법이 존재한다. 교육학도 시험을 위해 준비했고, 육아 및 아동발달에 관한 책과 다큐멘터리도 섭렵했다. 하지만 결론 내린 것은 바로 대화(對話)다. 특히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상태에서 하는 밥상머리 대화. 그리고 길을 걸으며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하는 서로의 재잘거림. 내 교육법은 이것뿐이다.

아이는 전염병을 통해 여러 인격을 만들어 나가며 인격을 통합하는 중이다. 이것은 사회에 의한 ‘사회화’가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필요한 가정에 의한 ‘가정교육’이다.

아이를 처음 키워봐서 내 교육법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바라는 것은 부모가 전달한 전염병을 건강하게 극복하고 항체를 형성했으면 한다. 그리고 뿌리 깊은 나무처럼 기존의 항체를 바탕으로 어떠한 다른 지구인의 전염병도 물리칠, 단단한 가치관을 만들었으면 한다.

다만 아이가 부모를 점점 닮아간다. 자주 부모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열심히,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야 할 1,200가지 이유 중 첫 번째 이유가 선명해졌다.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 감귤박물관운영담당
현 서귀포시 공무원노동조합 사무국장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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