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7:38 (금)
“제주에 일본군 위안소 존재했을 수 있어” 첫 가능성 제기
“제주에 일본군 위안소 존재했을 수 있어” 첫 가능성 제기
  • 김은애 기자
  • 승인 2019.07.08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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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 조성윤·고성만 교수…’제주 성산에 위안소 운영’ 관련 논문 발표
오시종의 증언 외 사료는 없어…”명확한 증거 위한 추가 조사 필요할 것”
7월 8일 성산리사무소에서 오시종 어르신이 일본군 위안소가 성산에 존재했다는 내용을 증언했다.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4월, 제주도에 위안소가 존재했다는 증언이 공개됐다. 다만, 1인의 증언 외에는 추가 증언이나 명확한 사료가 없어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7월 8일, 제주 서귀포시 성산리사무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제주대 조성윤·고성만 교수의 관련 논문 발표와 오시종 어르신의 증언이 어어졌다.

먼저, 제주대 조성윤·고성만 교수가 6월 30일 발표한 논문 「태평양 전쟁 말기 요카렌(予科練)의 제주도 주군과 위안소-성산 지역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 7만8000여명의 일본군이 제주에 주둔했었다.

*요카렌: 해군비행 해군비행예과연습생(海軍飛行予科練習生)’의 약칭이다. 요카렌은 폭탄을 장착한보트를 조종해 미군 함정에 돌진하는 ‘자살 특공대’였다. 14∼17세의 일본 소년들을 각지에서 시험을 통해 선발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24만명이 입대했다. 약 2만4000명이 요카렌 양성 과정을 거쳐 전장으로 보내졌고, 약 80%에 이르는 1만 9천명이 전사했다.

논문에 따르면, 일본군 해안특공기지가 주둔했던 제주 지역은 성산일출봉, 서귀포 삼매봉, 고산 수월봉 총 세 곳이다.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진지동굴은 함덕 서우봉, 송악산에도 존재하지만, 일본 해군이 주둔하던 요충지는 위 세 곳으로 한정하고 있다.

특히 성산 지역에만 총 19개소의 군 관련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위안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성산일출봉 해안특공기지 인근에 위치한다.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산 지역 2개 장소.

제주 성산 지역 위안소 운영과 관련해 증언자로 나선 오시종 어르신은 당시 위안소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살았단다. 30m도 채 되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살아 삼엄한 일본군의 경비 속에서도 위안소 내 여성과 군인의 움직임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16세였다.

“요카렌들은 인원이 그다지 많질 않고,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은, 결국은 위안소들 차려가지고, 다들 정장들 입고 들어갔나 나왔다 이렇게시리 허는 거 많이 봤지요.” / 「태평양 전쟁 말기 요카렌(予科練)의 제주도 주군과 위안소-성산 지역을 중심으로--」 논문에 실린 오시종 증언

오시종 어르신은 2010년 증언에서 위안소 두 곳에 대한 이야기를 밝힌 바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위안소를 드나들던 이는 요카렌뿐이었다.

“요카렌 외에는 거기 줄 서는 거를 못 봤어요. 오로지 요카렌만. 매일 다녔는지 아니면 가는 날을 정해서 다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쉬는 날 오후 되면은 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게 되거든요. 그 부근에는 동초가 서 있었으니까 우리는 멀리서나 보지 가까이서는 못 보고요. 그 앞에서 정렬을 해가지고 서 있더라고요. 요카렌들이 훈련할 때는 스즈키복을 입거든요. 그런데 거기 올 적에는 ‘나나츠 보탄’을 입고 온단 말이예요. 가끔 마을에서 ‘나나츠 보탄’ 입은 거 봐 지면 ‘아 오늘은 위안소 가는 날이구나’ 생각을 하지요. 거기 말고는 이 동네에서 어디 갈 데가 없어요. 구경할 데도 없었고. 또 주위에는 헌병들이 있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지도 못했을 거거든요.” / 논문에 실린 오시종 증언

그의 증언에서 나온 두 개 위안소. 이들 중 위안소1은 ㄱ자로 된 집이었고, 현재는 I자형 집만 남은 상태다. 게다가 위안소2는 철거되어 공터만 남아있다.

한편, 오시종 어르신은 1970년대 한림 지역에서 위안소에서 목격한 여성과 우연히 조우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이날 회견 자리에서 오시종 어르신은 관련 증언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말기 요카렌(予科練)의 제주도 주군과 위안소-성산 지역을 중심으로--」논문에 제게된 그의 말에는 당시 만남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때 위안소에 있었던 여자 분을 나중에 만난 적이 있어요. 전쟁 끝나 고 군대 다녀와서 내가 버스 운전기사를 했는데, 학생들을 태우고 한림 협 재굴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그 분을 다시 만났지. 맨 처음에는 나를 피 하다가 나중에 차차 얘기를 듣게 됐는데, 참…. 한 사람 한 사람만 상대를 했던 것이 아니고, 하루에 2∼3명 될 때도 있고, 5∼6명 될 때도 있고…, (내가) 들으면서도 뭐하고…, 말투가 제주도 분인데, 어디서 징발을 당했는 지 말하지도 않고…. 소라껍데기로 만든 기념품을 좌판에 널어 팔고 있었는데 용모나 행색이 그런 일을 할 분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 논문에 실린 오시종 증언

그리고 회견 현장에서는 논문에 있는 이 증언을 토대로 “여성이 하루에 2~3명, 5~6명 상대했다는 내용이 사실인지”를 묻는 질의가 있었다. 하지만 제주대 조성윤 교수는 오시종 어르신이 그러한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답했고, 해당 질문을 한 기자는 논문의 해당 부분을 읽으며 사실확인을 요청했다.

논문에 오시종 어르신의 관련 증언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되자 조 교수는 “2010년에 담은 기억을 (논문에) 담은 것인데, 요즘은 잘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시는 경우가 있다”라고 해명했다.

현재 제주도 성산일출봉 인근에 위안소 2개소가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오시종 어르신의 증언 내용을 바탕으로 추정할 뿐이다.

단, 제주대 연구진은 그의 증언 내용이 당시 제주 상황, 요카렌들의 제복 모습 등과 일치하는 점에 무게를 두어 ‘신빙성이 있다’라고 판단했다.

이와 관련, 제주대 고성만 교수는 “(사료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이라며 “일본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던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귓속에 들어가서 ‘이제 이야기해도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증언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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