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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테이션 게임>과 「대니 드비토」
<이미테이션 게임>과 「대니 드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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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6.17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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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5>

“Even a broken clock is right twice a day.”

- <이미테이션 게임>

멈춘 시계와 5분 느린 시계에 대한 오래 된 비유가 있다. 멈춘 시계는 쓸모가 없을지언정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한 시간을 맞추고, 5분 느린 시계는 정확하진 않지만 쓸모가 있다. 하지만 태엽이 고장 난 시계는 결국 멈추기도 한다. 위의 비유는 흔히 시계를 사람(삶의 태도)에 비유한다. 그렇듯 남들의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한발자국씩 어긋나다가 생애 단 한번은 정확한 시간을 맞추는 그런 삶도 있을 것이다.

모튼 틸덤 감독의 <이미테이션 게임>(2014)는 실존했던 수학자 앨런 튜링의 전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2차 대전 당시 비밀리에 활약한 튜링의 생애를 중심으로, 그를 위시한 블레츨리 공장의 지식인들이 독일 암호 ‘에니그마’를 해독하던 과정을 풀어나간다. (물론 영화적 각색으로 역사적 사실과 달라진 부분이 몇몇 존재한다) 실제 앨런 튜링이 아스퍼거 증후군이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영화에서는 그가 타인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을 전개의 주된 장치로 차용한다. 영화 속 앨런은 “점심시간이야” 라는 말이 “같이 점심 먹자”라는 의미라는 것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다. 그는 마치 기계처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틀린 질문이라고 지적한다. 기계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작동 원리를 가질 것이며, 그러므로 기계는 인간과는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계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같은 것일까? 전후, 동성애자라는 죄목으로 검거된 앨런은 자신을 심문하는 형사에게 질문한다. 그것은 영화의 결말부에 반복되는 질문이다. 점차 지능이 발달한 기계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할 정도로 영리해져서 사람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인간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앨런도 “점심시간이야”가 “같이 점심 먹자”로 해독된다는 알고리즘을 습득하거나 이성애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명령’에 따름으로써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은 당신들과 다른 자신이 당신들과 같은 인간일 수 있겠느냐는 외로운 질문에 다름 아니다. 앨런이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13년 뒤인 1967년에 영국에서 동성애 처벌법이 폐지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앨런은 겨우 그 만큼의 시간이 어긋난 시계였다.

황정은의 단편집 『파씨의 입문』(2012)에 실린 「대니 드비토」(2008)은 한 유령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다. ‘유라’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자가 죽는다. 그녀는 다소 황당하게도 펭귄맨이었던 배우의 이름이 뭐였는지 궁금해 하던 순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혼자 남은 남편(혹은 동거인) ‘유도’는 이따금 빈집에서 멍하니 ‘유라’라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만 유령이 된 유라가 아무리 대답해도 그는 알아채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도 아이를 낳는다. 전쟁이나 천부적 재능의 개입 같은 것은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삶의 반복이다. 유라는 끊임없이 나름대로 행동하고 말을 걸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녀는 죽어가는 유도의 곁을 맴돌며 계속해서 그를 부르고 원망하지만 끝내 모든 것이 부질없어지고, 그녀 자신의 존재도 점차 희미해진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원은 동일하지 않다.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산 자에게 닿지 않고, 죽은 자는 산 자들의 삶에 끼어들지 못한다.

소설가 배수아는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2013) 출간 후 인터뷰에서 ‘가장 고독한 상태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이 아닌가’라는 논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일반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이해되지 않고, 낯설고, 소통되지 않는 것은 죽음일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점에서, 그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공유된다는 점에서 더욱 역설적이다. 이 소설은 ‘죽음’을 통해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맞물리지 못하는 대화는 쓸쓸하고, 쓸쓸한 것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만 못하다. 유라는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한다. 그 또한 누구와도 맞물리지 못하는 유령이 되느니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사라지라고, 사라져가는 그녀는 그의 임종에 쓸쓸한 축복을 보낸다.

어긋난 삶은 외롭다. 5분이 느린 시계라도 그것의 시침이 고장 나지 않은 시계의 시침과 겹칠 수 없듯 그것은 당연한 명제임을 두 작품은 보여준다. 공감 능력에 장애가 있는 앨런이라도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검거된 뒤 동성애 치료를 명목으로 호르몬 투여를 받고 부작용으로 고통 받으며 자신의 삶을 회한하는 앨런에게 그의 동료이자 약혼자였던 조안은 ‘당신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되었다’(“The world is an infinitely better place precisely because you are not normal.”)고 단호하게 말한다. 살아오는 내내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던 어긋난 시계는 단 한번 정확한 시간을, 그가 전쟁에서 구해낸 수만 명과 정확히 포개지는 시간을 맞추었던 셈이다.

그의 소멸을 빌어주던 마지막 순간에, 아마도 사라지기 직전에 유라는 펭귄맨이었던 배우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생전에 그녀가 추억했을 영화의 배우의 이름을 죽은 유라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망자의 시간과 생의 시간의 어긋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가 ‘대니 드비토’를 떠올린 순간 소설은 “유라./ 양지바른 곳에서, 유도씨가 말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마치 소멸의 순간 단 한번 그들의 목소리가 맞닿은 것처럼 결말은 여운을 남긴다.

그녀는 오래도록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 머물렀지만 그는 그녀를 눈치 채지 못했고,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고독은 자신이 어긋난 시계처럼, 딱 5분이 느린 시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계란 고장 나면 한 군데만 고장 나지는 않는 법이니, 느려진 시계라도 한 번은 정확한 시간을 맞추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가끔은 아무도 상상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한다.(“Sometimes it is the people who no one imagines anything of who do the things that no one can imagine.”)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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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재 2019-09-30 16:23:56
가장 맘에드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소설만큼이나 칼럼 문체도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