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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왜 죽어야 했을까요”
“내 아버지는 왜 죽어야 했을까요”
  • 김은애 기자
  • 승인 2019.04.03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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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유족에게 묻다, “지금 소원이 뭐우꽈?”

현순자씨 “사상범 누명 쓴 아버지의 명예회복”
정경순씨 “우리 아버지처럼 억울한 사람 없길”
한태성씨 “아버지가 죽은 이유, 꼭 밝혀지기를”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1회 4·3희생자 추념식 모습.

2019년 4월 3일 수요일, 모처럼 봄기운이 만연한 날씨의 제주4·3희생자 추념식 자리.

71년 전 4월 3일은 결코 이날 같지 않았으리라.

춥고 배고픈 것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끌려가 죽임을 당할지 몰라 두려웠을 사람들. 1948년 제주를 살던 세 명의 어르신을 만났다.

우연인지, 기구한 운명인지 이들에겐 슬픈 공통점이 있다. 모두 1948년 4·3으로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1948년 4월 3일, 그로부터 71년 후… 지금 소원이 뭐우꽈?”

 

“돈보다 중요한 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명예회복”
-
현순자씨 사연 (76, 여)

(좌)현순자씨, (우)정경순씨는 모두 제주시4·3유족부녀회 일원이다. 이들은 모두 4·3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우체국에서 일했던 평범한 가장, 현순자씨의 아버지. 그에게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서귀포의 우체국에서 야간 근무 중이던 우리 아버지를 군인들이 갑자기 잡아갔다고 합니다. 저는 당시 5살이었어요. 듣기로는 서귀포시에 있는 한 창고에 아버지를 가뒀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끌려간 현씨의 아버지는 그대로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

“아버지는 그렇게 행방불명이 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대구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고 해요.”

현순자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모른다. 그래서 그의 가족은 매년 4월 2일 제를 지낸다.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위해서다.

“저는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4·3은 무조건 제대로 파헤쳐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유족들이 말하는 4·3에 대한 진상규명. 현씨도 이를 간절히 바란다.

“아버지가 끌려가신 후에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어요. 어머니 밑에서 사남매가 자랐는데, 큰오빠가 아버지 역할을 많이 했죠. 그런데요, 억울한 게 또 있어요. 우리 오빠가 해군에 입대하려고 했는데 못 갔어요. 연좌제 때문에요. 그렇게 평생을 설움에 받치며 살았습니다.”

현씨의 사연을 가만히 듣던 한 유족은 “우리 가족 중 하나는 공무원에 합격했는데, 연좌제 때문에 결국 탈락 통보를 받았다”라며 억울함을 토로한다.

고달팠던 현씨의 삶. 가슴 속 그 많은 한을 어떻게 풀고 있나 걱정이 되어 물었다. 어떻게 견뎠느냐고, 지금은 좀 괜찮느냐고.

“지난 일은 생각 안 하려고 해요. 살다 보니 좋은 날이 오더라고요. 이렇게 4·3 행사도 하고, 행방불명인을 위한 천막도 쳐 주고요. 가끔 너무 힘들 땐, 노래를 합니다. 제가 지금 가수로 활동 중인데, 곧 앨범도 발매할 예정이에요”

슬픔을 노래로 승화시키며, 작사를 한다는 현씨는 소망 하나를 고백한다.

“내 소원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입니다. 사상범으로 몰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우리 아버지. 내 나이 이제 76인데, 아버지의 명예회복은 꼭 보고 싶습니다. 돈보다 우리 아버지 명예회복이 더 소중해요”

 

“억울한 사람 없어지는 거, 그게 내 소원입니다”
정경순씨 사연 (79세, 여)

정경순씨의 아버지가 제주에 입도한 때는 1948년. 제주4·3이 일어난 해다.

일본에 살던 그의 가족은 제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다.

“일본에 살던 아버지가 배를 샀어요. 친척, 지인들 다 데리고 제주로 왔죠. 일본에서 유도도 하고, 체격이 좋던 아버지인데 ‘산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임에 가입하라고 했대요.”

정씨네 가족이 터를 잡은 것은 ‘산 사람’이 많았던 마을이다. 여기서 ‘산 사람’이란 무장대 사람을 뜻한다.

“하루는 누군가 우리 집에 불을 붙였어요. 집이 불에 타는데, 마을 사람 아무도 안 도와주는거예요. 알고 보니 대부분이 무장대였던 거죠. 아버지가 무장대 가입을 거부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수차례 무장대 가입을 거부한 현씨의 아버지는 무장대에 끌려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다.

“14명의 사람이 아버지를 가운데 놓고 창으로 찔렀다고 해요.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정씨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한 건 경찰이었다. 정씨의 나이 8세 때다.

“경찰이 아버지를 죽인 공비(무장대) 한 명을 데리고 가서 시체를 찾았대요. 그리고 장례를 치르려고 우리 아버지 사진을 수건으로 닦았는데요, 사진이 죽 찢어지더군요. 아버지 얼굴 쪽이요. 우리 어머니가 그걸 보고 기절했어요.”

무장대의 창에 찔려 죽은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을 본 어머니는 그렇게 까무라치듯 쓰러졌단다.

이후 정씨네 가족은 그야말로 비참하게 살았다. 세간살이를 무장대가 다 가져가는 바람에 배를 곯아야 했다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막 와서 우리 집 살림을 다 가져갔습니다. 거문오름에서 신엄 가는 길에 굴이 있는데, 거기에 물건을 가져다 놓고 생활했다고 해요.”

살림을 빼앗겨도, 아버지가 죽임을 당해도 꾹 참고 살아야 했던 정씨.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내가 우리 집 20년 넘은 동백나무를 제주4·3평화재단에 기증했는데요, 나 혼자 보느니 같이 느끼고 싶어서예요. 이제 억울한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내 소원은 그거예요.”

 

“우리 아버지, 왜 죽어야 했는지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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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성씨 사연 (81, 남)

한태성(81)씨는 4·3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곧 돌아가셨다.

“군인들 피해 오름을 올라가는데 아버지가 없어졌어요. ‘아버지 어디갔누’ 울면서 찾으니 어머니가 나보고 ‘너 죽을래, 죽을래’하면서 나를 막 데리고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뒤에서 총소리가 빡빡 났어요. 아버지가 죽은 거죠.”

한태성씨는 당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48년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군인에게 쫓겨 모든 식구가 도망가던 날이다.

“군인이 도망가는 어머니 엉덩이를 차서, 어머니가 쓰러졌어요. 난 막 울었죠. 결국 도망은 갔는데, 아버지 그렇게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어 어머니도 하늘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뒤, 한씨는 어머니는 마음의 병을 얻어 곧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내 동생이 나랑 같이 왔는데, 오늘 우리 아버지 소주 한 잔 따라드리려고 왔어요. 우리 아버지 불쌍하고, 미안해서.”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한씨는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야 했다. 여느 4·3 당시 제주 사람들이 그렇듯, 그도 배고픈 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조부모까지 돌아가신 후로는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힘들어도 할 수 없지, 그땐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덤덤하게 말하지만, 그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긴 세월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세상에 대한 야속함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한씨.

그에게도 소원이 있을까?

“4·3이 제대로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어야 했는지, 우리 형제들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했는지. 누가 좀 알려주세요.”

4월 3일,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서 4·3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기구한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아픔은 다 같다.

71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픈 이들을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정씨의 소원대로 ‘억울한 사람이 없어지게 만드는 것’, 4·3의 진상규명이 아닐까.

그리고 이를 위한 과정에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아픔을 나누려는 자세. ‘공감’의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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