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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 아버지를 둔 김씨의 소박한 소원…“4·3의 진상규명”
행방불명 아버지를 둔 김씨의 소박한 소원…“4·3의 진상규명”
  • 김은애 기자
  • 승인 2019.04.01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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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중앙고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 강연, 김필문씨
“내가 바라는 건 4·3의 진상규명, 바른 역사를 알아주길”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4월 1일, 제주중앙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 초청강연에서 김필문씨가 일일교사로 나섰다.

“그땐 동네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잡아갔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무조건 ‘빨갱이다’라고,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못 올라가게 했고요.

무려 7년 7개월 동안 4·3이라는, 서로 죽이고 살리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4·3행불인유족협의회장이자 4·3합창단 단장으로 활동 중인 김필문씨의 증언이다.

4월 1일, 제주중앙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 초청강연에서 김필문씨가 일일교사로 나섰다. 이날 자리에는 제주중앙고 1학년 학생들이 함께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람이 유죄가 되는 ‘손가락 재판’.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사상범’이 되어 15년 형을 받았습니다.” /김필문 4·3행불인유족협의회장

김씨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아버지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제주 영평마을에서 농사 지으며 살던 순박했던 아버지. 그는 어느 날 토벌대에 의해 끌려가게 된다.

“갑자기 농림학교로 끌려간 아버지는 ‘굶어 죽겠다’며 식사를 거부했다고 해요. ‘늙으신 부모와 처자식이 사는 집이 모두 불타고, 굶어 죽게 되었다. 혼자 살아 무얼 하겠냐’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러자 간수가 아버지를 풀어주었는데, 며칠 후에 다시 순경들에 의해 대구형무소로 끌려갑니다.” /김필문 4·3행불인유족협의회장

대구형무소로 끌려간 아버지는 그렇게 행방불명이 됐다. 김씨는 아직도 아버지가 끌려간 이유를 모른다.

“형무소 기록을 보니 ‘반공법에 의한 15년형’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나는 이 기록을 보는 순간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김필문 4·3행불인유족협의회장

그는 아버지의 사망 일자도, 사망 이유도 모른다. 아무 이유 없이 끌려간 아버지의 억울함을 토해내고 싶어도, ‘빨갱이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을까 두려워 꼭꼭 숨기고 살았단다.

제주4·3을 상징하는 동백꽃.
동백꽃이 질 때는 꽃잎이 아닌, 온전한 꽃송이 하나가 '툭'하고 떨어진다.

아버지가 죄 없이 죽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현실. 김씨는 당시 일을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슴에서 터져 나와 앞이 캄캄하여 안 보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결코 대단하지 않다. 4·3에 대한 진상규명. 이것이 전부다.

“4·3이라는 과거 역사의 잘못을 바로 세우는 것이 오늘날의 숙제입니다. 4·3에 대한 진상규명을 분명히 해서, 자라나는 학생에게 알리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김필문 4·3행불인유족협의회장

그가 여기까지 말하자 숨 죽이며 듣던 학생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학생의 핵심을 꿰뚫는 질문이 있었다.

“4·3은 아픈 역사인데, 왜 4·3이 평화로 연결되는 지 궁금해요.”

제주중앙고 1학년 9반 문예지 학생의 말이다.

정부에서, 언론에서, 각 단체에서 4·3을 이야기할 때, ‘평화’와 ‘인권’, ‘상생’등을 함께 논하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4·3으로 인한 비극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아픔을 말하기도 한다.

아픔을 말하며, 평화를 외치는 제주4·3의 오늘이 학생들에게는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나 보다.

학생의 질문에 잠시 말을 고르던 김씨는 이렇게 답했다.

“아주 억울하게, 못 견디게 슬픈 사람이 그 원한만 가지고 계속 산다면 안 되겠죠. 과거 때문에 아주 슬프더라도, 그때 시대를 잘못 만나서 생각없이 행동한 개인들, 혹은 정부가 사과를 해 주면… (나는) 화해와 상생으로 나갈 수 있도록 용서를 할 것입니다. 영원히 용서하지 않고 분노한다면 발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실을 규명해준다면, 화해와 상생으로 나가자’라는 생각입니다.” /김필문 4·3행불인유족협의회장

죄 없는 내 아비를, 어미를 죽인 자를 용서한다는 것. ‘분노’의 감정이 ‘용서’가 되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가슴 속 한을 토해내려 눈물을 흘렸을까.

김씨는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로지 ‘4·3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했다.

그의 소박한 소원이 부디 이뤄지기를 바라본다.

김필문 4·3행불인유족협의회장이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줘서 고맙다며 학생들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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