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내 얘기를 일대기로 써준다고 했는데…” 끝내 울음 터뜨려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올해가 4.3 71주년인데 지금까지 아이들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서만 삭였어요”
지난 26일 4.3중앙위원회에서 생존 희생자로 최종 결정된 박순석 할머니(92)가 뒤늦게 추가 희생자 신고를 하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박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해방 직후 제주로 돌아와 국제교환원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의 오빠 친구의 아버지가 우체국에 있었는데 마침 일본어를 할 수 있는 국제교환원이 필요해서 교환원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중 재일본 거류민단의 교신 내용을 번역하면서 일본에서 보내 온 ‘조선’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번역했다가 간첩으로 몰리게 돼 끝내 입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교환원 일을 시작한지 3개월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입산 후에도 박 할머니는 무장대에 부식이 몇 개 들어왔는지, 쌀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장부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후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는 토벌대의 얘기를 듣고 산에서 내려와 제주농업학교에 수용된 후에는 무장대와 교전 등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결국 박 할머니는 함께 있던 일행과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트럭에 오르기 직전 당시 2연대장이 수양딸로 삼겠다면서 남기고 간 쪽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49년 7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3년이 선고돼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출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려 살아왔다.
인터뷰 말미에 박 할머니는 그동안 자식들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사연을 남편이 일대기로 남겨놓겠다며 틈틈이 적어놓은 게 있다고 소개한 뒤 건강이 악화된 남편이 8년째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면서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스스로 자신이 4.3 당시 희생자라고 자식들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하고 지내던 그는 3년 전 수형인명부에 ‘박순○’이라고 적힌 이름의 주소와 본적지를 찾아 4.3도민연대로부터 연락을 받고 나서야 자식들이 알게 돼 지난해 추가 희생자 신고를 하게 됐다고 한다.
“법원에서 무죄 판결도 받았고 희생자로 인정을 받게 돼 이제는 더 바라는 것도 없다. 이제는 ‘그 때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구나’ 하고 자식들 앞에 떳떳이 얘기할 수 있게 됐다”는 박 할머니의 얘기는 70년 동안 가슴 속에 꼭꼭 묻어둔 한을 토해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