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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금처럼”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금처럼”
  • 이겸
  • 승인 2018.11.06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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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의 기록자들]<6> 양정심①​​​​​​​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이겸(사진심리상담사, 피해상담사 1급, 여행과치유 대표)

양정심_1편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발표 2주전에 양정심 씨와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우린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 다음날 양정심씨는 조사연구실장으로 임명이 되었다. 우린 곤을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곤을동은 바다로 이어지는 내를 건너야 들어 갈 수 있다. 내를 건너 마을에 있을 때, 양 실장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내를 건너온 양 실장을 만났다. 우리는 무엇인가 건너야 들어 올 수 있는 곳에서 만났다. 나는 어떤 시간을 건너온 양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고립된 마을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섬 속에 있는 강 건너의 아름다운 마을처럼 느껴졌다.

물러날 수 없는 절벽이 가로 막고 있었다. 곤을 동 끝, 검은 벽 앞에선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물러날 수 없는 절벽이 가로 막고 있었다. 곤을 동 끝, 검은 벽 앞에선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곤을동에 다시 찾은 소감은?

“2001년에 곤을동을 처음 찾았다. 그리고 오늘 다시 왔다. 그땐 적막했다. 고즈넉했지만 평온하지 않았고 아픔이 느껴졌다. 오늘 와보니 고립된 사람들의 심경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냥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그런 처참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참 가슴 아프다.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었던 사람들인데……. 주민들을 학살하고 스물여덟가구의 모든 집을 불태웠다고 한다. 바닷가에서도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답다는 곳에서 그런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1949년 1월 4일과 5일에 벌어진 일이다. 양 실장은 나와 마을을 함께 걷고 있으면서도 마치 혼자 걷고 있는 듯 이따금씩 멍한 표정을 짓곤 했다. 마을에 들어서면 ‘4.3 해원상생거욱대’와 ‘곤을동 4.3유적지 조감도’가 있다. 조감도속의 마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바다와 내를 끼고 있는 마을엔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식적인 마을의 조감도가 아니라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렸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을의 가장 안쪽, 제일 먼 곳, 여기에 샘물이 있다. 절벽아래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주님들의 식수였던 ‘안드렁물’
마을의 가장 안쪽, 제일 먼 곳, 여기에 샘물이 있다. 절벽아래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주님들의 식수였던 ‘안드렁물’

그동안 어떤 활동을 했나?

“濟州4.3抗爭 硏究. A study on the Jeju 4.3 resistance”를 썼다. 이 논문으로 제주 4·3논문 1호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중석 교수님의 지도를 받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한국현대사를 전공했다. 제주4·3과 한국전쟁을 연구하며 최근에는 관련 영상기록에 주목하여 연구를 하고 있다. 제주 4·3 50주년 범국민위원회에서 활동했고, 특별법 제정 이후에는 제주 4·3진상조사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미국 자료조사에 참여했다. 현재 제주4·3연구소 이사,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을 맡고 있다. 전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제주4·3항쟁-저항과 아픔의 역사》(선인, 2008)가 있다. “

양실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면 되도록 감정이 들어가지 않는 화법을 구사했다. 나는 대답을 들으며 신중함과 신뢰감을 느꼈다.

양실장은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55세였다. 형제 중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귀한 딸이었다. 낙천리의 조수국민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 제주서국민학교로 전학을 했다. 1987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고 한국현대사를 전공했다. 양정심 실장을 지도한 서중석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한국현대사로 처음 박사를 받은 사람이다.

이쪽에서 보면 저기도 섬이다. 곤을동에서 보면 이곳은 육지다. 바다로 흐르는 내를 건너야 곤을동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이쪽에서 보면 저기도 섬이다. 곤을동에서 보면 이곳은 육지다. 바다로 흐르는 내를 건너야 곤을동으로 들어 갈 수 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금처럼”

“1990년, 대학교 4학년 겨울방학 이었다. 제주4.3연구소 (당시 내 주변 사람들은 서문통 쌀집 근처라고 기억한다.)를 찾아 갔다. 90년에 대학에서 4.3추모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했고 규모가 괘 컸다.

이 일 때문에 제주 4.3연구소를 찾아갔다. 연구소의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손잡이를 잡는 순간의 감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무어라 말로 할 수 없다. 떨리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군부독재 시절, 대학생의 순수함과 정의감, 그리고 현실 참여에 대한 고민이 묻어난다. 양실장과 제주 4.3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학교 때는 고향에 대한 애잔함을 느끼곤 했다. 성대 제주향우회 활동도 했다. 1987년쯤에 코오롱의 중문 관광단지를 조성이 있었다. 지역주민들의 토지를 소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개발로 인한 지역주민들의 억울함을 보며 가슴 아팠다. 1988년에는 탑동매립반대운동이 있었다. 해녀 분들이 투쟁에 앞장섰다. 그 이후에도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나를 슬프게 했다. 물론 제주 4.3은 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이 가장 큰 아픔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87년 서울 생활을 시작했고, 2018년 다시 제주도로 돌아왔다. 31년만의 귀향이다. 31년 만에 다시 새로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동안 제주4.3만 연구했다. 짧지 않은 세월이다.

이야기가 가볍지 않다보니 웃는 얼굴을 만나기가 어렵다.
이야기가 가볍지 않다보니 웃는 얼굴을 만나기가 어렵다.

조사연구실장에 지원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제주도 4.3연구로 처음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제주 4.3을 연구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한 발 더 깊게, 조금 더 깊게 4.3에 집중하고 싶다. 나이가 50이 되었다. 나는 일을 할 때 10년은 보고 한다. 더구나 이 일은 5,6년 정도를 보고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주 4.3에 전념하고 싶다. 제주 4.3 연구를 하며 생업을 이어가고 싶다. 나는 직업 자체가 제주 4.3이라고 생각한다. 사무처와 동등한 위치의 조직이 신설되는 것이다. 사무처 직원으로 연구원을 뽑는 게 아니다. 그동안 비상임 조직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대답에서 결기가 전해졌다.

 

양정심 2편. 다음 인터뷰 예고

남아 있는 질문

1.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의 역할과 업무는 무엇인가?

2.제주4.3으로 처음 박사논문을 썼는데 당시의 심정은 어땠나?

3.조사연구실장 지원 후, 고민은 무엇인가?

4.제주 4.3을 연구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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