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00:04 (금)
익숙함과 결별하고 새로운 길에 나선다는 것은?
익숙함과 결별하고 새로운 길에 나선다는 것은?
  • 김명숙
  • 승인 2018.10.31 2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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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처방전] <15> 10월

성미산 마을극장 극단 ‘무말랭이’를 아시는지? 무말랭이는 지역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하는 극단으로 마을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매년 연극 공연을 올린다. 올해 10회째를 맞는데 지역민이 단원으로 활동하는 극단이 10년을 맞이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무말랭이 극단이 내세우는 이번 공연의 특색은 단원이 직접 쓴 극본으로 무대화 했다는 것. 

입체 낭독극 <말초>. ‘말초’는 다중의 의미를 품은 제목이다. 우선 말초신경할 때 말초다. 또 하나는 나이의 끝트머리 또는 초입을 가리키는 말, 30대 말 40대 초 할 때의 말초. 남자다움을 지나치게 과시하거나 우월하게 여기는 남자를 뜻하는 ‘마초’의 느낌도 담겨 있다. 전문적인 배우들이 아니다 보니 작가는 초본을 완성한 후 운전 중간중간에도 떠오르는 대사를 받아적었고, 단원들과 합평을 통해 완성한 극본이라 그런지 대사 하나하나가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연극은 53살, 우리 시대 평범한 가장의 소소한 일상을 좇는다. 주인공 김상수는 386세대로 80년대 대학을 나와 현재는 작은 광고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집, 회사, 노래방, 회식자리, 대학 선후배들의 모임 자리에서 오간 대화들을 교차하며 김상수가 처한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집에서는 능력있는 가장, 회사에서는 직원을 가족처럼 살뜰이 챙기는 CEO, 친구들에게도 늘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와 관계한 사람들과 오고간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 양상은 위기의 중년 자체다. 집도 회사도, 우정도 자잘한 균열을 맞이하고 있지만, 좋은게 좋은 거다, 둥글게 둥글게, 본인이 보고 싶어 하는 쪽으로 현실을 왜곡하려고 한다.

김상수가 현실을 왜곡하는 가장 큰 수단은 ‘돈’이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부인의 ‘외롭다’는 호소에 ‘내가 학원 빚을 갚아 주겠다’고 대응하고 13년 동안 함께한 후배이자 사원이 회사 운영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하자, ‘연봉이 얼마인데’ 회사를 그만 두겠냐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술집에서 만나는 아르바이트생에게는 기성세대가 죄가 많다고 스테레오 타입처럼 뇌까리면서 본인은 뒷돈, 학연, 인맥, 접대로 회사를 운영한다.  

잠꼬대 조차 ‘둥글게, 둥글게’인 김상수는 과연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외롭다는 부인에게는 ‘이혼 해 줄게’라고 선언하고 ‘대표님 변하셨어요’라고 말하는 사원에게는 ‘퇴직금 두둑히 챙겨줄게’라며 호기를 부린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고 싶었지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중년의 가장 김상수, 내밀한 사실은 그가 공감 능력 제로인 상태로 자기를 방치해 두고 있다는 데에 있다. 미약하나마 변화의 단서는 남아 있다. 딸이 아르바이트 가게에서 중년의 아지씨에게 당한 수난이 그 계기가 된다. 

이 연극을 보면서 떠올렸던 문장은 김수영의 시 <거미>다.

내가 으스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가을 바람이 늙어가는 거미같은 나는 좋아 보이는 곳에 자기 영역표시하듯 독을 뿌리고 발자욱을 남겼다는 때늦은 후회, 그래도 끝까지 새롭지 않을 것 같은 몸에 배인 관성, 또 거미는 거미라서 곤충처럼 탈피나 우화는 안 된다는 생물학적 자각이다. (그래 거미 주제 탈피라니 안 되지, 어림없지!) 그렇더라도 말이다 이제는 자기답지 않는 곳에 거미줄을 걷을 줄 아는 ‘눈치’ 정도는 갖춰야하지 않겠나 하는 자기 반성에 시선이 머문다. 

그 정도의 눈치를 갖고 실행하는 데도 얼마나 많은 ‘용기’를 가져야 하는지,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나선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아는 중년이라면 이 연극의 메시지에 충분히 공감할 것 같다. 11월 10일 토요일 4시에 성미산 마을극장 향에서 연극 <말초>가  앵콜 공연된다고 하니 가까이 계신 ‘거미(?)’분들은 꼭 봐주었으면 좋겠다. (재미 보장^^)

 

김명숙 칼럼

김명숙 칼럼니스트

충북 단양 출신
한양대 국문과 졸업
성미산공동체 '저해모(저녁해먹는모임)' 회원
성미산공동체 성미산택껸도장 이사
나무발전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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