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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학의 집, ‘나의 삶 나의 문학’ 강중훈 시인 초청 특강
제주문학의 집, ‘나의 삶 나의 문학’ 강중훈 시인 초청 특강
  • 유태복 시민기자
  • 승인 2018.10.22 11: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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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마려워 떠나지 못하는 고향’

제주문학의 집(운영위원장 김가영)은 20일 오후 7시 ‘2018 도민문학학교’를 열어  ‘나의 삶 나의 문학’, ‘시(詩)가 마려워 떠나지 못하는 고향’이란 주제로 강중훈 시인을 초청한 특강을 홍경희 문학의 집 사무국장의 진행으로 개최 됐다.

김가영 문학의 집 운영위원장은 강중훈 시인을 소개하는 인사말을 했다.
김가영 문학의 집 운영위원장은 강중훈 시인을 소개하는 인사말을 했다.

김가영 문학의 집 운영위원장은 “강중훈 시인님은 여러분 다 아시다 시피 공직생활을 마치고 제주문인협회 회장직을 역임하시면서 제주문협 발전에도 공헌하신 분을 모시고 특강을 듣게 되어 기쁘다.”면 인사말을 했다.

강중훈 시인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태어나서 통통배 타고 귀국 했던 어린소년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시인이 되기까지 생과 사를 몇 번이나 넘나드는 질곡의 삶 속에 있었던 일들을 흑백 인생드라마로 펼쳐 놓았다.

❏소년과 시
“중학교 1학년 가을 어느 일요일이다. 그 무렵의 여느 아이들처럼 나는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를 캐는 어머니의 일손을 돕고 있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낫으로 고구마 껍질을 벗기다가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다친 손가락에선 흥건히 피가 흐르고 그 피는 고구마 속살로 벌겋게 번졌다.”며 시 한편을 읽어 내려갔다.

“아! 고구마가 다쳤네. / 피가 흐르네. / 얼마나 아플까. / 얼른 닦아줘야겠다.”

“「칼」이라는 제목의 이 짧은 시 한 편을 이튿날 학교에서 국어작문 숙제로 제출했다. 선생님께서는 그 작품을 보고 매우 칭찬해 주셨던 기억이 내 낡은 일기장에 남아있다. 이 작품을 쓸 때 시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시라는 것을 알 리도 없을뿐더러, 시를 써본 경험도 전혀 없었다."

"어머니의 밭일을 거드느라 숙제할 틈도 없었던 까닭에 야단을 면하기 위해 그날 있었던 일을 짧게 적었던 것에 불과했다.”며 소년시절에 쓴 시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어 갔다.

“67년 전 가을, ‘앞바르터진목’ 모래밭에는 떼 절은 홑바지 차림의 어느 여덟 살 소년이 어미 등에 업힌 젖먹이 누이동생과 열 살 된 누이와 함께 어미 손을 잡고 파들파들 떨며 서 있었다."

"소년의 눈앞에는 들것에 거죽 씌운 채 죽어있는 소년의 애비가 있었다. 소년의 애비뿐만이 아니다. 소년의 할애비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형제들과 그 형제 이웃들이 멸치 떼가 밀려와 널부러져 죽어가듯 그렇게 뒤엉켜 죽어있었다.”

“그보다 앞서 그들은 몇 대의 낡은 트럭에 실려와 두 손이 묶인 채 꼬꾸라지듯 이 모래밭으로 끌려 내려왔다. 그들 무리 속에는 절름발이 노인도, 팔순의 노파도, 엄마 등에 업힌 젖먹이도, 바릇잡이 어부도, 등 굽은 해녀도, 건너편 참외밭에서 밭갈이 하던 농부도, 소년의 학교 친구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일출봉을 마주하여 서 있었고 군인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잠시, 수십 발의 총성이 울리고 그것으로 모든 건 끝났다. 이러한 행위는 이듬해도 또 이듬해까지도 이어졌다. 그 수는 4백여 명에 이른다. 이른바 ‘앞바르터진목’의 대 학살은 이렇게 시작되고 이렇게 끝이 났다. 이름하여 1948년도에 있었던 제주4 3사건에서 비롯된 양민학살의 현장이다.“

“실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바다갈매기처럼 그들은 그렇게 소년의 눈앞에서 가볍게 사라졌다. 그 일 이후 소년은 ‘죽음은 가볍다’라는 걸 느꼈다. 또한 그 끔직한 이별의 아픔 뒤에는 소년의 가슴도 까맣게 타버렸다."

"‘덜 서러워사 눈물도 나주!(덜 서러워야 눈물도 난다)’ 이건 소년의 어미가 그들 삼남매 앞에서 혼잣말처럼 내뱉던 말이다. 남들 앞에서 함부로 값싸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어미 말처럼 소년의 가족에겐 눈물이란 없었다. 오로지 혀 깨물며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 겁 없는 아이
“중학교를 마쳤다.(졸업이라는 말은 그나마 격식을 차려 제대로 학업을 마쳤다는 말이지만, 그보다는 간신히 학교 과정을 끝냈다는 의미의 ‘마쳤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친구들은 모두가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니었다."

"형편이 어려워 진학할만한 여유도 없었지만, 가족들이 눈앞에서 죽임을 당한 이 땅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노역도 노역이지만 내 가슴속 깊이 새겨진 4 3사건이라는 트라우마가 그곳에서 아주 멀리 떠나도록 내 등을 떠밀고 있었다.”

“당시 제주시에는 ‘우생당’이라는 도내에서 제일 큰 책방이 있었다. 고등학교는 못 갈지라도 읽고 싶은 책이라도 실컷 읽겠다는 욕심에 생면부지의 주인을 찾았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의 당찬 모습에 주인은 쾌히 점원으로 받아줬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책방 점원은 감옥살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외출 불가’라는 뜻이다. 이 뜻은 야간학교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의미였다.”

“지긋지긋한 고향, 그 고통의 소굴(?)에서 탈출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감사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1년간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죄와 벌, 장발장, 폭풍이 언덕, 로미오와 줄리엣,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세계명작이란 명작은 거의 다 훑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세계에 눈이 트인 것도 이 무렵의 독서 때문인가 싶다. 그렇지만 한갓 책방의 점원으로 내 꿈을 키우기엔 너무나 목마름이 심했다.”


“열일곱 살의 소년은 기어이 탈(脫) 제주를 결심하고 맨 몸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1958년, 한국전쟁이 남긴 서울의 상처는 폐허 그 자체였다. 저마다 먹고 살기에 혈안이었던 때다. 신문팔이, 극장 암표상, 사무실 급사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때로는 먹고 살기 위해 패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학봉 꼭대기엔 나와 같이 전국에서 몰려든 근로학생들을 위해 정부가 마련해준 삶의 거처가 있었다.”  - 중략 -


“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이던 1960년은 4 19가 있던 해이기도 하다. 세상은 모든 게 그 자리에 멈춰서 버린 듯 했다. 학교도 문을 닫았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내 몸에도 이상이 생겼다. 굶주리고 지친 내 삶은 건강마저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결핵과 함께 신경쇠약증이 겹쳤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막히고 저리는 병이었다. 돈이 없으니 병원 입원은 꿈도 못 꿨다. 죽음의 고비가 온 것이었다. 낙향했다. 어머니는 목숨만 붙이고 온 것만도 다행한 일이라고 안도하셨다.”

 ❏ 불귀(不歸), 불귀, 불귀, 귀(歸).
“낙향 후 1년여, 어느 정도의 건강이 회복되고 마음도 안정을 되찾았다. 더불어 어머니의 간곡한 충고는 나의 상경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불귀(不歸), 불귀(不歸), 불귀(不歸)는 곧 귀(歸)로 귀착됐다. 고향 제주의 삶은 다시 시작됐다. 고달픈 농촌의 생활이지만 달리 선택할 직업이 없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익힌 농사일과 어부가 되는 일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내가 현곡 양중해 선생을 만난 건 운명이었다.”


“서울에서 못다 한 고등학교 졸업을 이곳 제주에서 마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전도학생 백일장 대회에서 대상을 받는 영광도 얻었다. 이때 심사위원장으로 만난 분이 양중해 선생이시다. 그분은 나를 눈여겨 주셨다. 당시 선생님은 제주대학교 국문과 교수이셨다."

“시골 사는 나에게 선생님은 <제주신문> 지상을 통해서 1년여 동안 문학도로서 나의 길을 인도해주셨다. ‘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편지 「강군에게」’라는 제목을 달고 나의 작품을 평하시고, 시문학 이론까지 지도해 주심으로 해서 그나마 암담한 내 시골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셨다. 다음은 당시 선생님이 신문지상에 게재한 내 작품과 작품평의 일부다.”

문고리마다 녹슬고 얼어붙은 / 추억의 아픈 뼈마디에 / 눈 비비며 기대어 앉은 / 손잡이 없는 재봉틀.

아직은 꺼지지 않고 / 숨결 따라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 / 누더기 진 호ㅅ적삼 / 다정스레 때가 묻어 있구나.

立春大吉 / 기다리는 눈동자에 무엇이 오려는가. / 바람결 속에 싸늘한 소리 /대문을 흔드는 소리.

오늘도 이토록 가난히 날은 저물어 / 서럽도록 조용한 저녁 / 먼데서 개가 짓는구나. / 돌아오는 나그네는 누구인고-

보채던 어린 것들도 / 이 夜半의 깊이 속에 / 내일을 아롱진 꿈에 기대어  뭍고 / 편안히 잠들어 있다.
- 「한야(寒夜)」 전문

 
(전략)…강군이 <寒夜>에 있어서 <立春大吉>과 같은 언어는 시어로서는 쓰기 어려운 한문구절인지도 모르나 이 시에 있어서의 이 한 구절에서 암시되는 다종다양한 ‘이메이지’ 같은 것은 어떤 한 구의 언어가 적절한 때와 장소, 배열되는  위치에 따라 훌륭한 시어가 될 수 있는 보기가 될 줄 아네. … (후략)
 

강 시인은 "4.3은 미국의 잘못도 아니고 우리가 우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다 잘못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책임 질 사람이 많다. 따지면 한 없이 따지는 것이고 수수의 법칙처럼 감사함을 주면 한없이 감사 함에 도달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가 서는 것이다. 그 바탕위에 글도 사랑으로 엮어 져야 한다."고 강조 하면서 자신의 서사시 '대나무밥차롱 속에 나라'를 낭송 했다.
강 시인은 "4.3은 미국의 잘못도 아니고 우리가 우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다 잘못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책임 질 사람이 많다. 따지면 한 없이 따지는 것이고 수수의 법칙처럼 감사함을 주면 한없이 감사 함에 도달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가 서는 것이다. 그 바탕위에 글도 사랑으로 엮어 져야 한다."고 강조 하면서 자신의 서사시 '대나무밥차롱 속에 나라'를 낭송 했다.

“선생님이 이 같은 열정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이상 제주의 생활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농촌의 삶은 병약한 나의 건강을 또다시 위협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탈(脫) 제주를 꿈꿨다. 60년대 초, 이번은 일본이다. 솔직히 일본은 1941년도에 내가 태어난 곳이다."

"해방 전 해인 4살 되던 해 부모님 따라 귀국함으로써 제주의 삶은 시작되었고, 그 삼년 후 아버지는 4 3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어쩌면 귀국하지 않았으면 교포가 되었을지도 모를….”

“삶이 버거울 때면 부모님의 귀국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밀항은 4 3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모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출생지가 일본인 것이 입증되면 일본 정부가 일본 거주를 허가해준다.’는 말을 믿고 호적등본 한 장 달랑 들고 시도했던 탈출극은 경남 마산의 어느 조용한 포구에서 진행됐다."

"어선을 위장한 3톤짜리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출항한 지 한 시간여, 새벽 2시쯤일까, 그런데 이번에 태풍주의보가 나의 대 탈출의 꿈을 막아버렸다.”

“나는 절망적인 이날을 당시 내 습작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신이여, 이제 저에게 남은 건 없습니다. / 행복도 사랑도 고통도 모르옵니다. / 그러므로 겨울은 겨울대로 멈춰있게 하십시오. / 대지의 텃밭이란 텃밭은 모두가 매 마르고 / 한 그루 과일 나무 가지에 달린 건 겨울일 뿐입니다.“

“일본 밀항의 꿈도 좌절되고 나의 삶은 절망뿐이었다. 어릴 때 봤던 죽음을 떠올렸다. 죽음은 결코 두렵지 않다는 것과 죽음은 가벼운 것이라는 것을…. 키니네’가 불면증 치료제라는 것과 열 알이면 죽는다는 걸 주변으로부터 듣고 알았다."

"그러나 무려 20알을 구입했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팔아주지 않기 때문에 부산 남포동 거리의 약방 여러 곳을 돌며 구입한 것이다. 왜 이 약을 구입하느냐, 누가 복용할 거냐. 불면증은 언제부터 시작했느냐는 등 따져 물어 보는 양심적인 약사가 있는 반면, 너의 죽음 따윈 관심 없다는 듯 무조건 팔아주는 약사의 부조리한 모습에서 나의 자살의 이유는 더욱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48시간의 깊은 잠에서 깬 것은 부산 서면로타리 어느 조그만 병원의 병실이었다. 고향에서 올라오신 어머님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이때 나의 일기장에 적힌 어머니의 모습은 이러했다."

"‘거치른 손, 윤기 없는 피부, 주름이 한가득한 얼굴, 희뿌연 머리털, 눈물마른 표정, 색 바랜 치마, 십 년이나 더 입은 저고리, 구겨진 소매, 이제는 흘릴 눈물조차도 바짝 말라 버려 움푹 페인 눈자위’, 이것이 오직 아들 하나만을 믿고 생을 지켜 오신 당신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불효한 자식이었을까. 한 차례 죽음의 소동은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의식 없는 생활은 포기이며, 표정 없는 행동은 죽음이다. 따라서 절망은 없다’

이날 강 시인의 시 '앗물질' 변종태 시인이 낭송하고 '제로시대'를 양민숙 시인이 낭송해서 눈길을 끓었다.
이날 강 시인의 시 '앗물질' 변종태 시인이 낭송하고 '제로시대'를 양민숙 시인이 낭송해서 눈길을 끓었다.

❏삶의 진실
“어머님은 나에게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었다. 어머님이 정한 배필에게 장가드는 것은 그 첫 번째 섬김이다. 이때 색시의 얼굴도 모르는 사이다. 내 일기장에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장가가는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님이 당신의 며느리를 맞이하는 날’이라고."

"이때 나이 26살이다. 내 삶의 지향점의 끝은 어디인가 스스로에게 따져 물었을 때 역시 천리타향 다 돌아 봤고, 죽음을 선택해 보기도 했다. 이제 남은 건 어머님 모시고 착실히 효도하는 일, 그 길 하나뿐이다.”

“안정을 찾기 위해 공무원 9급 시험에 도전했다.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다소 늦은 나이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존재의 의미란 공직자로소의 존재이며 국가의 공복으로서의 성실성이며, 그 직무를 다하는데 있다고 여겼다. 때문에 그 존재의 의미와 직무를 다하기 위해 문학수업은 접기로 했다.”

“1993년도 나이 53세, 제주도청에 과장이 되던 해다. 그때야 비로소 나이와 직위가 어느 정도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가슴에 묻어두었던 문학의 씨앗을 터트릴 시기가 되었던 듯싶다.”

“휴지처럼 버려졌던 시편들을 정리했다. 이 작업을 도와주고 등단에 등을 떠민 사람이 한 분 있다. 동료직원이면서 이미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오승철 시조시인이다. 그는 나의 재능에 불을 지펴주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수도 없이 작품을 다듬어주었다.  드디어 「오조리 노래」 등 10편의 시가 계간문예지 「한겨레문학」 창간호에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천을 해주신 박재삼, 권일송 선생은 심사평에서 ‘무엇이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가. 그 시의 계기는 무엇인가. 만약 그가 제주에 살고 있지 않았어도 이런 작품들이 빚어질 수 있었을까’ 하면서 ‘그의 역량으로 미루어 습작실의 노고와 연진의 나이테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압축과 절제의 미학에 근원을 둔 듯한 시편들이 풍기는 감동과 언어의 경제는 앞으로 이 시인의 앞날을 지켜보게 한다,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라고 칭찬해 주셨다. 이때 당선소감으로 ‘내 나이 오십 줄, 따지고 보면 ‘인생의 가을’이라고 해도 좋을 듯한 가을의 길섶에서 용서를 해 줄 것이 있다면 다 용서해주고, 또 용서를 구할 것이 있다면 다 구하고 싶다.’고 했다.”
 
“그로부터 다시 24년이 흘렀다. 나는 아직도 그때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 있다. 바뀐 것이 있다면 나이가 50줄에서 7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등단소감에서 밝힌 바대로 ‘용서를 해줄 것이 있다면 용서를 해주겠다.’고 했으나 아직도 용서 못한 것들이 많고 ‘용서를 구할 것은 용서를 구하겠다.’고 했으나 아직도 구하지 못한 것이 많으니 아직도 미완의 늙은이다.”

“그렇지만 숙명적으로 나는 시인이라는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용서를 구하는 일, 용서하는 일이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음으로이다.  이 길을 감에 있어서 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동인들이 있어 더욱 그렇다. 그들은 다름 아닌 ‘다층’이라는 시문학 동인들이다. 1995년도부터 이어져온 이들과의 인연은, 이들이 젊은 층으로 구성됐다는 점과 70 노인은 오로지 나 혼자뿐임에도 나를 싫다하지 않는 점과 그래서 나도 그들처럼 작품으로나마 젊어지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 시가 마려워 사는 고향-悔恨
“2000년도, 30년의 공직을 마감하고 성산포 오조리 고향으로 돌아왔다. 거소는 제주4 3때 집단학살 터(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 형제분들이 학살당한)였던 그 ‘앞바르 터진목’을 마주한 자리다. 그곳을 바라보면서 늘 겸손하려 함이었고, 늘 성실하고 싶어서였으며, 늘 사랑하고 싶어서였다.”

“성산포에 아내와 함께 ‘해뜨는 집’이라는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 찾아오는 손님들과는 못 다한 삶의 이야기와 사랑의 대화를 나눈다. 손님 중에는 2008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작가 ‘르 클레지오’도 있다."

"그에게 제주해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고, 제주4 3의 아픔을 말해주었다. 그로 인해 그와 나는 형제의 정을 나누기로 했다. 그는 해마다 제주를 찾았고, 유럽 최대잡지 「GEO」 30주년 기념특집호에 그의 제주기행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이는 하멜 이후 서방세계에 제주를 알리는 첫 번째 기행문이라는 <동아일보>의 극찬도 있었다. 또한 계간 ‘열린시학’의 편집주간이며 경기대학교 교수인 이지엽 시인은 ‘50년의 기다림’이란 제목으로 해뜨는집을 아래와 같이 노래하기도 했다.

‘제주도 오조리 성산포에는 / 강중훈 시인이 산다. / 성산일출봉을 중앙으로 우도와 옥녀봉을 거느리고 / ‘해뜨는집’을 운영하고 있다. / 강중훈시인은 제주 4 3때 아버지를 잃었다. / 아버지는 그날 이발하러 가신다고 집을 나갔는데 / 50년이 지난 오늘까지 오시지 않고 계신다.‘
--<중략>--

‘강중훈시인은 아직도 대문을 열어두고 잠을 잔다. / 대문을 닫아두면 아버지가 들어오실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 어린 손자를 안고 강중훈 시인은 “해뜨는집”을 찾아주는 손님들을 / 아버지처럼 맞아들이며 / 가슴 속 지우지지 않은 아버지를 / 오늘도 기다리며 살고 있다.’


“또 다른 시인 조성림(홍천여중 교장) 님도 「붉은 가슴」(2016/시와소금)이라는 그의 시집에 해뜨는 집에서의 느낌을 「해뜨는집-강중훈 시인」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해뜨는 집’은 제주 성산포 그의 집 상호명이다 / 나는 아주 우연히 그 집에서 하루 머물렀다 /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 아침 떠날 무렵에서야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 그가 어제 친필의 편지와 시집을 보내왔다 / 시집에는 제주 바다가 묻어있었다 / 어렸던 그는 4 3사건 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를 놓쳐버리고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 나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 제주 먼 나무의 붉은 열매가 눈에 번뜩 들어왔다 / 세월을 반추한다는 것은 뼈까지도 쓰라리다 / 그는 사진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웃음은 세월을 삭였다는 뜻일까. 품었다는 뜻일까  --<후략>--

“나에게 시(詩)란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건 내 삶이며 내 고향이라고 답하고 싶다. 뒷동산에 올라보면 언제나 무너질 듯 옹기종기 버티어 앉은 시(詩), 고향 오조리는 그렇게 시가 마려운 마을이다. 4 3이라는 난리에 부모형제를 잃고, 혼적삼(죽은 자가 생전에 입었던 옷) 입은 해녀 또한 물숨(바다 속 해녀가 마지막까지 참아낸 숨) 먹은 곡(哭)이 되어 돌아오는 노역의 마을이 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삶이 시(詩)이고 시(詩)가 삶인 이 마을에서 헌 옷 꿰매듯 시를 꿰매며 살고 있다. 삶의 방식도 여러 가지일 거다. 지금도 밭에 나가 김을 매고 곡괭이질로 농사일을 한다. 집에서는 아내와 함께 민박집을 운영하며 방청소와 침대 시트관리는 물론 수건, 이불빨래 등 모든 것을 아내와 손수 한다."

"물론 정원 관리도 내 손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짬을 내서 각종 모임에도 참여한다. 작게는 동내 마을일에서부터 대외적인 크고 작은 각종 행사에도 가급적 빠지지 않는다. 삶이 문학이고 문학이 곧 내 삶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명한 시인도 아니고 또 유명해 지고 싶지도 않다. 게으르지 않고 허세부리지 않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면서 사유하며 즐긴다. 그게 자연인 ‘강중훈’이며 시인 ‘강중훈’이다. 그 속에서 김을 매듯이 시어를 다듬고, 정원을 가꾸듯이 시어를 가꾸고 애인을 사귀듯이 문학과 연애하며 앞 바다 절 울음(파도) 같은 나의 노래를 내 아내 김치 담그듯 차곡차곡 시집에 담는다.”

“그 첫 시집 오조리, 오조리, 땀꽃마을 오조리야도, 두 번째 시집 가장 눈부시고도 아름다운 자유의지의 실천도, 세 번째 시집 작디작은 섬에서의 몽상도, 네 번째 시집 날아다니는 연어를 위한 단상도, 다섯 번째 시집 털두꺼비하늘소의 꿈도, 여섯 번째 시집 바람, 꽃이 되다만 땀의 영혼도 모두가 내 삶의 노래며 내 고향의 노래이며  잊히지 않은 제주4 3의 노래인 것은 오늘도 내 삶의 시가 오줌 마렵듯 마려운 때문에서다.”

강중훈 시인과 뜻을 함께 한 작가들이 기념 촬영으로 특강이 마무리 됐다.
강중훈 시인과 뜻을 함께 한 작가들이 기념 촬영으로 특강이 마무리 됐다.

한편, 강중훈시인은 1941년 일본 오사카 출생, 44년 성산읍 오조리 정착, 중앙고 졸, 한국방송대 국문학과 졸, 제주대 경영대학원 석사졸을 주경야독했다.

1993년 한겨레문학으로 시인에 등단 후 20년이 넘도록 꾸준히 문학 활동을 하며, 계간 문학지 '다층'의 편집인을 10년 넘게 맡아 기성문인의 문학 활동을 지원하고 신인발굴에도 힘써 온 것을 인정받아 '2014년 제11회 제주도예술인상’을, 지난해 제17회 제주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서귀포문인협회와 제주문인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의 회장과 ‘다층’ 편집인 등을 역임했다.



'제로지대'

아침 해를 본다. 모로 누어 코를 고는 해, 그 위로 눈 내리고, 눈 속에 숨어버린 동화 속 잃어버린 유리 구두 파편이 박혀있는 별의 바스락거림, 불안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감춰진 것이고 감춰진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별들의 속삼임.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특별히 불안할 것도 없는 나의 별들이 눈 속에 숨어버린 시간, 아침 해는 아직도 코를 골고 눈의 무게는 아직 가벼워. 새벽녘 암캐가 닭 한 마리를 물어 죽이는 장면에서 밀려오는 허기, 부른 헛배가 둥둥 하늘을 떠다녔다. 암캐가 긴 혀를 빼고 침을 흘릴 즈음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닭의 죽음을 노래하고, 목청을 찢어대던 암캐는 얼얼한 새벽 창가에 널브러졌다.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나의 꿈은 덜 깨고. 암캐의 가랑이에서 배시시 떠오르는 해.

- 강중훈의 자선시 제로지대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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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다니엘 2018-10-25 11:55:53
어떤 역경의 시기에도 흔들림 없이 성심을 다 하여 걸어가시는 삶의 자세에 경의를 표합니다.
문학에 대한 숙명을 지고 가시는 지독한 열정 찬미합니다. 건필과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