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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시대 틀에 박힌 글에 반박했던 멋진 이야기들
정조시대 틀에 박힌 글에 반박했던 멋진 이야기들
  • 김명숙
  • 승인 2018.06.19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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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처방전] <11>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설흔의 역사소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그의 친구 김려가 글쓰기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은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풀어낸다. 이 책의 중심에는 정조시대 문화사적 사건인 ‘문체반정’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후기 문인들 사이에서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요즘의 소설체와 유사한 문장)가 유행하자, 정조와 권신들은 이를 바로 잡아 전아한 고전 문체로 되돌리려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생들과 선비들이 벌을 받았고, 반성의 뜻으로 고전 형식의 글을 짓기도 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 한다.

이옥이 쓴 「시기」의 한 대목을 보자. 시기(市記)는 저잣거리 풍경에 대한 기록이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 두 마리 소를 끌고 오는 자, 닭을 안고 오는 자, 문어를 끌고 오는 자,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메고 오는 자,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 청어를 엮어서 늘어뜨려 가져오는 자, (......)표주박에 두부를 담아 오는 자, 주발에 술이나 국을 담아서 조심스럽게 오는 자가 있다.

장날 서민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묘사한 이옥의 글은 당시 시도 때도 없이 ‘임금의 은혜’를 거론하고 중국 삼황오제를 끌어들이던 선비들의 글과 사뭇 다르다. 양반 중심의 계급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인물들 하나하나를 불러내어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정조는 이런 소설류의 문체를 혐오했다. 정조는 글은 도(道)를 실어 나르는 도구로 여겼다. 그는 바른 정치는 바른 문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시장에 사람이 많다고 한 줄만 쓰면 그만일 것’을 어째서 이처럼 요망하게 구구절절 쓴단 말이냐고 못마땅해 했다.

정조 임금은 <열하일기>를 써서 당시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 연암 박지원을 경박한 문체의 ‘원흉’으로 지목하면서 “당장 바르고 곧은 문체로 반성문을 써내라”고 호통쳤다. 박지원은 정조의 호통에도 끝까지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버텼지만 이옥(李鈺 1760~1815)은 달랐다. 이옥은 1790년 과거의 1차 관문인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대과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때마침 불어닥친 정조 문체반정으로 인해 타락한 문체를 쓰는 '문제의 인물'로 거론되었다. 반성문의 글을 하루에 50수씩 지어 문체를 뜯어 고친 연후에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벌을 받는다. 이후에도 문체가 이상하다 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벌인 '정거(停擧)'를 당하였다가 강제로 군역에 복무케 하는 '충군(充軍)'의 벌을 두 차례나 받았다. 이후 이옥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고향 남양으로 낙향하여 지내다가 1815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이옥과 같은 성균관 동무로 벼슬길에 나간 김려(金鑢 1766~1822)는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유배와 해배를 반복하며 말단 한직을 전전한다. 말년에 자신의 문집을 간추리면서 이옥의 글을 끼어넣었다. 이옥의 글이 역사의 증거로 남게 된 연유이다.

이옥은 끝내 그 문체를 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던 이옥! 이옥과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동무의 예술적 신념을 끝까지 지지해주었던 김려! 이들을 현대에 불러낸 설흔, 이들의 우정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문체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워진다니, 세상이 변했기에 문체가 변한 건 아닐까?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는 우리가 잊고 있던, 삶에서 중요한 ‘그 무엇’을 생각게 하는 멋진 이야기다.

김명숙 칼럼

김명숙 칼럼니스트

충북 단양 출신
한양대 국문과 졸업
성미산공동체 '저해모(저녁해먹는모임)' 회원
성미산공동체 성미산택껸도장 이사
나무발전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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