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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기억한다. 일제의 아픔과 한국전쟁의 아픔도
땅은 기억한다. 일제의 아픔과 한국전쟁의 아픔도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06.07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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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건축] <2> 격납고

보슬보슬. 그 단어에 맞는 짝을 찾아보라면 감자가 딱 어울린다. 푹 익은 감자를 쪼개면 그야말로 ‘보슬보슬’ 떨어진다. 어쩌면 단어와 단어의 조합이 이처럼 잘 맞을까. 감자는 보슬보슬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우리 생활에 바짝 붙어 있다. 그런데 왜 영어권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 감자를 덧붙여 ‘스몰 포테이토’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감자는 예전엔 먹거리가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사람이 먹기보다는 가축사료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요리에 빠져서 안되는 게 바로 감자가 아닌가.

감자는 제주에서는 ‘지슬’ 혹은 ‘지실’로 불린다. 제주4·3의 역사를 그려낸 영화 <지슬> 덕분에 감자를 일컫는 제주만의 그 단어가 세상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됐다. 역시 영화가 주는 매력과 파급력은 거기에 있다.

하지만 감자와 고구마는 헷갈린다. 제주에서는 고구마를 감저, 혹은 감져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고구마와 감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그리 오래지 않다. 하나는 18세기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또 다른 하나는 19세기에야 맛을 볼 수 있었다. 늦게 들어온 건 감자였다.

감자와 고구마가 헷갈리는 이유는 고구마를 애초에 ‘감저(甘藷)’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고구마는 감자가 들어오기 전에 ‘감저’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고구마보다 60여년 이후에 우리 땅에 들어온 감자가 문제였다. 감자는 ‘마령서(馬鈴薯)’라는 이름도 달고 있었지만 ‘북저(北藷)’라는 또다른 이름을 지녔고, 때문에 두 작물은 이름을 사이에 두고 혼란이 일어난다. 감저와 북저. 19세기, 혹은 20세기 초기에 살던 사람들은 어찌 구분을 했을까. 상충되는 단어가 나중에 어떻게 조정되었는지는 국어학자들이 잘 알지 않을까.

어쨌든 감저는 고구마로 이름이 대체되고, 북저는 지금의 감자라는 이름으로 변한다. 다만 제주에서만 감저(감져)가 그대로 살아 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왜 감자를 지실이라고 불리게 됐는지는 알쏭달쏭하다. 일부에서는 지실(地實)이라는 한자를 써서 ‘땅에서 나는 열매’라는 한자어가 나중에 제주에서 부르는 감자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사실일까? 답을 하자면 잘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때 펴낸 <제주도세요람>을 보면 여전히 고구마는 ‘감저’로 되어 있고, 감자는 ‘마령서’로 표기가 되어 있다. 언제부터 감자가 지슬, 혹은 지실이 되었을까. 정말 궁금하다.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건 김동인의 소설 <감자>에 등장하는 감자는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다. 김동인이 작품활동을 하던 일제강점기 당시엔 육지부나 제주나 할 것 없이 고구마는 고구마로 불리지 않았던 건 분명하다.

어릴 때 기억을 소환해본다. 떠올려보면 널린 게 고구마였다. 감자보다는 훨씬 많았다. 일제강점기 때 제주도를 ‘고구마의 섬’으로 만들고, 주정공장도 만들었기에 당연하다. 지금은 고구마보다는 감자를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제주에서 감자가 많이 나는 땅을 찾으라면 대정읍이 단연 꼽힌다. 특히 드넓은 알뜨르 일대에서 감자를 생산해낸다. 예전에 이 일대에서도 고구마가 많이 재배되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감자가 대세이다. 아무래도 음식을 만드는 주재료엔 고구마보다는 감자가 많이 쓰이기 때문일테다.

알뜨르 일대는 드넓다. 뜨르라는 건 들판이다. 제주도 전체로 봤을 때 서부지역은 평원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넓은 평지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둔 알뜨르비행장은 그래서 생겼다. 제주공항이 있는 곳도 정뜨르였다고 전에 설명을 했다. 그런 점에서 평지가 아닌 곳에 제2공항을 만들겠다는 심산은 뭔지 모르겠다. 제주도 사람들은 당연히 제주 서부지역에 제2공항이 들어설 걸로 알았건만. 실제 가보면 안다. 제주 서부지역은 경남 일대의 평원보다도 더 넓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정말 가보면 안다.

평원인 대정읍. 간혹 솟은 봉우리는 있다. 산방산도 있고, 모슬봉도 있다. 그래도 대정읍은 넓은 평원이 있다. 여기서는 대정읍 가운데서도 모슬포로 좁혀보겠다. 모슬포는 넓다는 이유만으로 아픔을 겪는다. 그 아픔을 이루 다 말할 수는 없겠다. 그 아픔을 드러내는 것 가운데 하나가 ‘격납고’다.

대정읍에 흩어져 있는 비행기 격납고. 뒤로 산방산이 보인다. 김형훈
대정읍에 흩어져 있는 비행기 격납고. 뒤로 산방산이 보인다. ⓒ김형훈

격납고는 현재 20개 가량이 알뜨르 일대에 흩어져 있다. 사실 격납고는 항공기를 넣어두고 점검을 하는 곳인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격납고라는 이름은 잘못이다. 대정읍에 있는 격납고는 비행기 모습이 보이지 않게 가려주는 시설일 뿐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덮개가 있는 비행기 보관 시설’이다. 한자로 표현한다면 ‘유개엄체호’가 되겠다. 그렇다고 유개엄체호라고 부르니 더 이상하다. 유개엄체호라고 말하면 고개만 갸우뚱할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 더구나 다들 격납고라고 부르고 있다. 격납고는 등록문화재 제39호인데, 문화재청은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로 소개한다. 그러고 보니 죄다 틀린 것 투성이다. 격납고라는 말도 틀렸고, 남제주라는 말도 틀렸다. 남제주는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면서 사라졌고, 지금은 서귀포로 통합됐다. 이래저래 틀린 게 많이 보이지만 여기서는 통칭인 격납고를 쓰련다.

모슬포는 군사의 땅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한국전쟁을 거치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군사의 땅이다. 상당수의 땅은 국방부 소유로 되어 있다. 모슬포의 넓은 평원은 농민의 일손으로 바쁘다. 국방부의 땅이지만 농민들은 거기에서 일을 한다. 농민들은 2년마다 국방부와 계약을 맺는다. 공짜일리는 만무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뒤를 이어 국방부에 임대료를 내고 농사를 짓는 자식도 있다. 애초에 이 땅은 농민의 것이었으나 일제를 거치면서 국방부가 접수해버렸으니 빌려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런 땅에서 농민들은 감자를 캐고, 무를 캐느라 땀을 흘린다. 수많은 농민들의 땀은 그 땅을 적셔왔다. 그런데 땅은 또다른 땀을 기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땀을 수없이 흘리고, 혹은 매를 맞으면서 두려움에 떨던 이들을 기억한다. 땅이 가진 기억을 끄집어내려면 1930년대 초로 거슬려 올라가야 한다.

일제는 제주도를 무척 귀하게 여겼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이 정도 규모로 큰 땅은 없다. 제주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제가 제국주의로서 기치를 올릴 당시는 더더욱 제주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일본 규슈에 있던 사세보 해군항공대가 모슬포에 공항 구상을 하게 되는데, 그게 1926년이며 실현에 옮기기 시작한 시점이 1930년대 초가 된다. 1930년대 초라고 하는 이유는 연구자마다 시작 시점에 차이를 두고 있어서다. 연구자마다 시작 시점에 차이는 있으나 모슬포에 구축된 비행장은 바로 알뜨르비행장이다. 알뜨르비행장은 포털사이트의 지도만 봐도 나온다. 항공에서 내려다본 활주로의 모습이 그대로 모슬포라는 땅에 박혀 있다.

알뜨르비행장과 관련,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잠시 옮겨본다. 2014년 송악도서관이 진행한 ‘학교도서관 독서교육콘텐츠’ 연계 사업으로 진행된 결과물로 얻어낸 채록집에 들어 있는 내용의 일부분이다. 1925년생인 오성학씨가 제주문화연구소 김유정 소장과의 대화를 하며 나눈 내용이다.

오성학> 열 세 살 때 이교동더레 올라와수게.

김유정> 그 전에 비행장 닦을 때 일 해났댄 허멍 예?

오성학> 거기서 태 날르는 거 했지. 뭐냐면 위 사람들 신디 심바람꾼 이주. 일이란 게 이거 허랜 허민 이거 하고, 저거 오저 오랜허믄 태 날르곡, 자기대로 헐건 어서 심바람군이어수다게, 열 세 살 전이.

김유정> 비행장에 다른 아이들도 이서수과?

오성학> 다른 아이들은 저 기억 못하는디 산이수동 이창수엔 ᄒᆞᆫ 사름이 함바에서 살아수다.

김유정> 아이들도 함바에 살리멍?

오성학> 아이들도 함바에 자고, 그디서 자수게, 자고 먹고.

김유정> 그때 일본군들은 어떵해나수과?

오성학> 일본군이엔 헌거 저 거세기 각반 차곡, 높은 사람은 칼 영헌디 차고 해수다. 온슈엔 헌 그 일본 사람 이서수다. 온슈, 이름도 잊어불지 안 허여 훈련받을 때 그놈신디 매를 막 많이 맞아수다. 비행장에 아무데나 각지 사람 다 모여서 마씀. 제주도 사름만. 서귀포고, 한림이고, 신평 곹은 디 광쳉이 곹은 디, 그런디 사람들 ᄃᆞ려단 함바에 혼 여남은 사름 씩 함바에 살아수다, 열 사름도 살고.

김유정> 함바에 살멍 밥은 어떵 먹읍니가?

오성학> 밥은 대죽밥 게, 대죽 ᄊᆞᆯ밥 그거 허영 먹고 반찬은 머 엇고 마씀.

김유정> 대죽ᄊᆞᆯ밥? 막 배 고프쿠다.

오성학> 무사 아니라게, 젊을 땐 돌을 먹어도 사는디 그까짓 거 먹은 건 성이 어서. 더 ᄃᆞ랜 해도 안주는데 매만 맞주.

김유정> 매는 뭘로 때려수과?

오성학> 방맹이 요즘 야구 방맹이 닮은 거 그런 걸로 때려, 왜 너만 배고프나 허멍 때리믄 다시 말허지 못 허여.

김유정> 일본 사람들 독헙디가?

오성학> 막 독허여. 막 무시허주 무시허고 말고, 막 모소와. 막 볼볼 떨어수게, 오라가민 중이가 고양이오라가민 모시듯, 어떵헙니까게. 삶이 삶이 아니어수다게.

오성학씨는 13살 이전부터 징용에 투입됐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구술은 ‘함바’라는 시설을 등장시킨다. 이런 시설에 집단적으로 기거하며 고픈 배를 참으며 비행장 건설에 투입됐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인으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일도 빈번했던 모양이다. 온슈라는 이름의 일본군은 제주사람들을 마구 때렸고, 오성학씨의 말을 빌리면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그런 기억을 모슬포는 하고 있다. 어쨌거나 모슬포가 일제로부터 비행장으로 낙점받은 이유는 주위가 개방된 덕이 컸을 것 같다. 넓은 들판이었으니 비행장을 만들 여건이 충분했다.

일본 규슈의 사세보는 직선거리로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여기에서 항공기를 띄우면 한번에 중국까지 날아갈 수 있다. 문제는 되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중간에 한번 내려야 하는데 가장 적절한 여건을 갖춘 곳은 제주도였고, 제주도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넓은 들판을 지닌 모슬포였다. 지금은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엔 일본에서 중국으로 단번에 날아가는 것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대 일본은 상당한 기술력을 지녔기에 일본 사세보를 출발하면 중국 대륙에 닿을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되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처음에 6만평 규모였던 알뜨르비행장은 1937년 발발하는 중일전쟁을 앞두고 확장된다. 14만7257평을 새로 사들인다. 중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중간 기착지였던 알뜨르의 역할이 커졌다는 증거가 된다. 당시 토지매입 보고서를 들여다보면 소화 12년(1937) 1월 13일부터 2월 26일까지 땅을 사들이는 내용이다. 불과 40일만에 48만㎡를 넘는 14만7257평을 사들인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강제수용을 하지 않고서야 그 짧은 기간에 농민들이 가진 땅을 산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뺏긴 사례는 구술로도 나타난다.

“저희 고조부님이 축산업을 했어요. 소가 200마리, 말이 150마리 해가지고 방목을 하면서 부를 일으켰어요.(중략) 밭이 만여평 있었는데 저희 아버지가 고생을 많이 했죠. 어릴 때 저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집 운영을 못해서. 6~7천평은 뺏겼어요. 강제로 일정 치하에서 농촌을 뭐 부흥시킨다고 그런 정책을 폈는지 모르지만 우리 밭을 집행한겁니다.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안내놓겠다고 하는데 면장이 아버지에게 협박을 한거죠. 아버지 뺨을 세 번이나 때리면서. 밭을 내놓으니까 우리는 파산한 겁니다. 왜정 치하에 박탈당한 겁니다. 저도 고생을 많이 했죠.”

<일제 동굴진지 등록문화재 종합 학술조사 보고서 2>에서 발췌

이유야 어떻든 모슬포에 근거지를 뒀던 농민들은 땅을 뺏겨서 울고, 거기에 투입되며 비행장을 만들어야 했던 제주도 사람들은 두려움에 울어야 했다. 땀과 울음이 섞인 그 땅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그 땅을 지키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묵묵히 그 땅위에 세워진 건조물로 말을 할 뿐이다.

더 안타까운 건 일본이 난징을 공격할 때 모슬포비행장에서도 난징으로 폭탄을 실은 비행기가 떴다는 사실이다. 제주도에서 진행한 난징 공습은 36차례라고 한다. 우리의 자료가 아니라 일본 자료를 근거로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모슬포는 또다른 이들에게 아픔을 주는 공간이 된다. 어떤 이들은 모슬포에서 난징을 향해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일본이 난징을 공격하는 중간기착지였다.

모슬포에 남아 있는 격납고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그 위로 잔디를 입혀 상공에서 내려 보면 구조물인지의 여부를 판단하지 못하게 꾸몄다. 철근을 담은 격납고는 아니다. 나무로 틀을 짜서 그 안에 콘크리트를 붓고, 굳으면 나무를 떼어내는 방식이었다. 격납고는 알뜨르비행장 조성 초기에 등장하지 않고, 1937년 중일전쟁이 끝나고 만들어졌다고 한다.

요즘 다크투어리즘이 뜬다. 글쓴이가 한창 모슬포를 오가며 격납고를 볼 때만하더라도 인기 있는 여행 코스는 아니었다.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젠 그렇지 않다. 하나의 여행코스가 됐다. 어떤 때는 낭만적으로 보인다. 격납고가 드문 드문 보이고 뒤로는 산방산이 자리하는 모습은 사진찍기 좋아하는 이들에겐 낭만적 그림이 된다.

모슬포는 일제 패망 후 한국전쟁에 휩싸인다. 모슬포를 다시 점령하는 건 일본군이 아닌 또다른 군인이었다.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다. 수만 명, 셀 수 없을 만큼의 군인들이 모슬포에 운집을 했다. 일본군이 떠나고 대한민국이 모슬포를 차지해서 만든 건 제1훈련소였다. 모슬포에 위치한 제1훈련소는 북한군과의 전투를 위해 군사를 양성했다. 제1훈련소를 나선 이들 가운데 살아서 돌아올지 기약을 하지 못한 이들도 있다. 그들을 모슬포는 기억한다. 모슬포의 땅은 기억한다.

모슬포를 일제가 접수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알뜨르비행장도 없었을테고, 훈련소도 없었을테다. 당연히 국방부 소유의 땅도 없었을테다. 격납고도 물론 우리를 만날 수 없다.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 이 땅이 국방부 소유라는 것. 때문에 다크투어가 가능하다는 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알고 보면 국방부가 지닌 땅의 원래 소유주는 제주도민이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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