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8 13:33 (목)
4.3 때 억울하게 죽은 이는 아직도 운다
4.3 때 억울하게 죽은 이는 아직도 운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05.29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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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건축] <1>제주국제공항

새로운 기획물을 선보입니다. 바로 땅과 건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땅은 같지 않습니다. 땅 위에 세워지는 건축물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은 모양의 건축물을 서로 다른 땅에 세울 수는 없습니다. 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획물은 건축물만 접근하지는 않으렵니다. 건축물이 담고 있는 그 땅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게 됩니다. [편집자주]

사람들은 섬을 그리워한다. 바캉스라고 불리는 여름철만 섬을 그리워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사람들은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 아니 겨울까지 그리워한다. 섬에 가지 못해 안달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에 가지 못해 안달이다. 병이라도 날 듯 안달이다. 그 섬은 제주도란다.

언제부터였을까. 제주도가 그리워하는 섬이 된 것은. 일찌감치 제주에 내려온 시인 이생진은 그래서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고 읊었던 모양이다. 그의 시 마디마다 ‘성산포에서…’라고 읊조리는 게 리듬이 되고, 흥을 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듯 사람들이 섬에 밀려오는 이유도 알 수 없다. 대체 왜 사람들은 제주로 몰려올까.

제주에 사람들이 몰려온 때는 지금 말고도 있었다.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가장 가까운 시점은 1980년대가 된다. ‘메카’라는 말이 적절한 때였다. 신혼부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제주도에 들렀다. 제주도는 신혼부부의 메카였다. 솔직히 말하면 제주도 외에는 적절한 곳이 없었다. 해외여행은 아무나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해외여행에 제약을 두던 때였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폐쇄적인 시절이다. 여행자유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군사정권 때라고 해야겠다. 1980년대 제주를 찾은 20대의 풋풋한 청년, 아니 신혼부부들은 택시를 타고 누볐다. 자연스레 제주도 택시 기사들은 여행 가이드이면서 사진가가 되어버렸다. 당시 제주도는 국내에서 신혼관광객들이 대거 몰려들던 때였다면, 국외에서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택시기사들은 일본어쯤은 해야 돈벌이가 되던, 그런 시절이기도 했다.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일본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기생관광이 판을 치고 있었고, 일본인 현지처들도 많았다.

그런 풍경은 세월이 지나며 바뀌어갔다. 신혼여행객을 태우고 다니며 가이드를 하고 입담을 과시했던 택시 운전사는 이젠 없다. 다들 70대를 훌쩍 넘기고 말았다. 사실 글쓴이의 외삼촌이 그런 계통에서 일을 했다. 외삼촌은 글쓴이의 일본어 책을 빌려가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 세상을 뜬 이들도 있다. 이젠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는다. 그 자리는 렌터카가 메우고 있다. 3만대를 넘는 렌터카가 육지에서 들어오는 이들의 발이 되어버렸다. 이걸 두고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하나.

외국인은? 그 많던 일본인 관광객은 없다. 대신 중국인이 차지했다. 1980년대, 1990년대 초까지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은 이렇게 달라졌다. 덧붙여 더 달라진 것이라면 물밀 듯이 들어오는 사람들에 있다. 어느 한정된 계층만 제주를 찾는 시절은 이젠 아니다.

작은 섬이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다. 사람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면 좋기는 한 걸까. 다시 한 번 읊조린다.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면 좋을까. 이런 얘기를 던지며 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제주의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김형훈
제주의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김형훈

제주엔 두 개의 공항이 있다. 고개를 갸우뚱 하는 이들이 있을 법하다. 분명 공항은 하나인데 말이다. 제2공항을 염두에 두고 ‘두 개’라고 했겠지라고 말할 이들도 있겠다. 아니다. 제주엔 현재 두 개의 공항이 있다. ‘국제’라는 이름을 단 제주공항과 대한항공이 가지고 있는 정석비행장이 있다. 어쨌든 두 개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제2공항이 만들어지면 제주엔 무려 3개의 공항을 가지게 된다. 터만 남은 일제 때 알뜨르비행장까지 합치면 더 많아진다.

여기서 잠깐 꺼내고 싶은 말이 있다. 제2공항은 확정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들 제2공항은 확정되었고, 곧 착공될 것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타당성 용역이 끝나야 제2공항 부지로 확정이 내려진다. 예전엔 이런 일이 있었다. 정부가 지난 2015년 제2공항 적합지로 성산지역을 발표하자, 제주특별자치도는 ‘제2공항 확정 축하’라는 플래카드를 대대적으로 만들어서 내다붙였다. 그런데 확정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은근슬쩍 플래카드를 떼어낸 일도 있다.

제2공항 저지를 반대하는 이들이 많다. 성산지역으로 최종 확정되고 나면 토지수용 등의 절차가 뒤따를텐데, 그 절차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서귀포시 온평리는 마을 땅 70%가 사라진다고 한다. 토지 수용을 반기는 이들도 있지만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이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수십만평의 땅을 지닌 이들은 대환영이다.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니까. 100평의 땅을 가진 이들은 토지가 수용되면 어디 갈 곳도 없다. 그보다 더 작은 땅을 가진 이들도 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떠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개발은 이면을 지닌다. 당장은 모른다. 개발이 되고 나서야 개발의 이면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제주를 찾는데, 제주국제공항에 내리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제주에 처음 발을 디디면 반겨주는 이들이야 사람이지만 사람을 제외하면 육지부 여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야자수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감탄한다. 불과 1시간을 이동했을 뿐인데, 다른 나라에 온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래, 야자수 덕분이다. 하지만 야자수는 제주 토종은 아니다. 옮겨다 심은 거다. 한림공원을 만든 송봉규 전 회장을 취재했을 때 그 분이 그랬다. “1960년대 내가 들여왔다”고. 이국적이긴 하지만 제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게 야자수다. 가로수로도 심어져 있으나 가로수 역할은 전혀 해내지 못한다. 쓸모없는 야자수는 애물단지가 되었고, 가로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야자수들은 언젠가는 땅에서 뽑힐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공항에 내리면 마주할 수 있는 야자수. 김형훈
제주공항에 내리면 마주할 수 있는 야자수. ⓒ김형훈

제주라는 땅. 여기를 찾는 이들을 환영한다. 제주도가 많이 알려지는 걸 나쁘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단지 살살 다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려면 제주도를 잘 알아주면 더 없이 좋다. 제주공항에 내딛는 순간부터 제주를 이해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제주공항엔 아픔이 많다. 일제강점기 그 시절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당시 정뜨르비행장 그 땅은 편평한 땅이 없어. 울퉁불퉁하거든. 그걸 비행장을 만들어야 하니까 수평을 만들어야 할 거 아니여. 수평을 만들려면 이쪽의 흙을 떠다가 저쪽 얕은데 메우고 이렇게 작업을 하는데 옛날에 기계라고 하면 곡괭이하고 삽밖에 없는 거라. 정뜨르비행장에는 일하는 사람이 5천명 내지 7, 8천명이 되지 않았을까. 일본군이 공사를 지휘하는데 일을 시키는 사람은 십장이라고 했어요. 그 사람들 몽둥이 하나 손에 붙들고 댕기면서 허리가 굽어그네(굽어서) 일하는 사람 빼놓고 허리 패우는(펴는) 사람들 뒤로 가서 두들겨 패는 거라. 그러니까 허리 패와그네(펴서) 서질 못해. 쉴 공간에도 허리를 구부리고 이서야 해여(있어야해).”(일제 동굴진지 등록문화재 종합 학술조사 보고서-제주시편에서 발췌)

1930년생 김 모씨의 증언이다. 김씨가 말한 정뜨르비행장이 바로 지금의 제주국제공항이다. 김씨는 구좌읍 한동리 출신이다. 한동리는 제주공항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곳이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걸어서 정뜨르비행장 공사장으로 왔고, 15일간 머물고 집으로 갔다가 다시 불려나오면 15일간 머물곤 했다. 15세이던 그는 1944년 12월부터 정뜨르비행장 공사 현장에 투입이 됐다. 찬바람이 매서운 그 계절에 불려다녔다. 제주시의 겨울은 상상하지 못할 추위를 안긴다. 북서계절풍이 부는 제주의 겨울을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이들은 그 겨울이 상상되지 않는다.

정뜨르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수천명이 동원되었고, 편평하게 다진 뒤에는 그 위에 잔디를 입혀야 했다. 잔디는 오름에서 많이 가져다 날랐다. 제주에서 ‘떼’라고 불리는 잔디를 떼어다가 정뜨르비행장에 입혔다. 물론 거기에도 제주도민들이 동원되었다. 그런 이들까지 합치면 수만명이 정뜨르비행장을 만드는데 동원이 된 셈이다. 제주시 사라봉의 떼도 죄다 떼어갔다고 하는데, 그래서 사라봉은 여느 오름과는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는 가보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을 동원해야 했을까. 그건 죽음과도 연관된다. 결사항전이라는 말은 들어보았는가. 정뜨르비행장을 만들던 그 시점은 제국주의 일제가 죽을 각오로 임해야 했던 그런 시절이다.

패망의 그림자. 차츰 그 그림자가 제국주의 일본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승승장구하던 일제가 아니었다. 미국과의 일전을 불사하던 일제는 오고간 데 없었다. 남은 것이라곤 ‘가미가제’식의 죽음뿐이었다. 그에 앞서 도조 히데키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도조는 일제를 이끌던 수상이었다. 그의 말을 좀 빌리자. “인간은 일생에 한 번은 벼랑 위에 지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결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벼랑 위에 지은 집은 벼랑 앞으로 향하면 곧 죽음이다. 뒤로 물러서야 삶이 있을 뿐이다. 도조는 그 방식대로 살다 수상의 직위도 내놓고 만다. 1944년 7월의 사이판 함락은 모든 걸 바꿔놓았다. 도조만 그런 건 아니다. 제주도민들의 일상도 바꾼 건 마찬가지였다. 죽을 각오를 한 일제는 제주도를 버릴 수 없었다. 제주공항은 그 한 가운데 있다.

밀리고 밀려서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될 일제였다. 항전은 해야 했고, 그들이 꺼낸 건 ‘결호(決號)작전’이었다. ‘결호’는 싸운다는 의미의 ‘결전(決戰)’을 하겠다는 뜻에다 하나, 둘 숫자를 매긴다는 의미에서 ‘호(號)’를 붙였다. 결호는 1호부터 7호까지 정해뒀다. 그게 바로 죽음을 각오한 무모함이었다. 결1호는 홋카이도, 2호는 일본 도호쿠지방, 3호는 간토, 4호는 도카이, 5호는 츄부, 6호는 규슈였다. 그렇다면 7호는? 다름 아닌 제주도이다. 결전을 다짐하는 1호부터 6호까지는 모두 일본 땅인데, 결7호만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의 땅에서 항전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만큼 제주도가 중요했던가. 그렇다. 일본은 미군이 1945년 8월 이후에 제주에 들어올 것으로 내다봤고, 물자공급의 생명선인 대한해협을 확보하려 했다. 그런 점이 제주도를 선택한 배경이기도 했다.

일본은 결사항전의 자세를 보였으나 작전명은 완수되지 못했다. 항복선언을 하고 말았다. 제주로 봐서는 다행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일제가 제주에 투입한 병력은 7만5000명이었는데, 만일 전쟁이 발발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에 맡기겠다.

한숨을 ‘휴~’하고 돌리는가 싶었더니 더 큰 일이 일어났다. 제주의 가장 큰 상처인 4.3이다. 몇 명이 희생됐는지 정확한 수치는 알 길이 없다. 정뜨르비행장도 그 와중에 있다. 일제의 패망 후에 정뜨르비행장은 그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냥 놀리고 있던 그 비행장은 4.3의 가장 큰 희생터가 되어버렸으니 그 일을 어찌할꼬.

4.3은 생채기가 아니다. 생채기라면 긁힌 흔적일텐데, 4.3은 긁힌 게 아니다. 뼈가 부러지고 가슴이 망가지고, 혈관이 터지고, 상상하지 못하는 상처투성이를 남긴 게 4.3이다. 그 4.3의 멍에를 제주사람은 지녔다. 제주공항이 그런 곳이다. 제주공항에 4.3 희생자 800명 가량이 암매장 되었다고도 하는데 알 길은 없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불법 군법회의에 의한 학살로 제주도민은 죽어가야 했다. 예비검속이 그런 것이다. 글쓴이의 삼촌도 예비검속의 희생자다. 바로 정뜨르비행장의 희생자다.

제주공항은 4.3 때는 죽음의 장소이기도 했다. 사진은 4.3 유해발굴 작업. 제주4.3평화재단
제주공항은 4.3 때는 죽음의 장소이기도 했다. 사진은 4.3 유해발굴 작업. ⓒ제주4.3평화재단

다행히도 제주공항내 유해발굴 작업이 이뤄졌다. 지난 2007년 8월부터 2차례에 걸쳐 유해 발굴작업을 했다. 384구의 유해를 찾았다. 다행이나 다행은 아니다. 800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알 수 없다. 어디서 죽었는지, 정말 제주공항의 어느 한 지점에 묻혀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제주공항은 그런 곳이다. 너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알 건 알아야 하지 않는가. 제주는 바로 그런 곳이다. 낭만은 물론 있지만,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시인 문충성은 이렇게 읊었다.

“일제 때는 정뜨르 비행장 만드는 데
끌려가 죽을 고생했다고 삼촌이
해방된 다음엔 4.3사태 터져
폭도로 몰려
정뜨르 비행장 어디에서
총 맞아 죽었을 거라고 삼촌이
소문 따라 만들만
육군 졸병 시절 나는
휴가 와선 공군 장교였던 재민이 덕에
여기서 군용기 타고 오산까지 날아갔네

오늘날
대한항공이든 아시아나든 타고
국제공항 제주 날아올라
제주 바다 건너 오갈 때
문득문득
정뜨르 비행장
아직
살아 있어
생각만”

(시 ‘정뜨르 비행장’ 전문)

한때는 제주공항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만 있었다. 이젠 저비용항공사의 등장으로 항공사의 숫자만큼이나 항공기의 수도 늘었다. 그런데 발굴되지 않은 4.3 때 희생자들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비행기가 오가며, 수없이 오가며 오늘도 땅을 흔들고 있다. 유해는 하나 둘 부서진다. 유해는 하나 둘 금이 간다. 유해는 하나 둘…. 점차 땅 밑으로 흘러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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