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5:55 (화)
"4.3 증언자 살아 있을 때 연구 활발하게 이뤄져야"
"4.3 증언자 살아 있을 때 연구 활발하게 이뤄져야"
  • 이겸
  • 승인 2018.04.26 14: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 4.3의 기록자들] <2> 김종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상임대표②
​​​​​​​글쓴이 : 이겸(사진심리상담사, 여행과치유 대표)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사라진 마을이 된 '무릉이왓' 입구, 4.3과 유적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고 답사를 시작했다. 이겸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사라진 마을이 된 '무릉이왓' 입구, 4.3과 유적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고 답사를 시작했다. ⓒ이겸

- 제주 4.3 피해 현장 동행

“지금 우리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겁니다.”

김종민 대표가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전국지방기자단을 인솔하여 큰넓궤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다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분위기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안다고 하지만 경험이 없으니 학습 자료에 불과한 것이었다.

전국지방기자단과 함께 4.3 유적지인 무릉이왓을 답사하고 있다. 피해 생존자인 마을주민으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으며 함께 답사를 했다. 마을은 불에 타서 사라졌으므로 집터만 남았다. 이겸
전국지방기자단과 함께 4.3 유적지인 무릉이왓을 답사하고 있다. 피해 생존자인 마을주민으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으며 함께 답사를 했다. 마을은 불에 타서 사라졌으므로 집터만 남았다. ⓒ이겸

큰넓궤를 물고 있는 자물 통이 풀리고 우린 땅 밑으로 들어갔다. 4.3 당시 가장 안전했던 곳으로 몸을 들여보냈다. 어둠속에서 머리를 조아린 채 5미터를 엉금엉금 내려가니, 3미터 정도의 절벽이 나타났다.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설치된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이미 한 두 명은 되돌아갔고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입구를 들어온 상황이었다. 너무도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 어둠이 나의 민망함을 숨겨 주었다. 일행들이 손전등을 비췄다. 3미터 높이의 넓은 공간, 울퉁불퉁한 바닥이 드러났다. 당시에 마을 사람들이 쌓아 놓은 돌담이 나타났고 우리는 그 너머의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이후의 동굴 길은 오리처럼 걸어서, 네발로 기어서, 뱀처럼 누워서 가야했다. 덩치가 큰 사람은 더욱 힘들었고, 약한 사람들은 매우 느렸으며, 남자들은 한숨을 쉬며 멈추기를 반복했다. 불안했다. 어둠은 길고 시간은 사라졌다. 약 30미터를 가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공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30미터가 꽤나 길게 느껴졌다. 모든 사람이 도착하고 얼마 후, 김종민 대표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는 그의 제안에 따라 모든 후레쉬를 끄고 잠시 동안 어둠속에 들어갔다.

큰넓궤 중간 지점, 네발로 걷고 뱀처럼 기어야 동굴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다. 4.3 당시 노인, 어린아이, 여자들이 이곳에서 지냈다.  '가장 안전한 곳' 이었다.  이겸
큰넓궤 중간 지점, 네발로 걷고 뱀처럼 기어야 동굴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다. 4.3 당시 노인, 어린아이, 여자들이 이곳에서 지냈다. '가장 안전한 곳' 이었다. ⓒ이겸

“주민들은 당시에 후레쉬도, 안전모도, 무릎 보호대도, 장갑도 없는 상태로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간난아이, 여자, 임산부, 노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목숨을 이어가지 위해서였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를 학살을 피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당시 가장 안전한 곳에 와 있습니다.”

다시 후레쉬를 켠 후에야 날카롭고, 딱딱하고, 축축한 용암동굴을 오리처럼 걸어서, 네발로 기어서, 뱀처럼 누워서 입구로 나올 수 있었다. 굴 밖은 찬바람 섞인 봄 햇살이 가득했다. 참 반갑고 아름다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일행들은 저마다의 정말 소중한 경험을 했다는 소감을 나눴다. 학습에 짧은 경험이 보태지는 순간이었다.

큰넓궤는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산 90번지에 있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용암동굴이다. 이곳은 120여명의 동광리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1948년 11월 하순 부터 1949년 1월 중순까지 50일 동안 숨어 지냈던 곳이다. 중산간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으로 죄 없는 마을사람 10명이 총살된 이후였다. 그리고 토벌대의 추적으로 이곳은 발각되고 만다. 진입을 시도한 토벌대는 어둠속을 향해 총을 난사했지만 진입에는 실패했고, 밤이 되자 굴의 입구를 돌들로 막아 놓고는 철수했다. 가까스로 굴을 빠져 나온 주민들은 피신을 해야 했다. 노인과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변변한 옷과 신발도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이어가기위해 겨울 한라산으로 가야만 했다. 더 깊은 곳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후 토벌대에게 총살되거나 학살되었다.

먹을 것 입을 것등, 매우 열악한 상황,  어둠만 가득한 공간에서 50일을 지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절대 알수 없다. 김종민 대표는 이 날도 다른 일행을 인솔해서 큰넓궤를 반복해서 들어갔다. 이겸
먹을 것 입을 것등, 매우 열악한 상황, 어둠만 가득한 공간에서 50일을 지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절대 알수 없다. 김종민 대표는 이 날도 다른 일행을 인솔해서 큰넓궤를 반복해서 들어갔다. ⓒ이겸

-4.3의 중요 국면들은 어떻게 되나?

크게 저항과 탄압 그리고 항쟁, 수난의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1947년 3·1절 기념식 때 다른 지방에서 온 응원경찰의 무분별한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다. 경찰 발포에 항의해 대대적인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고, 이때부터 4·3무장봉기가 벌어질 때까지 1년간 무려 2,500명이 구금되었다. 1948년 3월에는 경찰에 의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이 ‘저항과 탄압의 국면’이었다. 그러자 ‘항쟁의 국면’이 펼쳐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경, 약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경찰지서 12곳을 동시에 공격했다.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 습격해 살해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독립”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무장대는 5·10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 2개 선거구만이 무효화된 것이다. 항쟁 못지않게 탄압도 중첩돼 나타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곧이어 참혹한 ‘수난의 국면’이 전개됐다. 토벌대는 ‘해안선에서 5㎞ 이외의 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에 따라 중산간마을을 불태웠고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다. 특히 토벌대가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약 5개월 동안 벌인 이른바 ‘초토화 작전’ 때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붙였고 불기운에 놀라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아낙네들도 어린아이들을 양손에 붙들고 살을 에는 듯 한 겨울 한라산으로 향했다. 숨었던 굴이 발각돼 온 가족이 몰살되기도 했고, 구사일생한 사람들은 가족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숨죽여 흐느꼈다.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며 수시로 학살했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고통이 짧으니 그나마 괜찮은 경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들이 잇따라 벌어졌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살극이 재연됐다. 도내에서는 이른바 ‘예비검속’으로 약 1,000명의 목숨이 희생됐고, 또한 불법적인 군사재판을 받아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약 2,500명의 제주도민이 인민군에게 쫓기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학살 당했다. 4·3무장봉기 당시 무장대 숫자는 350명에 불과했으나, 희생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9 가량인 무려 3만 명이었다. 중산간마을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고, 육체적·정신적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현재, 제주 4.3 연구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나?

연구자가 부족한 현실이 매우 애석하고 안타깝다. 대학에서 4.3에 관한 논문이 계속 나오길 희망하고 있다. 학문을 하는 곳에서 앞장서야 한다. 교사나 연구 집단은 제반 여건이 갖추진 곳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여건’ 이라고 표현한 것은 생계가 보장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지속적인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상태에서 지속적인 4.3연구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주위의 관심과 지지도 필요하다. 4.3에 대해 공부하면서 김종철, 송상현님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다. 내게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특히, 도움이 컸던 분들이 있다. 한국의 현대 사학자이며, 아시아역사연대 공동 대표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와 박명림 연세대 교수이다. 4.3을 현대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 분들이다. 두 분의 연구 성과들이 내게 큰 도움이 됐다. 한국 현대사 연구가 있었기에 4.3연구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고대사 등 다른 시기에 비해 한국현대사는 상대적으로 연구자들이 적은 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기이므로 상당히 중요하다.

4.3의 증언자들은 세월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니 이분들이 살아 있을 때,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야한다. 사람의 기억은 세월이 흐르며, 희미해지고 지워지기도 한다. ‘허접한 메모 한 장이 가장 좋은 기억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많은 피해자들을 만나서 듣고, 기록해 놓았던 것들이 4.3 공부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995년부터는 혼자 작업을 했고, 1999년도에는 외압을 받아서 중단되기도 했다. 올해가 4.3 70주년이라서 잠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그에 따른 연구 성과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은 해가 갈수록 커진다.

김종민 3 편. 다음 인터뷰 예고

남아 있는 질문

1.어떤 호칭으로 불리길 바라나?

2.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하여?

3.4.3은 말한다. 후속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4.피해자들의 치유에 관하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