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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오롯이 직면할 줄 아는 그녀에게 "위드유"
아픔을 오롯이 직면할 줄 아는 그녀에게 "위드유"
  • 김은애 기자
  • 승인 2018.04.17 1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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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들의 외침 “위드유] <6>달리책방 박진창아 대표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우리 사회를 넘어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미투(Me Too)’ 운동을 응원하는 마음이 제주의 동네 책방에 닿았다. 공감의 취지를 넘어 ‘너와 함께 하겠다’는 ‘위드유(With You)’라는 이름으로.

<위드유X제주동네책방> 프로젝트로 뭉친 5개 책방 이야기에 이어 '위드유'를 외치며 페미니즘 도서를 선별, 판매하는 제주동네책방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한림 바다 가까이에 위치한 달리책방 입구.

# 독서취향이 통한다는 것 = 행복을 공유한다는 것

한림 바다 가까이 위치한 달리책방.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에 종이 향기가 스며든다. 흡사 누군가의 비밀 서재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

신발을 벗고 달리책방 내부로 들어서서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걸으면 삐걱, 나무 바닥이 내는 마찰음이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입구 왼편에는 원목 책장이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는 햇살처럼 반짝인다. 온통 나무 속, 유리로 만들어진 샹들리에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묘하게 공간 속에 잘 녹아 있다.

입구 왼편에 있는 거대한 원목책장. 천장 윗쪽으로는 샹들리에가 있다.

“책방에 들어왔을 때 오감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포근하게 다가가길 바라며,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다 빚이에요. 하하.”

손수 만든 레몬차를 내어오며 달리책방 박진창아 대표가 유쾌하게 말했다.

그녀는 제주에서 태어난 제주 사람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을 대부분 육지에서 보낸, 반(半) 육지인이다. 제주로 다시 이주하기 전까지, 육지에서 그녀는 현재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박진창아 대표는 달리책방의 도서 뿐 아니라, 인테리어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육지에 있을 때부터 기획 일을 해왔어요. 조금 쉬어 가려는 마음으로 찾은 고향인데, 놀다 보니 에너지가 생기더라고요. 넘치는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까 고민하며 이것저것 시도해보았죠. 워낙 책을 좋아해서 ‘달리도서관’ 운영도 해보고, 다양한 책 관련 기획이나 전시도 진행해보았는데요. 마지막 종착지로 이렇게 책방을 꾸리게 되었네요.”

책방을 책으로 꾸민다는 것. 책방을 운영하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겠지만 박 대표에게는 그리 쉽지 않았다. 거대한 책장을 그녀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책들로 채운다는 것은 꽤나 긴 시간이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틈틈이 책을 읽는다. 좋은 책을 찾기 위해,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그녀가 선별한 책은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구분되어 서가를 꾸미고 있다.

오랫동안 기획자로 활동해온 그녀의 손길은 책방 곳곳에 닿아 있다. 비치된 대다수 책에 붙어있는 책 소개 메모가 그 증거다.

“저는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요. 좋은 문구에 밑줄 치다 보면 문구가 가슴 깊이 콱, 와 닿을 때가 있는데, 이 순간이 참 좋거든요.”

박 대표가 밑줄 치며 읽은 책 대부분에는 추천사가 적힌 메모용지가 붙어있다. 정겨운 손 글씨로 적힌 그녀의 추천사를 읽으며 서가를 탐방하는 것은 달리책방 손님으로서 만끽할 수 있는 묘미 중 하나다.

대부분의 도서에는 그녀의 추천사가 적힌 메모지가 붙어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책 사이, 그녀는 어떤 기준으로 책을 선별하는 것일까?

“독서가 오래되면 그만큼의 관록이 쌓여요. ‘이 책 참 괜찮을 것 같다’라는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거든요. 제가 아끼는 책 중 하나인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도 그렇게 인연이 됐어요.”

강릉의 한 동네책방에서 만난 이 책은 펜화로 꾸며진 소박한 그림책이다. 책의 작가는 20년 동안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비록 작은 구멍가게지만, 하나하나 펜으로 담아낸 정성은 박 대표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달리책방에서도 이 책을 판매하고 있어요. ‘그림책을 누가 사겠어?’라며 지극히 개인의 취향에 입각한 책 선정인데, 신기하게도 이 책을 찾는 분이 계세요. 멀리서 찾아오신 손님도 있고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같은 독서취향을 공유할 수 있음에 기분이 좋아져요.”

취향을 공유한다는 것. 일상에서 느껴지는 순간, 순간의 공유. 그 행복은 마약과도 같다며 박 대표는 웃었다.

그녀의 취향은 그래픽 노블과 웹툰 영역에까지 고루 닿아있었다.

# 페미니즘은 유행이 아니다,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박 대표는 자신이 ‘본 페미니스트(born Feminist)’라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페미니스트라는 것이다. 여섯 형제의 장녀로 살아온 그녀는 ‘아들을 낳아야만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 살아온 그녀는 어릴 적부터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를 스스로 제기해보곤 했다.

“10대 때부터 엄마에게 ‘아들과 딸을 왜 차별하느냐?’, ‘남녀차별 하지 말라’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8살 이후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여자라는 이유로 겪었던 부당함에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거죠.”

20대가 된 그녀는 여성단체에 들어갔고, 30대에는 페미니스트 저널의 기획자로 일했다. 40대에는 달리도서관을 개관하며 각종 강연을 기획했다. 이때 강연 주제나 강연자는 페미니즘과 무관하지 않은 이들로 섭외했다고 한다.

“늘 문제의식이 제 안에 있었어요. 의식하지 않아도 공기처럼 머물고 있었죠. 페미니즘도 그래요. 페미니즘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삶 자체, 현실이니까요.”

달리책방 한켠, 무심한 듯 세심하게 신경 쓴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박 대표는 “페미니즘은 유행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어 “페미니즘의 시초는 ‘여자도 인간이다’라는 한 문장이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은 ’여자도 인간이다, 그러니 인간의 권리를 달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요구예요. 지금도 그래요. 여성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 성 관련 범죄를 저지르는 거예요.”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도리어 따가운 눈총을 받는 현상을 보고 박 대표는 “현 사회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너무나 메말라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많은 여성이 자기 안에 비명을 삼키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여자의 직감과 예감은 생각보다 예리해요. 여성들은 모르지 않아요. 다만, 자신이 당했던 크고 작은 일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마음속 깊숙이 숨겨두고 꺼내지 않거나, 까맣게 잊은 척할 뿐이죠. 그러다 문득, 어떠한 계기로 툭 튀어나오는 기억은 그녀들을 더 아프게 할 거예요.”

화장실로 가는 길도 평범치 않다. 추천도서와 예쁜 일러스트가 눈을 즐겁게 한다.

박 대표는 미투 관련 뉴스를 접할 때면 늘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청춘을 다 바쳐가며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에 올랐음에도 성추행, 성폭력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 이 구조를 내부고발했을 때 오는 2차 가해들. 우리가 속한 이 세계를 여성들은 어떻게 견디며 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래서 미투, 위드유 운동이 참 반가워요. 고맙기도 하고요.”

정신없이 지나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떠한 계기 없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기란 힘들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 바쁘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에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페미니스트란 단어에 알러지가 있는 이들이 참 많죠. 그런데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면 돼요. 작은 관심 하나로도 충분해요. 제가 만든 페미니스트 독서클럽을 예로 들어 볼게요. 저희 모임은 굉장히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어요. 처음에는 자신이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았죠. 하지만 미투 운동에는 모두 공감해주셨어요. 그렇게 모임을 진행하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처한 불합리, 부조리에 대한 깊이있는 대화를 자주 나눴어요. 그러다보니 분위기가 조금 바뀌더라고요. 이제는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저는 페미니스트였네요”라고 말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달리책방 곳곳엔 박 대표가 추천하는 도서의 글귀가 적혀있다.

박 대표는 “자신이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지더라도 현실의 문제를 똑똑히 직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페미니스트가 지향하는바”라고 했다.

“말 못 하고 아파하는 분들께 ‘네 탓이 아니야’라는 말을 가장 먼저 해주고 싶어요. ‘미투’하지 못하는 당신도 응원하지만, 제가 ‘위드유’를 전할 수 있도록 혼자 아파하는 분들도 좀 더 용기 내 주었으면 해요. 그리고 사회의 추악한 단면에서 눈을 돌린 채,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부디 “왜?”라는 질문을 통해 정의를 함께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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