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7:38 (금)
“선과 악이 극단적으로 존재한다는 걸 4.3 취재 통해 느껴”
“선과 악이 극단적으로 존재한다는 걸 4.3 취재 통해 느껴”
  • 이겸
  • 승인 2018.04.0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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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의 기록자들] <1> 김종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상임대표

글쓴이 : 이겸(사진심리상담사, 여행과치유 대표)

 

올해는 제주4.3이 70주년 되는 해이다. 오늘(3일) 문재인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석해 국가를 대표해서 다시 한번 사죄의 뜻을 밝혔다.

4.3은 제주도의 아픔 이자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크고 슬픈 역사이다. 4.3 70주년을 맞아 추모행사와 예술행사, 강연과 문화활동이 어느 해보다 많이 열리고 있다.

필자는 그간 행사에 참석하고 살피는 동안 몇 가지 질문을 갖게 되었다.

“제주 4.3과 관련한 활동의 근간이 되는 기록을 만든 사람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4.3을 기록하고 연구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있는가? 기록은 어떤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가? 이러한 모든 활동들은 어떤 기록과 연구를 기초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4.3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언제 누가 시작하였으며 현재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미디어제주>와 함께 ‘4.3의 기록자들’이라는 타이틀로 연재를 시작한다.

가족과 함께 제주도에 이사를 온 지 7년이 되었다. 그간 4.3에 대한 무지로 인해 갖게 된 부채의식으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또한 중산간 마을에 살면서 동네 주민들에게 들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백지 상태로 돌리고 4.3을 처음 접하는 입장으로 돌아가 취재를 해가려한다. 아이가 선생님에게 묻듯이 4.3을 하나하나 묻고 듣는 행위를 할 것이며, 사진과 글로 기록을 남기려한다. 글은 가급적 딱딱하지 않게 쓰고 사진은 형식적인 인터뷰 사진을 피하고 현장의 분위기를 담으려한다. 제주도에서 느낀 4.3의 감정들이 기사에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큰 테두리에서 신문 기사의 속성은 지키겠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대한민국 현대사의 반인륜적 범죄인 4.3이 보다 널리 알려지길 희망한다. 필자처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제주 4.3에 대한 바른 인식이 시작되길 희망한다.

4.3을 말 할때는 잘 웃지 않지만 간혹 어렵게 표정이 밝아지곤 한다. ⓒ 이겸
4.3을 말 할때는 잘 웃지 않지만 간혹 어렵게 표정이 밝아지곤 한다. ⓒ 이겸

4월 1일, 김종민 대표의 연구실. 현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김종민 상임대표를 만났다.

연구실은 제주시 한복판에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되어 낡은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니, 천장이 낮은 복도가 나타났고 청소가 안된 커다란 전신 거울이 엘리베이터 옆에 붙어있다. 어두운 복도는 짧고 낮은 미로처럼 이어졌다.

미로의 끝에 연구실이 있었다. 간판이 없었다. 오직 ‘제주 4.3’만을 26년 동안 연구한 사람의 연구실이라니? 나도 모르게 숨을 내뱉었다. 어디에도 연구실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그 순간 4.3평화 기념관의 ‘백비’가 떠올랐다. 연관성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백비에 대한 충격이 살아나 지금 소환된 것이라 생각될 뿐이었다. 지인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연구실에 책들이 가득했다. 벽의 주인이 된 책꽂이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주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근현대사에 대한 서적과 각종 연구 자료들, 보고서들이 빼곡 했다. 여행서나 소설을 찾아보기 힘든 서가를 보며 김종민을 느끼고 있을 무렵, 책상에 커피가 놓였고 우린 마주 앉았다.

- 4.3은 시기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

“4.3의 시작은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입니다.”

그의 대답은 짧고 힘이 있었다. 연구자 특유의 건조함도 느껴졌다. 또한 이런 똑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얼마나 많이 반복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해야 하는 물음이고 대답인 것을 말이다.

제주4.3평화재단의 제주4.3사건 일지를 보면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봉기 발발. 350여 명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새벽 2시를 기해 제주 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 경찰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 사망’이라고 적혀있다.

또한 ‘1954년 1월 15일. 이경진 제주도경찰국장, 잔여무장대는 6명뿐이라고 발표. 4월 1일, 한라산 부분 개방. 산간부락 입주 및 복귀 허용. 9월 21일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라고 나와 있다.

나는 제주도에 이사를 온 이후 ‘제주 4.3’이란 단어를 수없이 접했다. 그러다 보니 익숙하게 되었고 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제주 4.3의 기간이 7년 7개월이나 지속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에 담고 있지는 않았다. 마치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났고 오래지않아 끝나버린 일 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제주 4.3’이 얼마나 길었는지 알고 있는지도 궁금해진다.

증언해준 상황을 떠올리며 '4.3은 말한다' 의 페이지를 펼쳤다. ⓒ 이겸
증언해준 상황을 떠올리며 '4.3은 말한다' 의 페이지를 펼쳤다. ⓒ 이겸

 

- 언제부터 언제까지 제주 4.3을 취재 하였나?

“1987년 여름에 제주신문 기자로 입사했다. 1988년 3월 12일 ‘제주 4.3 특별취재반’이 꾸려졌다. (제주신문이 폐간하면서 제민일보가 탄생하고, 4.3특별취재반은 제민일보에서 다시 가동된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해서였는지 합류하게 되었다. 2000년 10월 6일 마지막 연재 기사가 나갔다. 13년 동안 제주 4.3에 대한 기사를 매주 나갔다. 그때부터 나와 제주4.3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사회분위기상 모든 언론사에서는 꺼려하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보통 담당 출입처가 있기 마련이다. 해당 기관으로 가거나 자료를 얻거나 취재를 한다. 김종민 대표는 출입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출입처가 제주도 전역의 중산간 마을 이었다. 취재원도 마을 사람들이었다. 불에 타서 사라진 마을을 찾아 나섰고, 과거의 기억을 찾아 어렵게 사람을 수소문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정말 어렵게 만나 인터뷰를 하고 나면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 붙었고, 기사가 나가면 신문사로 항의 전화가 오기 일쑤였다고 전한다. 실명이 거론되고 입에 담기도 어려운 사실이 공개적으로 신문에 기사로 실리면 당사자의 가족으로부터 강한 항의와 질타가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기에 인터뷰는 기사로 나가기 전에 반드시 여러 차례 다양한 경로를 거쳐 검증을 해야 했다.

“금악국민학교 3학년때였다. 그날은 어쩌다 피하지 못하고 마을에서 나만 붙잡혔습니다. 토벌대가 ’마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느냐‘고 심문하는데 뿔불이 흩어진 마을 사람들을 낸들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른다‘고 하니까 그들은 새끼줄로 내 목을 묶고 먹구슬나무에 달아맸습니다. 목이 칵칵 막혀 금방 숨 넘어갈 것 같으면 내 발이 땅에 닿도록 느슨하게 풀어줬다가 또 다시 잡아당기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내 목숨을 아직까지 부지하게 된 것이 기적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1948년 4월 한림읍 금악리 고익조 중언. 4.3은 말한다. 2권 265페이지) 이 외에도 글로 옮기기에 참혹한 증언들이 많다.

- 제주 4.3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어떤 접근 방법을 추천할 수 있나?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이나 방송, 책이나 기사 등이 있다. 나는 그 중 제주 4.3평화기념관을 추천하고 싶다. 이곳엔 많은 전시물들이 있다. 자세히 알려면 끝이 없겠지만 그래도 잘 보려면 3시간은 걸릴 것이다. 특히, 전시물들을 설명하는 패널을 유심히 보면 좋다. 많은 자료들 중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적어 놓았다. 그리고 운율에 맞춰 적어 놓았다. 나는 관람객들에게 내용이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운율에 맞추어 패널의 글을 작성했다. 그래야 덜 지루하게 관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들으려는 사람이 있어야 말하려는 사람이 나타난다. 제주 4.3의 시작은 듣는 것부터 시작된다. ⓒ 이겸
잘 들으려는 사람이 있어야 말하려는 사람이 나타난다. 제주 4.3의 시작은 듣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겸

-취재 전과 후, 연구 전과 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이즘과 근본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생겼다. 자기 신념에 따른 맹목적 추종자들의 위험성을 보게 되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할 수 없다. 내게 평화와 인권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과정을 통해서 변화가 생겼다. 인간의 존엄과 인권 유린의 아픔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선과 악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한 인간에게 선과 악이 극단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4.3 취재를 통해 느끼게 되었다. 나는 내 주장과 다르더라도 타인을 인정한다. 내 가치관이 옳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모진 행동을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김종민 대표는 말했다.

취재의 경험을 듣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놀랐다. 인간이라고 칭할 수 없는 잔혹한 존재들의 이야기였다. 당사자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매우 슬픈 현실이다. 상상하기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반복적이고 구체적으로 묻고 들어야 했던 심정은 어땠을까? 김종민 대표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종종 멍한 표정이 되곤 했다. 특히 증언을 전할 때면 그랬다. 초점 없는 사람의 표정이 될 때 나와의 인터뷰 시간 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나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트라우마가 전이 되어 고착화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4년 전, 4월 3일에 혼자 너븐숭이 4.3 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때 단체로 방문한 제주도 대학생들을 만났다. 여러 학과가 연합하여 방문했다고 했다. 나는 제주 4.3에 대해 물었다가 뜻밖의 대답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한 학생은 고등학생 때까지 집과 학교에서 4.3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해본적도 배운 적도 없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학생이 이런 상태라는 것이 놀랍고 씁쓸했다.

제주 4.3의 역사의 아픔이 공교육에서 폭넓고 자주 다뤄지길 희망한다. 글·사진=이겸(사진심리상담사, 여행과치유 대표)

'4.3은 말한다'는 현재 5권까지 나왔지만 후속 작업을 진행 중이다. ⓒ 미디어제주
'4.3은 말한다'는 현재 5권까지 나왔지만 후속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겸

 

제주 4.3의 기록자들.
김종민 편. 다음 인터뷰 예고


남아 있는 질문

1.어떤 호칭으로 불리길 바라나?
2.현재, 제주 4.3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나?
3.제주 4.3 연구자들은 어떻게 육성되고 있나?
4.제주 4.3 피해 현장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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