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00:04 (금)
그날의 고백 "우리는 아직도 아프다"
그날의 고백 "우리는 아직도 아프다"
  • 김은애 기자
  • 승인 2018.04.03 1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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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추념식을 찾은 4∙3희생자유족 및 피해자들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기억에 그들은 아프다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4∙3, 그 이름만 들어도 목이 콱 메어 가슴을 치는 이들이 있다. 70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그들에게는 4∙3은 현재진행형이다.

4∙3추념식을 찾은 4∙3희생자유족 및 피해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10월 13일 총 맞아 오빠가 죽은 날, 그날이 내 생일이었어”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김순여(여, 74세)

김순여씨는 10월 13일, 자신의 생일에 오빠를 잃었다. 자신은 다리에 총을 맞아 걸을 수 없게 됐다.

“어머니 등에 업혀있다가 총에 맞았어. 그때가 세 살이야. 나는 다리에 맞았는데 그때 이후로 장애를 얻었지.”

세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길을 가다 총을 맞은 김순여씨. 그녀를 업고 있던 어머니는 허리에 총을 맞았다.

“어머니는 다행히 허리에 맞아 살았는데, 오빠는 죽었어. 오빠는 아홉 살이었는데, 그렇게 돌아가신 거야. 그날 이후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어. 재수가 없었지. 태어난 건 멀쩡하게 잘 태어났는데, 시대를 잘못 만나서 다리 한쪽이 자라지를 않아. 걷지도 못해.”

세 살배기 아이는 이제 74세 할머니가 되었건만, 그녀의 발은 아이처럼 자그맣다. 그날 이후 자라지 않는 자신의 발을 보며 그녀는 울었다.

“10월 13일 총 맞은 날, 그날이 내 생일이야. 남들은 생일이라고 하면 좋아라 하는데, 나는 싫어. 집은 불타고 오빠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통으로 한평생을 살았어.”

어머니 살아생전 단 한 번도 그날의 기억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다는 그녀. 어린아이에겐 감당하기 버거운 비극이었다.

“어머니는 날 보고 미안해서, 난 가슴 아파서 그날 이야기는 할 수가 없어. 결국 한 번도 가슴 속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하고 돌아가셨지. 이제 내 남은 인생이 얼마인지 몰라. 여기 온 할망, 하르망 다 80세, 90세 어르신들이야. 걷기도 힘들어. 지팡이 짚고 겨우 버스에 탔는데, 왜 왔겠어. 한이 맺혀서 그래.”

김순여씨의 소원은 예쁜 구두 신고 산책 한 번 해보는 것. 누군가에겐 너무나 쉬운 일상이, 그녀에게는 평생 이루기 힘든 꿈이 됐다.

 

# “새벽에 잠자고 있던 마을 남자들, 다 끌고 가 죽였어.”

서귀포시 동홍동 박진언(남, 71세)

박진언씨의 아버지는 당시나이 38세, 제9연대 군인에게 끌려가 부대 안에서 죽임을 당했다.

“원래 고향은 다호동이야. 지금은 용담2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지. 난 48년생이라 기억이 없어. 전해만 들었지. 제9연대 군인들이 새벽에 잠자고 있던 마을 남자를 다 끌고 갔대. 그때 마을에 남자가 있는 가구는 딱 10가구뿐이었어. 그렇게 끌려간 남자들 사이 우리 아버지가 있었어. 부대 안에서 사살하고, 사체는 가져가라 해서 시신을 수습했다 하더라고.”

살아생전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박진언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 손에 길러졌다.

“형 하나, 누님 하나 있었어. 형은 돌아가셨고, 누님은 한림에 계셔. 오늘도 누님 만나러 온 거야.”

아버지의 죽음 후, 힘든 삶을 살았다는 그. 가난에 배 곪았음은 일상이었다.

할머니 손에 길러진 그는 해병대에 들어가 월남전에 참전했다. 국가유공자가 되었지만, 고혈압과 피부병으로 지금까지 고생 중이다.

“난 중학교까지밖에 못 나왔어. 이후로 해병대 들어가서 월남 참전했지. 그래서 국가유공자 된 거야. 고혈압하고 피부병 때문에 지금도 고생하는데, 연금은 안 나와. 내가 지금 만 70세인데, 어서 4∙3특별법이 개정되면 좋겠어. 나 죽기 전에.”

박진언씨는 “고생했던 시절 다 말하려면 끝이 없다”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파란 하늘 아래, 서슬 퍼렇던 삶을 견뎌낸 그의 마음을 감히 어느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 “온 가족이 다 죽었고 나만 살았어. 나는 죽어지지도 않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손인순(여, 90세)

손인순씨는 4∙3 이후 온 가족을 다 잃고, 홀로 자랐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동생들 다 죽었어. 오늘 같은 날도 내가 억울해서 온 거야. 어머니 돌아가신 그 날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

평범한 날이었다. ‘밖으로 나오라’는 외침에 가족들은 순순히 나갔다. 그렇게 가족 모두가 변을 당했다. 집 앞에서 부모님이 총에 맞아 돌아가시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 손인순씨. 잔인했던 피 냄새를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그때 20대였어. 머리가 어느 정도 컸을 때지. 전부 기억나. 매를 엄청 맞았어. 그때는 사람만 보면 때리는 시절이었으니까. 매 맞는 게 당연한 줄 알았어.”

길을 걷다가, 밭에 가다가, 시장에 가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매질을 당했다는 그녀. 그때 맞았던 상처는 흉터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후 어떻게 살았느냐고? 그럭저럭 동냥하면서 살았지. 부모도 없으니 남의 집 들어가서도 살고, 남을 부모로 생각하면서 살고, 이후 결혼해서 살았어. 전에는 내가 당한 게 잘못된 건지 몰랐는데. 이제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는 건가? 전에는 다 잡아갔거든.”

‘세월이 변했다’고 몇 번이고 손을 잡고 안심시켜드린 후에야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전에는 밥도 잘 먹고 살았는데, 이제 밥도 잘 못 먹어. 억울해. 죽어지지도 않고 고생을 너무 많이 했는데… 그래도 자식들은 다 잘 키웠어. 그거 하난 잘했지. 그 덕에 살아”

그녀의 남편 안흥조(남, 88세)씨 역시 4∙3 이후 형제를 잃었다. 같은 아픔을 간직한 그와 그녀는 평생을 한으로 살았다.

 

4∙3으로 인해 스러진 목숨은 약 3만명으로 추산한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 가난과 후유증으로 눈물 흘리는 유족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한 피해자 수까지 합산한다면 그 규모는 훨씬 크다.

이들의 아픔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아픔을 넘어 평화와 상생으로’라는 제주 4∙3 70주년의 목소리는 아직 이들에게 닿지 않았다. 아픔을 외치는 이들뿐 아니라, 숨죽여 울고 있는 이들에게도 정의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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