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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진은 다른 곳보다 품계가 높은 장군이 관리
명월진은 다른 곳보다 품계가 높은 장군이 관리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7.12.25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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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30> 9진의 규모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전편에 9진이 언제 완성된 지를 살폈다. 그런데 9진 시설의 규모는 책이나 그림마다 다소 다르게 나온다. 어느 쪽이 옳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번 지면에서 다룰 9진 시설은 일본 천리대학교도서관 소장본 《증보탐라지》를 중심으로 들여다보면서, 특별자치도로 나눠지기 전인 4개 시군체제 당시의 자료도 참고했다. 일본 천리대학교도서관 소장본 《증보탐라지》는 영조 41년(1765) 부임한 윤시동 목사가 구상해 편집한 문서로 추정하고 있다. 굳이 이 자료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탐라순력도》에는 그림 위주이며, 자세한 크기 등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화북진
예전 수전소였다가 숙종 4년(1678) 최관 목사가 설치했다. 성은 둘레가 608자이며, 높이가 10자이다. 1899년 편찬된 《제주읍지》에 따르면 성 둘레는 606자, 높이는 12자로 나왔다.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고, 그 위에 초루가 있다. 성 안에 물이 없어 성 서쪽으로 10보 남짓한 거리에 인수샘이 있다. 성 안에는 군기고와 객사, 북쪽 성 위에는 망양정이 있었다. 객사를 환풍정이라고도 한다. 영송정은 진성 밖 포구 머리에 있다. 드나드는 배를 점검하는 곳이다.

△조천진
《증보탐라지》에는 조천진이 언제 설치됐는지 알 수 없다고 나왔다. 성은 둘레가 428자이며, 높이가 9자다. 성 안에는 샘이 없다. 성 밖 수십 보 되는 곳에 3개의 샘이 있다. 조천관이 있다. 연북정은 이옥 목사가 성 안으로 옮겨서 들여놓았다. 이옥 목사 재위가 1589년부터 1592년 사이이기에 성 수축은 이옥 목사 시기 혹은 그 전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 안에는 마구간, 군기고 등이 있다.

△별방진
중종 5년(1510)에 장림 목사가 김녕방호소를 이곳으로 이설했다. 둘레가 2390자이며 높이가 7자다. 동쪽, 남쪽, 북쪽 세 곳에 문이 있다. 《증보탐라지》엔 동·남·북 3곳의 문이 있다고 돼 있으나 이에 앞서 1702년에 간행된 《탐라순력도》에는 동·서·남 3곳에 문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구좌읍 하도리에 가면 서문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고, 옹성 형태의 성곽 흔적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증보탐라지》는 서문을 북문으로 잘못 표기를 한 것 같다.

문 위에 초루가 있다. 샘 두 곳과 우물이 있다. 객사는 3간이며, 군기고가 4간이다.

9진 가운데 품계가 가장 높은 만호를 두도록 했던 명월진. 탐라순력도 '명월조점'의 일부. 미디어제주
9진 가운데 품계가 가장 높은 만호를 두도록 했던 명월진. 탐라순력도 '명월조점'의 일부. ⓒ미디어제주

△수산진
성 둘레가 1264자이며 높이가 16자이다.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다. 객사는 3간이며, 군기고가 3간이다. 우물과 샘이 없고, 봉천수 한 곳이 있다.

△서귀진
선조 22년(1589) 이옥 목사 때 이설했다. 둘레가 500자이며, 높이가 6자다. 남쪽과 서쪽에 문이 있다. 객사가 3간이며, 군기고가 3간이다. 현창이 있고, 영진창이 있다. 성 안에 우물이 있는데, 성 아래에부터 구멍을 파서 물을 끌어왔다.

△모슬진
숙종 4년(1678) 윤창영 목사가 동해방호소를 철거하고 옮겨 둘레가 335자이며 높이는 12자다. 동쪽에 문이 하나 있고, 문 위에 초루가 있다. 객사는 3간이며, 군기고도 3간이다. 성 안에 샘이 없다.

△차귀진
고려말 원나라 소속이었을 때 성을 쌓고 말을 기르는 곳으로 이용했다.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고, 문 위에 초루가 있다. 객사가 3간이며, 군기고가 3간이다. 중간에 우물이 하나 있다.

△명월진
중종 5년(1510) 장림 목사가 나무로 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 이경록 목사가 돌로 고쳐 쌓았다. 둘레가 3050자이며, 높이는 11자다. 동·서·남쪽 3곳에 문이 있고, 초루가 있다. 객사가 3간이며 군기고는 4간이다. 사창이 있고, 영진창도 있다. 성 안에 샘이 있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애월진
예전 목성이 있었다. 선조 14년(1581) 김태정 목사가 고쳐 지으면서 돌로 쌓았다. 둘레가 225보이며, 높이는 16자다. 남쪽과 서쪽에 문이 있고, 문 위에 초루가 있다. 객사는 4간이며 군기고도 4간이다. 성 안에 우물이 없다.

앞서 살펴봤듯이 9진은 기본적으로 객사와 군기고를 두고 있다. 또한 창고 건물도 존재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9진은 적을 대응할 수 있는 시설이었지만, 읍성과 달리 주변 마을 사람들이 함께 기거를 하는 공동운명체적 성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명월진이나 별방진 등 규모 있는 진성은 읍성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진성내에 우물이나 샘은 필수 시설이기도 했다.

각각의 진성은 조방장이 우두머리이다. 그러나 9진 가운데 명월진은 조방장보다 품계가 높은 만호를 두도록 했다. 진성에 주둔하는 병력은 조방장과 아울러 치총, 성정군, 유직군 등이 있었다. 《조선병제봉대총록(濟州兵制烽臺摠錄)》을 들여다보면 9진에 소속된 병력은 진성별로 차이가 난다. 병력이 가장 적은 곳은 차귀진으로 135명에 불과하지만, 별방진은 663명의 병력을 보유했고, 만호가 지휘했던 명월진도 515명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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