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7:52 (금)
일상의 조각모음
일상의 조각모음
  • 홍기확
  • 승인 2017.11.16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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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151>

글은 보통 술을 마셔야 나온다. 술 마시고 딴 생각을 하면 희한하게 글감이 나온다. 하지만 내 기억력은 대략 난감한 수준이라, 그 때의 생각을 그때 메모하지 않으면 술이 깬 후에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수필은 술필이고, 나는 수필가가 아닌 술필가다.

메모된 낙서를 한 편의 글로 옮기는 작업은 새벽에 한다. 머릿속의 생각이 춤출 때 빨리 손을 놀려야 한다. 생각이 손보다 빠른 건 당연하지만, 나는 떠오르는 파편을 최대한 빨리 글로 옮긴다.

글은 일반적인 작가들과 비슷하게 쓰고 싶을 때 쓰거나, 느낌이 왔을 때 쓴다. 결국 술을 자주 먹으니 메모는 엄청 많은데, 쓰고 싶을 때는 이보다 적으니 내 다이어리에는 여전한 메모들이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볼 때마다 써야지라고 생각하는데 자주 쓸 마음이 동하는 편이 아닌 게으름뱅이다.

몇 달째 세 번째 에세이집의 제목을 고민하고 있다. 첫 번째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두 번째 『느리게 걷는 사람』에 이은 책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큰 고민이 없었는데 세 번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구미가 당기는 제목은 『일상의 조각모음』이다.

컴퓨터가 느려지면 디스크 조각모음을 한다. 여기저기 있는 파일들을 정렬하고, 파편을 모아서 접근속도를 높이는 작업이다. 힐끗 보기만 하던 서랍을 정리하거나 먼지 쌓인 창고를 비우는 일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일상에도 조각모음이 가끔 필요하다.

일상의 조각모음이 필요하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인디언의 속담에 적절한 답이 있다.

“사람 마음속에는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있다. 두 마리 늑대는 늘 싸운다. 이기는 쪽은 어딜까?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다.”

사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 백 번의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한다. 이 때문에 수 천 년의 바둑판에 똑 같은 바둑이 없듯, 누구의 하루도 똑같은 하루는 없다.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하지만, 반복되는 부분은 적다.

평범한 일상을 추구하지만, 평온한 일상은 드물다. 뉴스의 사건사고들을 보더라도 모아놓으면 반복되는 기사지만, 당사자에게는 특별한 기사다. 수많은 인생지침서와 자기계발 책을 읽더라도 그와 똑같이 행동하지 못하고, 행동하더라도 같게 되지는 않는다.

결국 인디언 속담처럼 내가 먹이를 주는 일상이 모여 인생이 된다.

내가 근무하는 감귤박물관에 방문한 아이가 그네를 타고 있었다. 아이는 당당하게 ‘아저씨, 그네 밀어 주실래요?’라고 묻는다. 부모님은 잠시 어디를 간 모양이다. 나는 흔쾌히 그네를 밀어 주었다. 아이는 재잘재잘 입을 쉬지 않는다.

아이의 엄마가 왔다. 그때서야 자세히 내 얼굴을 본 아이가 대뜸 얘기한다.

‘아저씨는 행복해 보여요. 좋은 일 있어요?’

아이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툭하고 답했다.

‘보통은 슬픈 일보다는 즐거운 일이 많지. 그래서 자주 웃어. 그리고 슬픈 표정보다는 즐거운 표정이 나한테나 남한테나 보기 좋잖아?’

내 대답에 아이는 씽긋 웃었다.

옆의 엄마는 내 얘기에 생각에 잠긴 듯 아이의 다음 얘기들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는 인생이 짧아서 일상의 조각모음을 일찌감치 끝내고 다음의 일상에 돌입했다.

아이의 엄마는 인생이 길어서 아직 일상의 조각모음을 하는 중인가 보다.

나는 이 한편의 술필로 일상을 조각모음한다.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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