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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영토, 버려진 국민"
오키나와를 배반한 국가!
"버려진 영토, 버려진 국민"
오키나와를 배반한 국가!
  • 이규배
  • 승인 2007.08.13 1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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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배 교수 특별기고] 오키나와, 그 군사기지의 운명(1)

애초에 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니었다. 일본의 최남단 그 땅은 류큐(琉球)라 불렸고, 그곳에는 류큐왕조가 있었다. 고대 제주가 그랬던 것처럼이나…. 1700년대에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남긴 자국 지리서에도 류큐가 빠져있었으니 류큐가 일본 땅이 아니었음은 확실한 일이다. <참조 西川如見, '日本水土考', 瀧本誠一 편, '日本經濟大典', 제4권(東京: 明治文獻, 1966), 537쪽. 林子平, '三國通覽圖說', 山岸德平, 佐野正巳 편, '新編 林子平全集', 2(東京: 第一書房, 1979), 80쪽.>

#‘일본의 목젖’ 오키나와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1879년), 류큐는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군대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해 일본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때 바뀐 이름이 바로 오키나와이다. 엄연히 류큐(琉球)왕조의 전통을 이어가던 그들은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침략자들과 맞서 반대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류큐의 저항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일본도 거기까지였다. 류큐를 일본영토로 강제편입시킨 일본의 국가권력은 오키나와를 소중하게 다루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이 류큐를 강제병합했던 것은 오로지 군사적이고 전략적인 이유에 있었던 탓이었다.

1840년에 발생한 아편전쟁. 일본인들이 오키나와를 주목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의 다급한 상황에 대해서 일본인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 영국이 아편 금제를 범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침략했다. 영국이 일시적인 작은 이익을 획득하고 배상금을 받아내며 다섯 개의 시장을 양도받게 되자, 다른 서양인들도 그 기운을 틈타서 무역지대를 넓히고자 프랑스, 미국, 덴마크 등과 같은 서양제국도 우리 일본에 밀려들고 있다. …… 만약 서양 군대가 오키나와를 점령하게 되면 일본에 대한 커다란 재앙이 여기서부터 비롯될 것이다. …… 우리는 오키나와를 일본의 목젖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심히 염려하는 것이다.”   (高野長英, 「知彼一助」, 佐藤昌介 편, 앞의 '渡邊崋山' 高野長英', pp.353-354. 참조)

 

#기지로 전락한 오키나와의 참극

점령당할 수 없는 일본의 ‘목젖’, 오키나와는 그렇게 비쳐졌던 것이고, 일본의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편입은 그래서 강행된 것이었다. 오키나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일본의 국방방침(제정된 것은 1906.4)이 처음으로 개정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18년 6월이었다. 여기서 일본의 국가권력은 “적의 해군을 일본본토 근해 연안으로 끌어들여서 집중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비한 군사적 거점이 바로 오키나와였다. <田一次, '情報なき戰爭指導-大本營情報參謀の回想'(東京: 原書房, 1987), 15쪽. 참조>

일본의 정치권력은 국가적 필요라는 명분 하에 오키나와를 철저하게 군사기지화했다. 태평양전쟁에서 오키나와가 초토화될 정도로 집중공격을 당하고, 자국 군대인 일본군의 강요에 의한 집단자살을 포함하여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무참한 희생을 당한 것은 이처럼 강요된 군사적 운명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지독한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일본은 승전국 미국에게 영토의 일부를 떼어준다. 그것이 바로 오키나와였다. 오키나와는 주민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본의 국가권력에 의해 미국의 점령지로 버림받게 되는 것이다.

전시에는 국방이라는 명분 하에 군사기지로 철저히 이용당하다가, 전후에는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또 다시 희생양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때는 오키나와가 일본이 되기를 강요했던 일본의 국가권력은 이제 와서는 ‘외국’이 될 것을 강요하고 나선 것이다. 마치 일개 섬사람들의 운명은(오키나와 인구는 전체 일본인의 1%, 면적은 0.6%로서 제주도와 흡사한 구조)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 오키나와인들에게 있어 일본 국가권력의 배반은 너무나 쓰라린 것이었다.

한때는 ‘일본의 목젖’에서 미군의 ‘태평양의 요석(要石)’이 된 오키나와, 미군은 필요에 따라 주민들의 토지를 강제수용하면서 새로운 기지를 착착 건설해 나갔다. 오키나와 본토의 19%를 차지하게 되는 광대한 기지는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농락당하는 오키나와

그런 오키나와가 드디어 일본 본토로 복귀한 것은 1972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여전히 오키나와는 미국의 군사기지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오키나와 사람들은 전혀 예기치 않게 ‘죄인’이 되고 말았다.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 때도 그랬듯이, 그때 오키나와는 베트남 폭격을 위한 발진기지였다. 어느 날 눈을 들어보니, 오키나와인들은 자기 땅에서 이륙한 미군의 폭격기가 무고한 베트남 양민들을 살상하는데 이용되고 있음을 알았다. 본의든 아니든 오키나와는 가해자의 땅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키나와의 많은 단체와 양심적인 인사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는 폭격기의 폭음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베트남 종전과 함께 찾아온 ‘불안한’ 평화는 다시 걸프전쟁 발발과 더불어 사라져갔다.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군의 비행기들이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폭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키나와는 다시 피묻은 가해자의 땅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 개입한 세계 곳곳의 분쟁에서 전쟁수행을 위한 병참기지 · 전략기지로 전락한 오키나와, 그래서 오키나와인들은 가해자 의식에 사로잡히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밖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키나와 내부에서도 미군 그리고 군사기지로 인한 폐해는 너무 심각했다. 미군 병사에 의한 성폭행 사건과 각종 범죄, 헬리콥터의 대학 교내 추락사건, 전투기의 폭음, 농장 사격사건, 피탄사고, 장갑차의 민가 침범, 시도 때도 없이 상공을 날아다니는 미 공군기, 남북방향 기지로 인한 동서간 교통 단절문제, 기지의존형 기형적 경제구조, 자연생태계의 파괴 ……. 일상의 파괴로 인한 고통과 불안 그리고 분노, 오키나와는 그런 삶을 무려 반 세기 넘게 강요받아 왔던 것이다.

#줄어들 줄 모르는 군사기지

한 번 들어온 기지는 결코 줄어들 줄을 몰랐고 미군기지가 철수한 곳에는 일본의 자위대가 차지했으며, 기존의 미군기지가 반환되는 대신 오키나와의 다른 곳에 새로운 기지를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의 국가권력은 기지철수라는 주민들의 열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요하게 기지 건설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미군기지는 결국 일본 자위대의 기지라는 등식을 교묘히 활용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국가와 기지는 국민의 생명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빼앗아갔을 뿐입니다!”

신음처럼 흘러나오고, 때로는 절규에 가까운 이 증언은 오키나와인들이 온몸으로 체험한 삶의 고백이다. 제주도처럼 자그마한 오키나와, 그들은 기지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유린당하고 또 유린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지반대를 외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저항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것이다. (2편에 계속)

<이규배(탐라대 교수. 前 제주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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