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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의 섬’으로 이미지화된 제주, 사실은 ‘전쟁의 섬’
“‘관광의 섬’으로 이미지화된 제주, 사실은 ‘전쟁의 섬’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7.10.0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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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두 섬 : 저항의 양극, 한국과 오키나와’ 출간 이명원씨
“제주-오키나와, 비슷한 아픔 공유한 섬끼리 가까이 연대하기를”
최근 ‘두 섬 : 저항의 양극, 한국과 오키나와’를 출간한 문학평론가 이명원씨. 2014년 하와이 오하우섬 취재 때 모습. /사진=이명원씨 제공

 

“살암시민 살아진다.” 제주의 어르신들이 언젠가부터 입버릇처럼 되뇌이곤 하는 말이다.

 

비슷한 말이 일본 오키나와에도 있다. “낭쿠루 나이사(なんとか できる).” 일본 본토 말이 아닌 오키나와어로 ‘다 잘될 거야’라는 뜻이라고 한다.

 

최근 ‘두 섬 : 저항의 양극, 한국과 오키나와’ 라는 책을 낸 문학평론가 이명원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가 서울시내 모 처에서 <미디어제주>와 만난 자리에서 처음 말문을 열면서 이 얘기를 꺼냈다.

 

또 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을 일본 본토인들과 구분해 ‘시만추(しまんちゅ)’라고 한다. ‘섬 사람, 섬 주민’이라는 뜻으로, ‘섬(島)’을 일본어로 ‘시만(しまん)’이라 하고 ‘추(ちゅ)’는 오키나와어로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제주 토박이들이 본토 사람들을 ‘육지 것’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다.

 

책 머리말에서 그는 “한국과 오키나와는 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식민주의가 남과 북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양극이었다”면서 과거에는 이 ‘두 섬’이 ‘식민주의의 양극’이라는 관점에서 비극적으로 조망됐다면 지금은 ‘저항의 양극’이라는 역동적인 주체와의 실체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저항의 양극’이라는 관점에서 두 섬이 연대, 혹은 연합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면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담아 책의 부제를 ‘저항의 양극’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미디어제주>와 만난 자리에서 꺼낸 오키나와와 제주 얘기는 어떤 맥락일까.

 

그는 책의 제1부 ‘한국에서 본 오키나와’ 중 ‘해방 70년에 돌아보는 제주와 오키나와’에서 “현재 ‘관광의 섬’으로 이미지화된 제주는 사실 ‘전쟁의 섬’”이라고 규정했다.

 

1948년 시작된 제주 4.3항쟁이 사실상 한국전쟁의 국지적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4.3항쟁 당시 토벌 작전이 오키나와 전쟁을 포함한 태평양 도서지역에서 미국의 진공 작전이 제주에서 재현된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미 군사고문단의 개입 역시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라고 밝혔다.

 

각각 일본 열도와 한반도로부터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면서(저자는 이를 ‘격절(隔絶)’이라고 표현했다) 애초에 독자적인 왕국 질서를 유지했던 곳이라는 공통점을 들기도 했다.

 

그는 “본토 권력에 의한 지배와 복속에 따른 착취와 수탈의 경험이 오랜 기간 동안 오키나와인들과 제주인들의 ‘자기결정권’을 압살했으며 이후 본토에 의해 지속적인 차별을 강제당한 셈”이라면서 “이것은 반대로 섬 특유의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강화하게 만든 요소가 되기도 했을 것”이라고 추론해냈다.

 

일제 치하에서 제주인들의 도외(島外) 이민지는 대부분 일본이었고, 그 중에서도 지금은 이쿠노 구로 개명된 오사카부 이카이노 지역에서 집단 거주하면서 방직공장이나 군수공장 등에서 일했다.

 

4.3 항쟁 전후, 또 한국전쟁 직후에도 상당수의 제주인들이 밀항 등의 방법으로 제주를 탈출해 일본으로 이주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4.3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체험한 냉전적 반공주의와 분단 상황에서의 정치적 탄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주 행렬은 계속됐다.

 

오키나와도 상황은 비슷했다. 1900년 처음으로 하와이 이민이 시작된 것은 류큐왕국의 멸망이 근본 원인이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살아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노동 이민을 통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차원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두 섬 : 저항의 양극, 한국과 오키나와’를 출간한 문학평론가 이명원씨. 2014년 오키나와 게라마제도 도카시키섬 두 번째 답사 때 모습. /사진=이명원씨 제공

 

저자는 일제 당시 오키나와인들의 거주 구역이 조선인들과 유사한 곳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식민지 조선인들을 ‘조센징’이라 부르며 경멸했던 것과 비슷하게 오키나와인들을 ‘리키징’이라 부르면서 노골적으로 차별했다면서 이같은 차별의 단적인 예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과 일본 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가 자경단에 의해 살해당하는 와중에 오키나와인들도 조선인으로 오해를 받고 살해당한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다는 점을 들기도 했다.

 

이와 함께 그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과 오키나와 주민들이 1995년을 기점으로 ‘자기결정권’ 확립을 섬 전체의 목표로 간주, 기지 없는 평화의 섬으로의 투쟁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는 점을 대비시켰다.

 

그는 <미디어제주>와 만난 자리에서 “4.3과 오키나와전쟁이라는 비슷한 아픔을 겪은 제주와 오키나와가 더욱 가까이 교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이른바 ‘평화의 섬 연대’의 틀 마련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했다.

 

사학 전공자가 아닌 문학평론가로서 한국과 오키나와, 제주와 오키나와를 ‘섬’이라는 지리적, 역사적 공통점에 주목해 써내려간 그의 연구서가 주목되는 이유는 그가 얘기하는 평화의 섬 연대의 필요성이 갈수록 절실해지고 있기 때문 아닐까.

 

2017년 8월 1일 오키나와현 나하시의 아침. /사진=이명원씨 제공

 

<저자 약력>

 

1970년 서울 출생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2005년 성균관대 대학원 문학박사 학위 취득

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주요 저서 : 『타는 혀』(2000), 『해독』(2001), 『파문 : 2000년 전후 한국만학 논쟁의 풍경』,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2004),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 이명원의 한국문학 탐구』(2005), 『종언 이후 : 최일수와 전후비평』(2006), 『시장 권력과 인문정신』(2008), 『말과 사람』(2008),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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