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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흔한 도자기도 이 섬에선 나오질 않아요”
“아주 흔한 도자기도 이 섬에선 나오질 않아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7.02.1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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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3> 도자기가 생산되지 않는 곳

‘혁명’이라는 건 아무 때나 붙이는 건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신석기를 ‘혁명’이라고 부른다. 호주의 고고학자인 고든 차일드는 인류 역사에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인 인물이다. 그는 급격한 문화변동이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켜왔다고 주장한다. 그가 붙인 첫 번째 혁명은 ‘신석기혁명’이었는데, 원예농업과 유목이 발전함으로써 인류의 생계를 위한 토대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후 두 번째 혁명으로 ‘도시’를 갖다 붙이기는 했으나 여기서는 첫 번째 혁명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겠다.

 

고든 차일드가 말한 ‘신석기혁명’은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말한다. 그는 <다뉴브강 유역의 선사시대>라는 자신의 책에서 문화를 “토기, 도구, 장신구, 장례의례, 집의 형태로 구성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다름 아닌 토기다. 차일드는 토기의 발명을 두고 “인류가 화학변화를 적용한 최초의 대사건”이라고 말한다. 화학적 변화를 적용시킨 토기를 만들기 위해 인류는 숱한 실패를 경험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토기를 우습게 바라보지만, 토기는 결코 우스운 유물이 아니다. 분명 ‘대사건’이다.

 

토기를 말하라면 우리나라에서 제주를 빼놓으면 안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가 제주에서 발견됐는데, 그걸 ‘고산리식토기’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다. 마지막 토기도 제주에 있다. 바로 ‘고내리식토기’이다. 고내리식토기를 생산할 때는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한다. 다른 지역은 다들 도기를 만들어 쓸 때였음에도 제주에서는, 아니 탐라의 주요 그릇은 토기였다.

 

토기와 도기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1000도 이상 올라가야 만들어지는 도기와 그렇지 못한 토기의 차이점은 크다. 문화적 수준의 차이라고 해도 동시대에 토기와 도기의 사용은 그 간격이 너무 크다. 도기, 그보다 더 고열에서 만들어내는 자기는 어쩔 수 없이 수입을 해서 써야 했다.

 

그렇다면 제주에서 도기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답을 하자면 조선시대에 들어서다. 그것도 조선 중기는 돼야 도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생긴다고 연구자들은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때 도자기는 각 지역을 통해 중앙으로 전달됐다. 15세기 때만 하더라도 전국에 자기를 만들어내는 자기소(磁器所) 139곳, 질그릇을 생산하는 도기소(陶器所) 185곳이 존재했다. 쉽게 말하면 자기(혹은 사기)나 질그릇은 토산물이었던 셈이다. 어느 특정 지역에만 있던 게 아니라 조선 팔도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세종실록만 들여다봐도 전국 각지에 도기소와 자기소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 한 곳 없는 곳은 제주도였다.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은 궁궐이나 국가에서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금지하고, 나라 안이 모두 사기와 칠기를 쓰게 하소서.”<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1407) 1월 19일>

 

위 기사는 영의정이던 성석린이 태종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의 일부이다.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을 함부로 쓰지 말도록 하면서, 사기나 칠기를 대신하도록 했다. 하지만 제주사람들에게는 사기조차도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처럼 호사스런 그릇이었다. 사기는 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기, 도기, 놋쇠와 철은 생산되지 않는다. 쌀은 매우 적어 토호들은 육지에서 사들여서 먹고, 그게 역부족한 이들은 밭에서 나는 곡식을 먹는다.”

 

사기와 도기가 없다고 한 위 글은 제주에 유배를 왔던 충암 김정(1486~1521)이 쓴 <제주풍토록>에 담긴 내용이다. 충암 김정은 중종 15년(1520) 제주에 귀양을 와서 이듬해 사약을 받고 제주에서 죽음을 맞는다. 짧은 기간이지만 당시 충암의 눈에 비친 제주엔 그릇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던 모양이다.

 

자기소(磁器所)나 도기소(陶器所)는 그릇을 만들어내는 곳인데, 그릇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시설물은 가마였다. 충암 김정이 쓴 기록을 보면 제주에 그런 시설이 없었고, 그런 그릇을 만들지 못했다는 건 가마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가마는 한참 후에야 제주에 등장한다. 제주 관아에 있던 홍화각을 중창할 때 김진명이 쓴 ‘홍화각중수기’를 들여다보면 기와를 굽는 이들을 육지에서 데려왔다고 돼 있다. 이 때가 효종 원년인 1649년이다. 기와를 제주에서 만들지 못해서 기술자들을 데려올 정도였다. 그렇다면 당시에도 도기를 만드는 가마는 없었다는 말이 된다.

‘공마봉진’의 한 장면이다. 이형상 목사 오른쪽에 그릇이 보인다. 뚜껑이 있는 그릇인데, 관아에서 쓴 그릇 대게는 뭍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이제 <탐라순력도>로 돌아가보자. 이형상이 목사로 와서 <탐라순력도>를 작성할 때가 1702년이다. 1649년과 1702년이라는 간극은 50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형상 목사 때는 제주에서 도기나 자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가 쓴 <남환박물>을 들여다보면 답이 나온다. 그 책엔 “질그릇을 구워내는 게 심히 적다”고 써 있다. 이형상 목사 때가 되면 그릇을 구워내는 가마는 있었던 모양인데, 생산량이 무척 적음을 알게 된다.

 

<탐라순력도>의 그림엔 종종 그릇이 등장한다. 이형상은 제주의 최고관리였고, 그러기에 관아에서는 자기를 주된 그릇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자기는 도기에 비해서는 좀 더 높은 온도에서 만들어야 했고, 그런 그릇들은 육지에서 들여왔을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도 질그릇은 이형상 목사 때가 되면 제주에서도 조금씩 만들어진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겠다. 굳이 시기로 따진다면 18세기 전후가 되어야 제대로 된 질그릇을 제주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서민들은 어땠을까. 아마도 나무로 만든 칠기가 아니었을까. 도기나 자기, 혹은 사기로 불리는 그릇을 사용하는 건 그야말로 서민들에겐 ‘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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