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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일출도 감상하고, 온 김에 우도도 들여다보고”
“성산 일출도 감상하고, 온 김에 우도도 들여다보고”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7.01.1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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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2> 이형상이 우도에 간 이유는

제주의 말을 다룰 10소장 기초가 이뤄진 건 세종 때라고 했다. 세종 때 말로 인한 농작물 훼손에 대한 요구가 넘쳐나자 목장을 만들면서 10소장이 이뤄지게 됐다는 건 앞서 설명했다. 조선전기 때는 이런 10소장 체계가 유지된다.

 

그러나 10소장 체계가 줄곧 조선을 관통하지는 않는다. 늘어나는 등 변동이 생기곤 했다. 효종 때는 11곳으로 늘기도 했다. 그런데 말 관리는 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제주에 유배를 온 이건이 쓴 <제주풍토기>를 들여다보면 그 흔적이 보인다. 이건은 선조의 7번째 아들인 인성군의 셋째아들이다. 그런데 인성군이 광해군 복귀모임에 가담했다고 해서 유배를 당하고, 그의 아들도 유배라는 형벌을 받는다. 이건은 1628년(인조 6) 제주로 귀양을 오는데, 그때 나이가 15세였다. 이건은 자신이 겪은 제주생활 8년의 이야기를 <제주풍토기>에 담아냈다.

 

“말테우리는 매우 가난한 사람이다. 말을 사는데 힘이 미치지 못해 밭과 농사용 소를 다 팔고도 이것이 부족하면 솥과 농기구 등의 물건까지도 팔지 않을 수가 없다. (중략) 한번 이 일을 지내게 되면 풍비박산되지 않는 집이 없고, 원통함을 부르짖고 시름과 탄식하는 형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심지어는 구덩이를 메우고 계곡에 엎어져 죽는 자가 있을 정도이고, 그 일족 무리들은 말테우리를 죽여 그 역을 면하려는 자도 있다.”

 

이건이 <제주풍토기>를 쓸 당시는 인조 집권기였고, 말 행정은 각종 비리로 얼룩져 있었다. 기록을 보면 말은 소보다 값이 더 나가서 소를 팔고도, 집안에 있는 가재를 얹혀서 팔아야 했다. 말테우리 주변 가족들도 시달려서 말테우리를 죽이는 일도 일어나곤 했다.

 

이처럼 어지러웠던 말 관련 행정은 효종 때부터 서서히 정비된다. 10소장이 11곳으로 늘어나는 등 나라에서 관리하는 목장이 개편된다. 하지만 나라에서 관리하는 국마장은 점차 쇠퇴를 하고, 산마(山馬)가 늘어난다. 산마는 그야말로 산지에 그냥 풀어놓는 야생말을 뜻하는데, 군마로 이용하기에는 매우 좋았다. 그래서 산마장이 오히려 관심을 더 끌게 된다. 산마장의 핵심역할을 한 인물은 ‘헌마공신’으로 불리는 김만일이다. 다음은 <탐라기년>에 수록된 내용으로, 효종 9년(1658)의 일이다.

 

“목사 이괴가 조정에 아뢰어 산마감목관을 두었다. 처음엔 선조 경자년(1600)에 정의현 사람인 김만일이 자신의 가축을 번식시켜 말 500마리를 바치니 동서 별목장에서 길렀다. 그 공으로 김만일에게 오위도총관 벼슬을 내렸다. 그의 아들 김대길과 손자 김려 등도 말 200마리를 바쳐 산장에 풀어놓았다. 이괴가 이를 보고 조정에 아뢰어 대길을 감목관으로 삼을 것을 청했다. 임금은 그 자손에게 그 직책을 세습하도록 특별히 명했다.”

 

<탐라기년>을 들여다보면 김만일의 공이 커서 벼슬을 주고,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다면 김만일의 개인목장은 얼마나 컸을까. <조선왕조실록>엔 나라의 국마장보다 규모가 3~4배 컸고, 기르는 말도 1만 마리나 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형상 목사가 우도에 들어가서 말을 점검하는 모습을 담은 ‘우도점마’.

 

제주 본섬은 이렇듯 국영목장이 점차 쇠퇴하고, 김만일을 축으로 한 산목장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제주 본섬 외에도 말을 키운 곳이 있었을까. 있다. 바로 우도다. <탐라순력도>를 보면 우도에 말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다. 바로 ‘우도점마’라는 그림으로, 이형상 목사가 우도에 직접 들어가서 말을 점검하는 장면이다. ‘우도점마’엔 목자(말테우리)를 비롯해 23명이 262마리를 점검했다고 기록돼 있다. 우도에 목장이 설치된 건 이형상 목사가 제주에 내려오기 몇 해 전이다. 숙종 23년(1697) 유한명 목사의 건의로 우도에 목장이 만들어졌다.

 

어쨌건 우도 목장은 주변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던 모양이다.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내려오기 5년 전에 만들어진 목장인데, 이형상 자신은 자신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신설됐다는 얘기를 <남환박물>에 담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형상은 <남환박물>에 정축년에 우도목장이 만들었다고 써두고서도, 자신이 재임 중에 신설했다고 헷갈리게 만든다. 정축년은 1697년으로 앞서 유한명 목사 때였지, 이형상 목사는 제주에 없을 때다.

 

“수령과 백성들이 교대로 나를 찾아 간청하니 목장을 신설했다. 그러니 가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지나 들어서니 곁에 물이 있는데, 소들이 놀라 소리 지르자 물에 닿는 소리가 산을 찌르는 것 같았다.”<남환박물 ‘지도(誌島)편>

 

왜 이형상이 <남환박물>에 우도목장이 기존에 있었는데, 또다시 자신이 신설했다고 했을까. 신설보다는 우도목장이 확장됐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만큼 우도에서 기르는 말이 늘어났다는 표현으로 읽힌다.

 

이형상이 우도에 들어간 날은 음력으로 1702년 7월 13일이다. 날이 좋았던 모양이다. 이형상 목사는 이날 우도에 들어가기 앞서 성산일출봉에 먼저 들렀다. 새벽 5시께 성산일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거기서 내려온 뒤 곧장 우도로 달려가서 말을 점검한 것으로 나온다.

 

사실 <탐라순력도>에 기록된 이형상 목사의 순력 일정은 화북진성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화북진성을 순력한 날이 1702년 10월 29일이었고, 동쪽으로 한바퀴 빙 돌아서 제주성으로 돌아오는 건 그해 11월 15일이다. 그러니 우도를 둘러본 것은 별개의 순력에 해당한다. 아마도 성산일출봉을 보러간 김에 우도까지 들어가서 말이 잘 관리되고 있는지를 들여다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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