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8:27 (화)
소유냐, 존재냐
소유냐, 존재냐
  • 홍기확
  • 승인 2016.06.27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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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25>

# 부모라는 그림자

 19세기말 이원명(李源命)이 지은 야담집인 동야휘집(東野彙輯). 그 유명한 한석봉과 어머니의 ‘썰’ 이야기.

 석봉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석봉의 할아버지는 태몽으로(할아버지가 태몽도 꿔?) 중국의 서예가이자 정치가인 왕희지로부터 붓을 받는 꿈을 꾸었다. 할아버지는 석봉을 서예가로 만들 결심을 한다.
 석봉은 12세에 황진이와 로맨스로 유명한 아버지의 친구였던 서경덕의 소계로 영암의 ‘영계(瀯溪)’ 신희남(愼喜男)에게 글씨를 배우러 간다. 어머니는 석봉의 교육을 위해 평안도 개성에서 전라도 영암군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석봉의 당시 나이 12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15살이 되었다. 이제 석봉도 중학교 2학년. 글씨 배우러 간지 3년째다. 엄마가 보고 싶다. 중2병에 걸려서 그렇다. 덩달아 사춘기도 오고해서 엄마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엄마가 뜬금없이 배틀을 하자고 한다. 불 끄고 본인은 떡을 썰 테니, 자기에게는 글씨를 쓰라고 했다. 한 눈에도 떡 써는 게 쉬워 보인다. 중2병이 도질 것 같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결과는 석봉의 참담한 패배. 원래부터 공평치 않았다. 엄마는 시루떡만 수 십 년을 썬 달인.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떡 썰기는 어느 정도 글쓰기보다 쉬운 일 아닌가?

 엄마한테 혼났다. 글쓰기 연습 안 했냐고. 아직 멀었다고. 적잖이 삐졌다. 열나게 연습했는데 불 끄고 하자니! 불 끄고 엄마는 화장하고, 나는 글쓰기 정도 해야 공평한 시합이 아닌가? 엄마는 화장할 때 불 끄고 해? 떡 썰 때 불 끄고 썰어?

 아이에게 주는 이야기 첫 번째.

 석봉엄마가 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석봉이 비단 중2병에 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부모에게 섭섭한 경우도 많았었고, 많은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부모라면, 다 이유가 있다. 흔히 자식을 낳으면 어머니를 이해하고, 자식을 키우면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한다.
 부모라는 그림자는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에는 춥기도 하다. 하지만 그림자는 따라다닌다. 그 그림자는 가족이지만, 바로 자신이기도 하다. 그림자는 그 자체로는 자신의 신체에 어떠한 기능도 하지 않지만, 분명 그 자체를 따라다니며 보살핀다.


# 무지개의 색깔

 계속되는 석봉이야기.

 한석봉은 다시 영계 선생에게 갔다. ‘석봉필론(石峯筆論)’에 나온 글처럼 그는 왕희지의 난정서와 동방삭전 두 서첩을 놓고 오늘 한 글자를 쓰고 내일 열 글자 배우며 달마다 연습하였다. 이제 저절로 왕희지 글씨에 마음이 가 저절로 손이 놀려질 지경이다.
 주입식 교육. 무한 반복학습을 하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어쨌든 한석봉은 임진왜란 때 재임했던 그 유명한 선조에게 발탁되어, 과거급제를 못했음에도 글씨 하나로 벼슬을 얻는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헌책방에서 가면 있는 ‘천자문’을 써서 조선시대 서예교본의 표준을 만든다. 20세기의 어린 나도 그 천자문을 베껴 쓰며 서예를 배웠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금 석봉체, 즉 외교문서를 쓸 때 또박또박 쓰는 사자(寫字)체를 쓰지 않는다.

 아내를 처음 만난 20년 전 아내에게 물었다.

 “무지개가 몇 가지 색깔인지 알아?”

 물은 녀석은 상대에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지가 답변한다.

 “세상 사람들은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깔이라고 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정의한 거지. 사람들은 편하게 살려 하는지, 단순화하고 원칙을 만들고 법칙까지 만들어.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깔이 아니야. 셀 수 없는 색깔의 조합이지.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보려 하지 않는 것일 뿐.”

 아이에게 주는 이야기 두 번째.
 세상의 논리에 반복학습하지 말고, 세상이 주입하는 교육에 흔들리지 말 것.

 
# 소유냐, 존재냐

 칼릴 지브란은 그의 책, 『예언자』에서 말한다.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생명의 아들딸이다. 그들은 당신을 통해 왔지, 당신으로부터 온 건 아니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긴 하지만 당신에게 속해 있지는 않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지만 당신의 생각을 줄 수는 없다. 그들도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연구진이 동물의 지능을 알아보기 위해 15세 된 침팬지에게 4년에 걸쳐 수화를 가르쳤다고 한다. 140여 개의 단어를 알려주고 자기 생각대로 단어를 결합하게 한 것이다. 그러자 침팬지가 내 뱉은 첫마디는 이랬다.

 “Let me out!(나를 놓아줘!)”

 아이에게 주는 이야기 세 번째.
 나는 너를 소유하지 않는다. 너는 존재할 뿐이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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