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17:49 (목)
제주사람들의 묘
제주사람들의 묘
  • 고희범
  • 승인 2015.09.23 14: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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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55회 제주탐방 후기

제주의 풍수지리는 독특하다. 산세와 지질이 육지와 달라 외지의 풍수 전문가가 제주에 오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맥의 발원지인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이어진 360여개의 오름들이 제각기 독특한 형상과 성격을 지니고 한라산의 지기를 뿜어내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오름들마다 그 배치에 따라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의 역할을 맡고 있으니 육지의 어느 곳에서도 이런 산세를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풍수에서는 묘 뒷쪽의 현무(玄武)에 해당하는 산을 주산(主山), 묘 앞에 있는 산을 안산, 묘 앞쪽 멀리 있는 산을 조산이라고 한다. 왼쪽의 능선을 청룡(靑龍), 오른쪽 능선을 백호(白虎)라고 한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360여개의 오름들이 솟아있는 형상은 제주 특유의 풍수를 자랑한다.

풍수지리학에서 땅은 오랜 세월 화산활동과 지각 변동, 바람과 물의 영향 등으로 형성된 퇴적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형세에 따라 음양의 생기가 흐르면서 에너지가 발생해 모든 생물체를 양육하는 어머니 품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땅 속의 에너지를 유통시키는 지맥은 인체의 혈관과 같고, 산의 능선과 자락은 인체의 손과 발에 비유할 수 있다. 땅은 하천의 흐름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하천은 땅의 기운을 모아 혈(穴)을 맺게 해주는 것으로 인체의 혈맥에 속한다.

제주의 마을과 묘역은 대체로 오름에 기대어 들어서 있다. 한라산에서 솟아난 기운이 오름을 통해 마을 곳곳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하천은 혈맥으로서 마을 곳곳에 생동하는 기운을 안겨준다. 하천은 오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땅의 기운을 흐르게 한다. 물이 흐르지 않거나 수맥이 끊기면 땅의 살아있는 기운이 흐르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신영대 '오름과 풍수지리설' 중에서 인용)

호종단의 전설은 제주인들이 지맥과 수맥을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지역에 따라 시대적인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같다.

중국 송나라 왕(또는 진시황)이 지리서를 살피다가 탐라국의 지리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게 된다. 기운이 생동하고 맥의 기세가 힘차고 당당하여 이 땅의 기운을 받게 되면 앞으로 나라를 이끌 왕은 물론 걸출한 인재들이 끊임없이 나올 것을 우려한다. 당시 풍수사로 혈을 끊는 단혈(斷穴)에 뛰어난 복주(福州) 사람 호종단(또는 고종달)에게 탐라국에 들어가 인재가 나올만한 땅의 맥을 모두 끊어버리도록 지시한다. 호종단은 명당의 생혈에 침을 꽂아가면서 여러 곳의 지맥과 수맥을 끊어버렸다는 내용이다.

호종단의 전설에 등장하는 표선면 토산1리의 용천수 '거슨새미'. 구좌읍 종달리에서 토산리까지 모든 샘이 사라졌지만 '거슨새미'와 '노단새미'의 수신(水神)이 기지를 발휘해 단혈의 화를 면했다고 전해진다. <사진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제주의 명당들은 어떤 곳일까?

조선시대 제주로 귀양을 오거나,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기 위해 제주로 온 뒤 제주의 여인과 연을 맺고 일가를 이루어 입도조(入島祖)가 된 이들의 묘역은 신영대 교수(제주관광대)가 꼽은 명당이다. 신천 강씨, 양천 허씨, 군위 오씨, 풍천 임씨 입도조 묘가 그렇다. 제주 고씨 고전적, 제주 부씨 부유렴의 묘역도 명당으로 추천됐다.

# 고전적의 묘

제주시 해안동 '고전적의 묘'는 조선 현종 때 성균관 전적(종6품) 벼슬을 받은 고홍진의 묘다. 묘는 뒷쪽에서 어승생의 생동하는 기운을 받아 현무를 구성하고, 왼쪽의 청룡, 오른쪽의 백호에 해당하는 능선이 부드럽게 묘를 감싸고 있다. 앞으로는 생이오름과 남조순오름, 광이오름이 문필봉 형상으로 서 있고, 오른쪽에 검은오름, 자칫 힘이 약해보일 수 있는 왼쪽에 멀리 도두봉이 힘을 받치고 있어 문무백관이 도열한 듯 안산과 조산이 수려한 명당이다. 묘 아래쪽에는 '갈 지(之)'자 형태로 천천히 흐르는 실개천이 동쪽을 향해 뻗어 있다. 풍수에서 이상적인 형태인 구곡수(九曲水)에 해당한다.

물은 집터에도 영향을 미친다. 집 앞을 직선으로 빠르게 흐르는 물은 땅의 기운을 빼앗아간다. 도로도 물처럼 흐르는 것으로 본다. 마을 안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마을 안길이 직선으로 뻗어 있다면 마을 사람들의 성정이 거칠 것이라고 신 교수는 설명한다.

고전적의 묘 앞으로 오른쪽에서부터 검은오름과 민오름, 광이오름, 생이오름, 그리고 왼쪽 삼나무 숲 뒤로 도두봉이 늘어서 있다.

고홍진은 제주시 이호동 가물개 출신으로 풍수지리에 통달해 '제주 최고의 신안(神眼)'으로 알려진다. 의술의 좌수 진국태(1680~1745), 점술의 문영후(1629~1684), 풍채가 준수한 양유성(1684~1761)과 함께 '탐라4절'로 꼽히기도 한다. 고홍진은 제주에 유배온 간옹 이익의 문하에서 명도암 김진용, 문영후 등과 수학하고 제주 현지에서 치러진 문과에 합격했다. 성균관 전적(종6품)의 벼슬을 얻고 귀향했다. 제주목사 이원진이 제주의 풍속과 산업, 지리 등을 엮어 집필한 <탐라지>를 감수했다.

# 신천 강(康)씨 입도조 묘

신천 강씨 입도조는 전라감사를 지낸 강영(康永)이다. 조천읍 함덕리 봉소동(鳳巢洞)에 있는 묘역은 마을 이름에서 드러나듯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다. 지형이 아늑한 이곳은 묘 뒤의 지맥이 왼쪽으로 들어오고 수맥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신 교수는 멀리 서우봉이 조산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어 안산의 부족함을 보충해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오른쪽 백호맥이 왼쪽 청룡맥 보다 강하게 뻗어 장손 보다는 오히려 차손이 더 명망을 얻을 수 있는 자리라고 덧붙인다.

신천 강씨 입도조 강영의 묘. 묘역이 잘 꾸며져 있다.

강영은 전라감사로 있던 조선 태조 7년(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멸문의 화를 당했다. 신덕왕후 강(康)씨가 낳은 방번과 방석이 죽임을 당하면서 신덕왕후의 외척인 강영도 삭탈관직을 당하고 제주로 유배오게 된 것이다. 큰 아들을 육지에 남겨두고 조천읍 함덕리에 정착한 강영은 제주 고씨를 부인으로 맞아 세 아들을 낳았다. 조천서원을 세워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유학을 가르쳤다. 묘역 안에 있는 조천서원 건물에 배향됐다.

# 풍천 임(任)씨 입도조 묘

풍천 임씨 입도조는 이조정랑(정5품, 인사 실무 담당)을 지낸 임응창이다.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이 묘는 좌우의 청룡과 백호가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북오름, 주체오름, 어대오름의 맥이 이어지고 앞으로는 묘산봉과 입산봉을 안산처럼 두고 있다. 묘 앞 뒤로 암석들이 적절하게 자리해 기운을 돋우고 있다.

묘의 산담이 특이하다. 산담의 폭이 3m나 되고 다시 밖으로 성곽처럼 보이는 담을 네모 반듯하게 둘렀다.

산담은 방목하는 소나 말이 묘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죽음에 대한 제주인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산담은 죽은 이가 머무는 집이 울타리다. 묘 앞에는 동자석을 세워 죽은 이의 심부름을 하거나 재롱을 부려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 집을 드나들 때는 신문(神門)을 이용한다. 살아서 땅 위에서 생활하는 것과 죽어서 땅 아래서 쉬는 것이 별개의 일이 아니라는 제주인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 양천 허(許)씨 입도조 묘

수맥이 강한 구좌읍 종달리에 있는 양천 허씨 입도조 허손(許愻)의 묘다. 맹호포효형인 두산봉과 천마등공형인 지미봉의 좋은 기운과 유연한 기세를 따라 자리한 점진적 발복지다. 한라산에서 뻗은 지맥이 동거문오름, 손지오름, 용와오름, 은월봉으로 이어져 내린다. 묘역은 예사롭지 않은 소나무가 빙 둘러 서 있다. 다른 묘들과는 달리 음력 8월 1일이 지났는데도 벌초가 돼 있지 않아 출입이 쉽지 않았다.

고려말 밀질제학의 벼슬을 지냈던 허손은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제주도로 들어와 구좌읍 종달리에 은거했다. 그의 아버지 허흠(許欽)은 대제학이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자진했고, 형 허징(許懲)은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다. 두문동(杜門洞)은 경기도 개풍군에 있던 마을로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유신 72인이 이곳에 들어와 마을 동서쪽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 문밖으로 나가지 않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 군위 오(吳)씨 입도조 묘

군위 오씨 입도조 오석현(吳碩賢)의 묘는 성산읍 고성리 대수산봉 남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소가 편안하게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인 대수산봉의 소의 젖 부분에 해당한다. 주변의 대왕산, 은월봉, 두산봉 등이 혈자리의 힘을 보호하고 대수산봉의 맥을 이어받은 소수산봉이 아담한 모습으로 안산 역할을 하고 있다. 흘러내린 맥의 기운이 분명하고 양명한 땅 기운이 모여 자손대대로 번창할 자리라고 한다.

이 묘는 원래 고려말-조선초기 제주 특유의 무덤형식인 방묘(方墓, 직사각형 모양으로 돌판을 둘러 조성한 무덤)였다고 한다. 고려청자 등 귀중품이 부장됐다는 소문이 나면서 도굴꾼들이 묘를 훼손하자 봉분을 크게 만들어 보통 묘 보다 5배나 크게 조성됐다는 것이다.

오석현은 나주 영장(營將)으로 재직중에 세조가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차지한 뒤 성삼문, 박팽년 등 충신들을 무참히 죽이자 세조 1년(1456년) 제주도로 들어왔다. 성산읍 신양리에 살면서 도민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덕망이 높았다.

# 제주 부씨 부유렴 장군 묘

묘 뒤쪽의 현무의 생기가 왕성하고 낮고 포근한 지형에 맞게 청룡과 백호가 묘역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앞에 식산봉이 문필봉의 형태로 안산 역할을 하고 있다. 조산으로 성산일출봉과 우도봉이 자리하고 왼쪽으로는 멀리 지미봉이 있다.

식산봉 기슭의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장군석이라고 불렀다. 이 장군석이 이 묘의 정면에 서 있어 조정에서는 부씨 집안에서 장군이 나서 조정에 반기를 들게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장군석을 잘랐다는 것이다. 식산봉은 아름다운 처녀가 머리를 풀고 통곡하는 형상이라는 '옥녀산발형'이다. 옥녀의 미모를 탐낸 조방장이 옥녀의 연인을 죽인 전설도 전해진다.

부유렴(夫有廉)은 별방진 군관으로 무관직에 올라 훗날 조선시대 무신 정3품 당하관인 어모장군의 품계를 받고 제주의 경비를 책임진다. 아들 부세영도 무관직으로 어모장군에 이른다.

# 김녕 목지코지의 비보(裨補) 풍수

풍수에서는 지형이나 산세가 기운이 부족할 때 이를 보완하는 것을 비보(裨補)라고 하고, 흉한 기운을 눌러주는 것을 압승(壓勝)이라고 한다. 제주도 해안이나 마을 곳곳에 서 있는 방사탑(防邪塔)이 대표적인 예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 허한 곳을 보완하고 삿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비보풍수의 한 형태이다.

구좌읍 김녕리는 젊은이들이 일찍 죽어 단명한 데다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마을 오른쪽으로는 김녕해수욕장 동쪽으로 해안선이 길게 뻗어 백호는 강한 반면, 서쪽으로는 해안선이 밖으로 나가지 못해 왼쪽의 청룡이 약한 것으로 판단했다. 1937년 주민들이 마을 서쪽의 목지코지를 보완하기로 했다. 목지코지와 100여m 떨어진 여(물에 잠겨있는 바위섬)를 잇기로 한 것이다. 바위를 날라 바다를 메워나갔다. 돈 많은 마을 유지 한진석 씨 등이 돈을 내 완도에서 목도꾼들을 데려와 바위를 옮겼다. 3년 가까이 계속된 공사로 목지코지가 135m나 길게 바다로 뻗어나가게 됐다. 이후로 김녕리는 장수마을이 됐고 마을에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거 때가 가까워 오면 조상의 묘를 이장했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명당의 기운을 얻어 성공을 기대하는 것이 근거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참된 혈은 하늘에서 감추고 땅이 숨겨 오직 덕이 있는 사람을 위해 기다린다'는 풍수적 윤리관이 있다. 풍수의 목적이 발복(發福)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효와 덕을 중시하는 것이다. 제주에는 6대 명혈이 있다는데 그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풍수 전문가들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덕이 있는 사람을 위해 하늘과 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개인 보다는 공동체 정신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도 제주 풍수의 특징이다. 금장지(禁葬地)가 그것이다. 묘로 쓸 수 없는 곳을 정한 것으로 금장지는 대부분 명당에 속한다는 것이다. 산방산, 별도봉, 군산 등이다. 마을로 내려오는 맥에 묘를 쓰면 개인은 발복할지 모르지만 마을의 안녕을 깨고 재앙이 미친다는 믿음이다. 금장의 원칙을 어기면 자손들이 졸지에 병에 걸리거나 흉작, 화재, 파산, 패가망신 등을 당한다고 믿었다. 개인의 영달 보다는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우선하는 자세다. 이것이 제주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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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2015-09-23 16:22:09
글 잘봤습니다. 풍수에 능통하신줄 미쳐몰라수다. 홍재 형님이 풍수지리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