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21:53 (금)
외할머니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학교의 힘
외할머니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학교의 힘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9.22 0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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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제주·제주매일 공동기획] 공교육, 변화의 항해를 시작하다
<17> 제주형 혁신학교 납읍초

땅거미 내릴 때까지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

아름다운 학교에 질 높은 교육과정 보태지며

납읍초 찾는 ‘열풍’에다 행복도도 ‘상승기류’

 

취학자녀를 둔 요즘 부모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다. 아파트 단지에 위치한 대규모 학교를 선호하는 부모와, 작은 시골학교를 선호하는 부모. 오늘 이야기는 아담한 시골학교 운동장에서 내 아이를 원 없이 뛰어놀게 하고 싶은 부모와 분주히 이들을 맞고 있는 한 학교에 대한 이야기다.<편집자주>

# 기연이네 이야기

순 서울사람들인 기연(2학년)이네 가족이 납읍초를 알게 된 건 지난해였다.

“여행 중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학교를 보게 됐는데 다들 감탄한 거예요. 공원 앞에 있는 작은 학교.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래,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을 자연 속에서 보내는 기쁨을 안겨주자 했죠.”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학교에서 뛰노는 납읍초 아이들.

학교 정경에 반한 기연이의 외할머니 이인숙씨(73)가 제주행을 먼저 제안했다. 기연이네는 그렇게 지난해 봄 마을에 땅을 사고 여름쯤 집을 짓기 시작해 겨울, 마을로 이주했다.

“학교를 둘러보세요. 전국 어디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없어요. 내부 시설도 서울 못지않게 좋고. 학교에 갔더니 모르는 아이들이 모두 저를 보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아, 제대로 교육을 하는 곳이구나. 교장 선생님이 직접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하나하나 맞아주는 모습도 서울에서는 상상 못할 놀라운 정경이었죠. 혁신학교가 되면서 학교 밖 체험활동이 많아졌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어요.”

이씨는 납읍리로 이사 온 후 생활이 즐거워지고 주변의 모든 게 만족스럽다고 했다. “아파트에서 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요. 층간 소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곳에서 평화롭게, 아이들도 너무나 즐거워하고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네요.”

# 납읍초의 변신

한 때 납읍초는 위기의 학교였다. 1990년 학생수 급감으로 6학년 5학급이 편성됐고, 1991년 분교장 전환 대상 학교로 지정됐다. 급기야 주민들이 공동주택을 짓거나 빈집을 수리해 아이들을 데리고 이주해오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줄어들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집을 지은 게 세 번.

지금은 마을에 빈 집이 없다. 때문에 납읍초에 아이를 보내고 싶은 외부인들은 마을에 땅을 사 집을 짓고 정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앞서 보도한 경기도 양평군이 조현초등학교로 인해 공동주택단지가 늘며 지역에 활기를 얻고 있는 사례와 유사하다. 기연이네 집도 이런 경우다. 잘 살린 학교가 마을에 활기를 끌어오는 발전소가 된 셈이다.

사실 납읍초는 언제나 지금의 예쁜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예전에는 학생이 적었고 지금은 많아졌다. 그렇다면 차이는 뭘까.

기연이네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자연을 가까이에 두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 이는 사고의 변화다. 그리고, 학교에 좋은 선생님과 재미있는 교육과정이 생겨나면서 학생들이 ‘이 학교’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은 혁신학교가 가져온 변화다.

# 지금 이 곳은

납읍초는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제주형 자율학교인 ‘i-좋은 학교’로 지정 운영돼 왔다. 이어 올 초 제주형 혁신학교(다혼디배움학교, 이 역시 제주형 자율학교의 일환)로 선정되며 새로운 변화의 길에 들어섰다.

혁신학교가 되면서 교사들은 학교 본연의 모습 찾기에 들어갔다. 교사 개개인이 나눠 맡던 행정업무는 두 명의 부장교사들이 가져갔다. 일정 범위에서 수업 시수를 증감할 수 있는 자율성이 주어지고, 체험 위주의 외부활동을 장려하다보니 교사들이 수업 재구성에 들이는 노력만큼 아이들이 교실 수업에서 재미있다고 느낄 만한 장치들도 많아졌다. 행정업무가 없어진 선생님들의 시선이 아이들에게로 옮겨가면서 대화가 늘고 소통의 깊이가 깊어진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아름답기만 했던 학교에 교육 본연의 활동이 강조되면서 시골 학교 납읍초의 강점이 더 강해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전교생 138명 중 120명이 외지인이다. 전교생이 자꾸 늘자 교장실의 학생 현황판은 아예 접착 메모지로 학생 수를 표기하고 있다.

다양한 요구를 가진 학부모들이 그만큼 늘었지만 민원은 없다. 아이들이 학교 가는 시간을 즐거워하니 부모가 학교를 믿게 된 것이다.

덕분에 배움터 지킴이의 출근 시간도 오전 7시30분으로 빨라졌다. 1교시가 시작되기 전부터 서둘러 등교하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교문에 들어선 아이들은 매일 아침 친구들과 삼삼오오 학교 앞 금산공원에 오르거나 더러는 축구를 하거나 운동장 이곳저곳에 모여 대화를 나누며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서 납읍초의 풍경은 다른 학교보다 더 정겹다.

# 경미, 수현 쌤의 이야기

업무를 덜자는 말은 늘 있었지만 교사에 주어진 행정업무가 진짜 덜어졌을 때 교사의 행복지수가 이렇게 올라갈 줄은 몰랐단다.

납읍초의 수업 장면.

5학년을 맡고 있는 문경미 선생님은 우연히 혁신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평소 급진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다만 혁신학교로 가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선생님이 될까 그림을 그려보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선생님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다짐은 이루어졌다. 시간이 많아지니 아이들을 보게 되고 대화가 늘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차분해지고 서로 간에 오해가 줄었다. 수업지도도 훨씬 수월해졌다.

15년차인 양수현 선생님도 혁신학교로 온 이후 생활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예전에는 아이들에게 조용하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업무를 처리하려면 아이들이 조용해야 하니까요.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싸우기라도 하면 서둘러 해결하려고만 했네요.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속마음을 물어보게 돼요.”

양수현 교사는 2014년 이 학교로 왔다. 한 해를 보낸 뒤 2년차에 혁신학교를 시작했다. 교육철학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교사란 무엇인가. 혁신학교 첫 학기였던 지난 학기에는 크게 수업에 변화를 주지는 못 했다. 그러나 지난 여름방학 수업 순서를 섞어보며 나름 준비에 몰두했다. 이번 학기부터는 80분을 하나의 수업으로 묶는 블록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혁신학교는 그녀에게도 도전이다.

“밖에서 볼 때는 혁신학교가 되었다고 큰 변화가 있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교사의 행복도는 급격히 커졌죠. 교실에서는 변화가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고 아이들도 저도 느끼고 있어요.”

학교의 변화는 지난 15일 학교 현장에서 만난 5학년 현예지 양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예지는 문경미 선생님 반이다. 지난해에도 문경미 선생님 반이었다. 그래서 어느 학생들보다 혁신학교 지정 전과 후 같은 선생님에게서 나타난 변화를 가장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음...선생님이랑 이야기를 많이 해요. 작년에는 수업하기 전에 선생님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는데 지금은 수업 시간 전에도 선생님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얘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학부모 김희복씨.

같은 날 학교에서 만난 5학년 (진)현수 어머니 김희복씨도 학교에 깊은 신뢰를 표했다. 2000년초 시댁이 있는 이 마을에 정착한 후 세 자녀를 모두 이 학교에 보냈는데 혁신학교가 되면서 아이들에 대한 교사들의 관심이 급격히 커졌다는 이유에서다. 밝아진 아이들의 표정이 이를 방증한단다.

# 납읍초가 생각하는 혁신학교

2014년 3월 부임한 문명자 교장은 6년간의 아이좋은학교(제주형 자율 학교)의 마감을 앞두고 무얼 해서 학교를 살릴까 고민하다 혁신학교를 생각했다. 지난해 8월부터 혁신학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공부하고 연수를 받으며 준비에 들어갔다.

“처음엔 혁신이라는 말에 거부감도 있었지만 해보니 그래 혁신적으로 하자 했죠.”

교장으로서는 우선 학교 자체 축제를 줄이고 외부로 나간다는 방침을 정했다. 바깥 경험이 적은 아이들을 위해 교육청 등 외부기관이 주최하는 축제에 참여횟수를 늘렸다.

지난 한 학기 혁신학교를 운영한 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정 평가에서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으로 ‘책 바라기’ 시간을 꼽았다. 전교생이 주 1시간 스스로 책을 읽는 시간이다. 사실 별 활동도 없는데 이것이 가장 성공한 시간이 됐다. 교장으로서도 느낀 바가 많았다. 최근에는 아이들이 읽은 책 제목을 기록하고 한 줄 정도 메모를 할 수 있도록 책바라기 소 노트를 만들어 전교생에게 배포했다. 반응이 좋았다고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납읍초가 가장 성공적으로 꼽는 '책바라기'. 학생들이 스스로 책을 읽게 만드는 장치가 되고 있다.

문 교장이 생각하는 혁신학교의 개념은 단순하다. 수업혁신, 평가혁신, 학교문화혁신이다. 이중 가장 주목하는 것은 학교문화혁신이다.

“지금 여기 계신 선생님들이 이 곳에서 나갈 때쯤이면 다들 학년부장급 정도가 되거든요. 혁신학교를 경험한 선생님들이 다른 학교에 갔을 때 이런 수평적인 조직 분위기, 수업을 재구성하려는 용기와 노하우 등을 동료 교사들에게 전파하고 거기에 공감하는 선생님들이 늘어난다면 그것이야 말로 혁신학교로서 납읍초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올해 초 131명이던 학생은 다시 7명이 늘어 138명이 됐다. 초등학교 6년만큼은 아이들에게 자유와 자연과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학부모들이 이만큼이나 늘어난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시수가 남는 원어민 보조강사를 활용해 방과 후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을 만들고 아이들의 신청을 받았다. 어느 반은 전체 17명 중 14명이 수업을 듣겠다고 신청했다. 방과후 수업은 오후 5시까지 한다. 이 말은 곧 아이들 가운데 사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극소수라는 의미다.

대부분의 납읍초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 땅거미가 깔릴 때까지 남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다. 일부러 시골 작은 학교를 찾아온 아이들에게 사교육은 그다지 매력 없는 이야기다.

물론 그만큼 공교육이 아이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일들이 많아졌고 학부모와 아이들이 학교에 보내는 신뢰가 깊어진 만큼 어깨가 무거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제주매일 문정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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