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5 17:37 (목)
제주의 고인돌
제주의 고인돌
  • 고희범
  • 승인 2015.08.2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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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54회 제주탐방 후기

고인돌은 기원전 1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까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청동기시대의 여러 무덤 형식 중의 하나다. 고인돌에서는 사람의 뼈 조각이나 부장품이 출토돼 무덤으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집단적인 묘역에 대형 고인돌을 묘 표석으로 세워 위용을 과시하기도 한다. 집단의 결속과 단결을 다지기 위한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인돌은 유럽과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한반도에 분포돼 있다. 전 세계의 10만여기 가운데 40%에 이르는 4만여기가 한반도에 있고,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지방에 2만4천여기가 집중돼 있다. 한반도의 고인돌이 중국 동북부지역에서 전래됐다는 북방설과 동남아지역에서 왔다는 남방설도 있지만 한반도 자생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전 세계 고인돌의 40%가 한반도에 분포돼 있는 데다 중국 지역의 고인돌은 그 형식이 단순한 반면 한반도의 고인돌은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동검(銅劍)도 요동지방을 포함해 한반도 지역에서 독특한 형태인 비파형 동검들이 고인돌의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는 점도 한반도 자생설을 뒷받침한다.

제주도에는 80여기의 고인돌이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이 발견된 제주에서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제주에서는 주변의 발굴물들을 통해 기원후 3세기까지 고인돌이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제주의 고인돌은 국내의 고인돌과는 다른 특유의 형식으로 조성돼 있다. 크고 작은 돌을 고임돌로 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되 고임돌 자체가 무덤방이 되도록 한 것을 '위석식'(圍石式) 고인돌이라고 한다. 같은 위석식이기는 하지만 전남지방에서는 깬 돌이나 자연석을 고임돌로 쓴 반면, 제주의 고인돌은 판석을 고임돌로 쓴다. 제주만의 고유한 형식이어서 '제주식 고인돌'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가파도에 고인돌 90여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학계에서는 고인돌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가파도 고인돌의 규모로 볼 때 이런 정도의 대규모 고인돌 군락이 조성되려면 주변에 대규모의 집단이 거주한 취락지역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근 모슬포지역 등에서 대규모 취락지역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도 발견된 바 없고 고인돌도 대정읍 하모리에 하나 밖에 없다. 가파도 고인돌에서는 덮개돌을 다듬은 흔적도 없어 고인돌이 아니라 파도에 밀려 올라온 바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시 용담3동 사대부고 안에 있는 '용담동 1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잘 다듬어져 있고 시신을 안치한 뒤 판석으로 석실 입구를 막는 형태를 띄고 있다. 덮개돌 남서쪽이 트여 있는 모양으로 고임돌 5개가 덮개돌을 고이고 있지만 원래는 7개였던 것이 막음돌인 판석 2개가 유실됐을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은 긴 쪽이 270cm, 두께가 50~105cm로 여러 개의 판석을 병풍 처럼 둘러 지상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위석식 고인돌이다.

사대부고 교정 안에 있는 제주도 기념물 2-1호인 용담동 1호 고인돌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위석식 고인돌 외에 잘 다듬어진 판석 3~4개로 ㄷ자나 ㅁ자 모양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편평한 덮개돌을 얹어 탁자 모양으로 만든 '탁자식'(卓子式), 땅 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깬 돌이나 자연석 4~8개 정도를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은 얹어 바둑판 모양으로 만든 '바둑판식'(棋盤式), 땅 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고임돌 없이 덮개돌은 얹은 '개석식'(蓋石式)이 있다.

용담3동 주택가 한 가운데 있는 '용담동 2호 고인돌'(위 사진)은 3개의 판석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위석식 고인돌이다. 용담2동 주택가의 '용담동 6호 고인돌'(아래 사진)은 고인돌을 연구하는 이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제주식 고인돌이다. 판석 11개를 고임돌로 세우고 길이 360cm, 두께 105cm의 거대한 덮개돌을 받쳐놓았다. 이 지역의 최고 수장층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인돌은 수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임돌이 30도 정도 기울어졌다.

 

청동기시대 우리 조상들이 바위를 다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거대한 바위를 어떻게 고임돌 위에 올려놓았을까? 먼저 구덩이를 파고 고임돌을 세운다. 그 위를 흙으로 채워 비스듬한 경사를 만든다. 둥근 받침목을 바위를 옮길 방향으로 가로로 늘어놓고 밧줄에 묶은 바위를 받침목 위에 올려 잡아 끈다. 덮개돌을 고임돌 위에 올려 놓은 뒤 흙을 치우면 고인돌이 완성된다. 고인돌 조성 방법을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덮개돌에 밧줄을 걸었던 홈 자국 등이 있고, 덮개돌과 고임돌 사이 틈에 흙이 끼어 있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제주에는 세계 유일의 해중 고인돌이 있다. 제주시 애월읍 하귀2리 관전동 앞 바닷가 조간대에 있는 고인돌은 밀물 때는 바다에 잠기고 썰물 때는 완전히 드러난다. 덮개돌 아래 6개의 고임돌이 있는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덮개돌 아래 부분과 고임돌에 다듬은 흔적이 있고 고임돌을 받친 부분도 인위적인 작용의 흔적(아래 사진)이 보인다. 바다에 있는 점에 비추어 해신제(海神祭)와 관련된 제단이거나, 풍어를 기원하기 위한 기능을 지닌 것일 수도 있고, 바다에서 사망한 시신을 수장하기 위한 무덤일 수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997년 한 방송사의 촬영 도중 발견된 이 해중 고인돌은 제주도내에서 도 기념물로 지정된 고인돌 33기 중에 포함돼 있지 않다. 형태와 다듬은 흔적 등이 고인돌로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주변에 다른 고인돌이 없고, 관련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는 데다, 도내의 다른 고인돌과 같은 시기인 청동기시대에 조성된 것인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결국 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검증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학술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지형을 이용해 고인돌을 조성하거나 덮개돌의 형태가 특이한 고인돌도 있다. 제주시 외도1동에 있는 '외도동 1호 고인돌'(위 사진)은 경사가 심한 암반을 이용해 높은 곳에는 납작한 돌 2개를 고이고 낮은 곳에는 판석을 고인 위석식 고인돌의 변형이다. '외도동 2호 고인돌'(아래 사진)은 아치형으로 들려있는 바위를 덮개돌로 사용했다. 고임돌덮개돌이 두꺼워 지면에 닿은 부분에는 얇은 판석으로 고였다.

제주시 외도동과 애월읍 광령리 일대의 고인돌들은 고대 탐라의 이 지역 마을터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이 지역의 지배계급에 해당할 것이다. 이날 해설을 맡은 제주문화유산연구원 나정욱 조사연구과장은 "고인돌에는 시신을 일시적으로 두었다가 얼마동안 세월이 흐른 뒤 뼈를 다른 곳으로 옮겨 묻고 그 수장층 후손의 무덤으로 다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고인돌에 구멍을 파놓은 것들도 있다. '성혈'(性穴)이라고 부른다.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의 광령 3호 고인돌에는 덮개돌에 탁구공 크기 만한 성혈 62개가 빈틈없이 나 있다. 다산을 기원하는 신앙의 흔적이나 농경을 위한 별자리 등으로 해석된다. 이 고인돌은 높이가 서로 다른 두 밭의 경계인 돌담 위에 있다. 덮개돌은 반으로 쪼개져 경사면에 쓰러져 있고 밭 한 가운데 있던 것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고임돌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도 기념물 2-33호인 광령 7호 고인돌은 밭담 아래 처박힌 상태에서 기념물로 지정됐다. 마치 기념물 지정 이후에 밭 주인에 의해 훼손된 것 처럼 보인다. 뻘쭘하게 서 있는 안내판은 이 고인돌 주변에서 탐라형성기인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 유행했던 적갈색 토기편이 수습됐다고 전하고 있다.

나정욱 과장은 "귀중한 유적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제주도가 고인돌이 위치해 있는 부지를 매입하고, 아직 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은 고인돌도 울타리를 설치하는 것이 훼손을 막는 최소한의 조처"라고 말한다.

특히 문화재 발굴도 극히 소극적이다. 문화재가 발굴될 가능성이 있는 땅에 건물 등을 짓기 위해 땅을 파헤치게 되거나, 공사 도중에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될 경우라야 본격적인 발굴작업을 벌이는 '구제발굴' 방식이 대부분이다.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 선사유적지,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 유적지, 표선면 성읍리 정의관아터 처럼 공사와 관계없이 학술연구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술발굴'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고인돌은 대부분 사유지 안에 위치해 있다. 기념물로 지정하는 등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제주도가 부지를 매입하지 않은 탓이다. 고인돌의 훼손을 막기 위해 주위를 철제 울타리로 둘러 놓은 상태다. 사유지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약간의 공간도 없이 고인돌에 바짝 붙여 울타리를 설치해놓았다. 제대로 관찰을 하기는 커녕 사진조차 찍을 수 없을 정도다.

고인돌은 문화재로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자칫 훼손될 수도 있는 처지에 있는 유적들이 한둘이 아니다. 광령리의 한 고인돌은 숨쉴 틈 없이 좁은 철책 안에 가둬놓은 것도 모자라 고인돌 바로 아래쪽에 하수도관을 설치하느라 2~3m 땅을 파내기도 하고 안내판은 비닐하우스를 향해 서 있다.

고인돌 조성과 같은 시기인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암각화는 밭 축대로 쓰였다. 당시에 암각화 문화가 있었고 주변에 고인돌이 널려 있어 같은 시기의 유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림이 밖으로 드러나게 바위를 쓴 덕에 암각화가 묻히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조각된 그림은 방사형으로 선이 퍼져나가는 모습이어서 새가 날개를 펴 비상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하고 햇살이 비치는 모습 같기도 하다.

너무 먼 과거의 유적들이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너무 흔해서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인가.

유구한 역사는 우리의 자랑스런 뿌리이자 그 가치를 셈할 수 없는 자산이다. 청동기시대 이 땅에 살았던 조상들의 흔적이 철제 울타리에 갇힌 채 땅 주인의 눈치를 보고 있거나 포클레인에 짓밟혀 내동댕이쳐진 모습이 제주의 가치를 우리만 모른 채 제주도가 값싸게 팔리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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