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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화 파괴했으나 제주역사를 그림으로 남겨둬 다행”
“제주문화 파괴했으나 제주역사를 그림으로 남겨둬 다행”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7.2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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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 이형상 그는 누구인가
   이형상 초상.

<탐라순력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형상을 알아야 한다. 이형상 목사는 효종 4년(1653)에 태어났다. 효령대군 10세손으로, 호는 병와(甁窩)이다. 28세 때인 숙종 6년(1680), 문화에 급제하며 벼슬길에 들어선다.

그를 얘기할 때는 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들이 그의 주변에 널려 있다.

앞서 <탐라순력도> 첫 번째 이야기를 할 때 이형상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고 했다. 300여권에 달하는 저서 가운데 제주도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남환박물(南宦博物)>이 있다. <남환박물>에서의 ‘남환’은 ‘남쪽의 벼슬아치’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데, 조선의 최남단인 제주에 있던 벼슬아치가 제주의 갖가지 이야기를 쓴 책으로 이해를 하면 된다.

이형상 주변 인물 가운데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있다. 윤두서는 ‘어부사시사’ 등을 남긴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다. 또한 윤두서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외증조부, 그러니까 정약용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된다. 윤두서는 그가 그린 자화상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윤두서는 천문과 지리, 수학과 음악, 병법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드러냈다. 이형상에게 <남환박물>을 써보라고 조언한 이는 바로 윤두서였다. 그렇다면 윤두서와 병와 이형상도 무슨 관계가 있을 법하다. 윤두서와 정약용이 ‘인척’이라는 틀로 얽혀 있다면, 윤두서와 이형상은 ‘사돈’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윤두서는 이형상의 형인 이형징(1651~1715)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이형상과 윤두서는 학문을 교류하며 유대관계를 이어갔다. 이들의 유대관계는 후대의 정약용에게 영향을 미친다. 정약용은 자신의 외가였던 윤두서로부터 영향을 받은 건 물론이며, 윤두서의 사돈인 이형상에게서도 학문적 영향을 받게 된다.

이형상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박세당(1629~1703)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특히 이형상은 박세당의 아들인 박태보(1654∼1689)와 많은 교류를 했다. 이형상과 박태보는 한 살 터울이었기에, 박세당의 사상을 더 자세히 접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박세당은 주자학에 다소 비판적이었고 좀 더 민중에 근접한 사상을 펼쳤다. 그런데 이형상이 공부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박태보가 숙종 15년(1689년)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가 고문으로 숨지자 이형상은 충격을 받고, 벼슬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낙담한 이형상은 외직인 목민관으로 주로 활동하고, 어느 학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신의 길만 걸어간다.

그러다 이형상은 숙종 28년(1702) 제주목사로 내려오게 됐다. 때문에 <탐라순력도>라는 보물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됐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목사의 순력을 그림으로 표현한 <탐라순력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남환박물>을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윤두서가 써보라고 해서 시작된 <남환박물>은 제주와 관련된 백과사전이다. <남환박물>은 제주의 자연, 제주의 방어시설, 제주의 옛터 등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남환박물>은 제주목사에서 해임된 후 만들어지는데, 숙종 30년(1704)년 빛을 본다. 주위의 권유로 쓰게 된 <남환박물>을 들여다보면 이형상 자신이 직접 발로 디딘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관으로 지낼 날이 많지 않으므로 급작스레 지팡이와 신을 준비했다. 새벽 참에 떠나 40리를 가니 해가 뜰 무렵 한라산 기슭에 도착했다. (중략) 산 남쪽에는 초목이 겨울을 넘겨도 푸르다. 암벽 북쪽은 눈이 쌓여서 한여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관아에서 쓰는 얼음조각은 산허리에서 그것을 계속 얻는다. 5월에도 저고리를 입어야 하고, 8월에도 가죽옷을 껴입어야 한다. 지척간의 차가움과 더움도 이와 같으니, 세상살이의 더위와 추위 또한 어찌 말할 수 있으랴.”(<남환박물>의 ‘한라산 산행’ 중 일부)

이형상은 제주의 신당을 파괴한 대표적 인물이다. 신당 파괴 장면이 담겨 있는 <탐라순력도> 중 '건포배은'.

이형상이 생활하던 당시에도 제주도의 언어는 유별난 모양이었다.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제주어의 독특함도 설명했다.

“내가 제주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시끄럽게 뒤섞여 마치 일본 사람의 말과 거의 비슷했다. 시골 사람들의 말은 재두루미의 소리 같기도 하고, 바늘로 찌르는 소리 같기도 하여 더욱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반드시 서리들로 하여금 번역하게 한 뒤에야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남환박물>의 ‘풍속’ 중 일부)

이형상은 열정적인 학자임은 분명했다. 남인 계열이어서 정권과는 멀리 떨어졌고, 나름의 학문 토대를 만들기는 했다. 이런 학문이 정약용까지 이어지는 등 본격적인 실학의 시대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긍정 평가를 받을만하다.

그럼에도 그는 제주문화를 파괴한 인물로 회자된다. 그는 제주문화를 ‘음사(淫祀)’로 규정하며, 신당과 절을 파괴했다. ‘음사’는 조선시대 유교명분에 어긋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를 말한다.

어쨌든 그는 제주문화를 파괴한 일면을 지니고 있으나, 당시 제주사회를 알 수 있는 제주역사를 <탐라순력도>로 남겨뒀기에 긍정 평가의 대상도 되고 있다. 다음부터는 <탐라순력도>에 실린 그림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당시 역사를 훑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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