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0 10:04 (토)
“제주섬 서쪽 끝 마을에 새로운 수업이 시작됐어요”
“제주섬 서쪽 끝 마을에 새로운 수업이 시작됐어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6.15 2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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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제주·제주매일 공동기획] 공교육, 변화의 항해를 시작하다
<5> 무릉초·중학교

제주·서귀포시 모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학교
혁신학교 지정되며 의욕 넘치는 교사들 총집합
배움 위주 수업, 수평적 학교문화 ‘시동’ 걸어

 

무릉초 6학년 담임 김찬경 교사의 블로그(blog.naver.com/gt_chan)에는 첫 발령을 받은 이후 교사로서 그가 느낀 고민과 고뇌의 흔적이 기록돼 있다. 김 교사는 빈 시간을 수업 준비 대신 잡생각과 인터넷 서핑으로 의미없이 흘려보냈던 초창기 학교생활에 대해 “결코 군대에서보다 행복했다고 말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고 표현한다.

# 행복을 이야기하는 교사들

지난 9일 무릉초·중학교에서 만난 김찬경 교사는 그 시절, 그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교사로서 '자기계발'이 필요하지 않았던 학교 현장의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더 정확히는 교사의 역할을 단순한 교과 교육 전달자로 축소시킨 공교육의 틀이었다. 교과서 순서대로 내용을 설명하기만 하면 되는 교육 환경에서는 교사들이 구태여 교수학습방법 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더불어 학교에서 교사들간에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적은 것도 그를 놀라게 했다.

혁신학교의 동력은 교육의 본질에 맞는 교수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들의 열정이다. 무릉초 한 담임 교사의 책상에 꽂혀있는 교수법 관련 책들.

혼란스러웠던 김찬경 교사는 도망치듯 입대했다. 그리곤 그곳에서 대학 때 읽지 않았던 책들을 하나씩 찾아 읽기 시작했다. 협동학습, 핀란드 교육, 학급 경영. 좋은 선생에게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믿었고, 드디어 제주에 혁신학교가 추진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자 망설임없이 무릉초로 자원했다.

"(무릉초에 와서) 이틀 지내보고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담임 업무가 없으니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필요가 없어요. 업무가 줄어든 것만으로도 아이들과 수업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웃음)."

# 최서단 작은 학교에 시작된 변화

무릉초·중학교(교장 김규중)는 제주섬의 가장 서쪽에 위치해있다. 여느 시골이 그렇듯 대정 무릉 일대 주민들은 자녀 교육에 관심은 많지만 바쁜 생업으로 인해 방과 후 학습지도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더구나 제주시와 서귀포시 두 곳의 행정시 중심에서 40~50㎞ 이상 멀리 떨어졌다는 지리적 특성도 주민들의 학교 교육에 대한 기대를 더 크게 만들고 있다.

이런 최서단 작은 학교가 올해 첫 제주형 혁신학교(다혼디 배움학교) 중 한 곳으로 지정되면서, 공교육 정상화에 관심이 컸던 전교조 출신의 김규중 교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를 열고 있다.

“혁신학교는 특별한 수업을 하는 곳이 아니에요. 아이들이 이것을 왜 배우는지, 이것의 개념이 뭔지 제대로 설명해 교육의 본질에 한발 더 다가가자는 것일 뿐이죠.”(양수연 교사)

‘혁신학교’로서 현재 무릉초·중이 강조하는 교육적 목표는 ‘삶에 도움이 되는 공부’다. 이를 위해 무릉초·중은 전학년을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 중심의 주제통합 교육과정을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무릉초 6학년 학생들이 둥그렇게 배열된 책상에 앉아 선생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천체에 관한 수업의 경우, <별똥별 아줌마가 들려주는 우주 이야기>라는 일반 단행본 책자를 통해 우주에 관해 배우고(사전학습), 책을 쓴 작가와의 만남(국어), 우주와 별자리 그리기(미술), 계절별 별자리 알아보기 및 행성 찾기(과학), 별을 주제로 한 노래부르기(음악) 등의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전체적으로는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무엇을 가르칠까’보다는 아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도록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식을 익히는 데 한정됐던 전통적인 학력관을 부정하고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다시 출발하는 셈이다.

이를 위해 교사들은 교과서와 교과서 밖의 소재를 잘 활용해 교육과정과 수업내용을 재구성하고, 자발적인 수업연구와 수업공개, 참관, 협의의 과정을 통해 교수학습 방법의 질적 개선노력을 가져가고 있다.

특히 혁신학교가 교사-교사간, 교사-학생간 수평적 조직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학생자치활동도 활성화하고 있다. 전교생이 월 1회 모여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안과 행사에 대해 토론하고 공동체 놀이를 진행한다.

그러나 무릉초·중은 제주형 혁신학교 다섯 곳 중 유일한 초중 통합학교로서 난제도 함께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는 과목별 교사가 달라 교과 통합부터 쉽지 않다. 또, 당장 연합고사와 내신으로 이뤄지는 고입 시험이 있기 때문에 ‘본연의 배움’이라는 혁신학교의 가치가 입시에 눌려 교육 주체들의 협조를 끌어내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통합학교의 경우 교장, 교감 등 관리직 교사들의 출신 학교급별이 다를 경우 교사들 간 공감대 형성이 어렵거나, 다른 학교급 교사들 관리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 교사들의 열정은 이미 타오르기 시작됐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혁신학교의 바람은 먼 대정읍내에도 불어닥쳤다. 무릉초·중이 혁신학교로 지정된 이후, 담임 자율권 확대와 업무 감소에 따라 넉넉해진 시간을 수업 준비에 쏟아부으며 새삼 행복을 느끼게 된 건 김찬경 교사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릉초는 두 교시를 묶어 한 과목의 수업을 진행하는 블록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5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고은상 교사는 학교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로 ‘교사들간에 성장하려는 의지가 생겨난 점’을 꼽았다. “시간이 비고 담임에게 전적으로 자율권이 주어지니 휴일에 도서관에 가고, 학생심리나 교수법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또,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아이들의 말을 정성껏 들어주게 됐고요.”

4학년을 가르치는 양수연 교사도 “아이들에게 몰두하니 교사와 학생간 관계 맺기가 잘 돼 의사소통이 한층 쉬워졌다”며 “이제야 비로소 본연의 교육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예전에는 내가 수업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국가 수준의 교육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아이들만 생각하면 되니, 힘도 나고 진짜 선생님이 된 것 같습니다!”(김찬경 교사)

오랜시간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자문(自問)하고 준비해온 교사들이 제주도 최서단 땅끝마을 학교에서 새로운 교실의 탄생을 만들어내고 있다.

김규중 교장은 “교사들 간에 문화와 생각의 차이는 있지만 혁신학교에 대한 의지는 모두 같다”며 “혁신학교 중 유일한 초·중 통합학교로서의 이점을 교사와 학생 모두가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의지를 전했다.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제주매일 문정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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