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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어른들의 참 착한 거짓말
옛 어른들의 참 착한 거짓말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5.29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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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동화속 아이들 <3> 이춘희 글 「눈 다래끼 팔아요」
 

책은 참 좋아요. 가지고 있으면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책은 빌려보기도 하고, 사기도 하죠. 요즘은 서점에 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인터넷을 하며 클릭 몇 번으로 집으로 책을 배달시키는 시대가 됐네요. 하지만 인터넷서점은 재미는 없죠. 오프라인 서점은 책장을 넘기며 이 책 저 책을 고르는 재미가 있지만 인터넷서점은 그렇지 않죠.

예전엔 책을 가지는 게 쉽지 않았어요. 돈이 문제였으니까요.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친구 집에 있는 책을 빌려보곤 했어요. 공짜는 아니었어요. 그 친구 얼굴과 이름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데, 돈을 주고 빌려봤다는 건 기억에 선하네요.

특히 예전엔 전집이 참 유행을 했어요. 집에 돈이 좀 생기기 시작하자 들여놓은 게 전집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떼부터 위인전집, 세계문학전집 등이 책꽂이를 장식하기 시작했고 애써 친구 집을 들락거리며 책을 빌려볼 일은 없어졌죠. 그러고 보니 예전 전집은 오류도 무척 많았답니다. 기억나는 오류가 있네요. 위인전집 가운데 세종대왕과 관련된 책이었어요. 한글을 창제한 배경을 설명하는데, 큰일(?)을 치르면서 격자무늬 창살을 보다가 한글을 만들었다는 내용이었어요. 황당무계하죠. 어쨌든 오류는 있었지만 예전 없던 시절의 책읽기는 마음의 양식이 되고, 지금까지도 책을 즐겨 읽게 만든 배경이 됐어요.

그런데 책은 있으면 좋지만 간혹 짐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 많으면 버리는 대상이 돼 버리죠. 예전 전집은 수십년전에 고물상에 팔렸고, 지금도 서재에 있는 책은 간혹 사라지는 운명을 맞습니다. 얼마 전엔 서재를 정리하면서 책을 왕창 버린 적이 있어요. 그게 후회를 하게 만들 줄이야. 살다 보면 후회를 하긴 하는데, 책을 버리는 것도 거기에 포함이 되더군요. 정비석의 <삼국지>는 왜 버렸는지, 지금도 후회 대상입니다.

그 때 동화책도 사라지는 비운을 맞았어요. 초등생이던 두 아이는 중학생이 되면서 동화의 필요성이 낮아졌다고 할까요. 요즘시대에 필요한 여성상과 맞물려 글을 쓰려고 <종이봉지 공주>를 찾았는데, 없지 뭐예요.

큰 애한테 물었어요. “미르야, 종이봉지 공주 어딨는지 몰라?”

“버린 것 아니에요? 어린아이들 읽는 거라고 버린 것 같은데요?”

글은 써야 하고…. 뒤적이다 눈에 들어온 건 우리 옛 문화 시리즈인 ‘잃어버린 자투리 문화를 찾아서’의 하나인 <눈 다래끼 팔아요>랍니다.

누구나 어릴 때 한번 쯤 앓았을만한 병(病). 병으로 취급하기는 그렇지만 어릴 때 앓은 다래끼는 병(病)만큼 치명적이었어요. 어릴 때, 아이들은 모든 이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려면 기본적인 조건이 있답니다. 바로 겉모습이죠. 꾀죄죄한 모습을 보이기는 누구나 싫잖아요. 게다가 초등학교는 죄다 남녀공학인데 내가 좋아하는 이성에게 꾀죄죄한 모습을 보이는 건 그야말로 죄를 짓고 숨어지내야 하는 심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다래끼는 그런 어린이의 마음을 알아주려 하질 않지요. 늘 눈 위에 눈만큼 커다란 혹 하나를 붙여주니 말이죠. 그 때 ‘창피’라는 단어는 왜 그리도 가슴에 와 닿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때의 ‘창피’는 다래끼를 ‘병(病)’만큼 치명적으로 만든다니까요.

<눈 다래끼 팔아요>의 순옥이 눈에 생긴 다래끼. 순옥이를 생각하며 어릴 때 기억들을 끄집어내 볼까요. 제 어머니도 그렇고, 누나도 이렇게 말을 했어요. “돌멩이 사이에 눈썹을 놓고, 그 돌멩이를 누가 차고 지나가면 그 사람에게 다래끼가 옮겨 붙어.”

사실일까? 제 초등학교 때 그랬으니까요. 책 속의 순옥이처럼 돌멩이 사이에 눈썹을 넣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려요. 누군가가 그 돌멩이를 차기만을. 하나, 둘, …. 시간이 흐르고 보니 포개놓은 돌멩이 두 개는 어느 새 제각각이 되어 버렸어요. 길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찼던 게죠. 신기하게도 이후 다래끼는 말끔히 사라졌어요. 더불어 그 후론 제 눈에 다래끼라는 존재 역시 소멸되고 말았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다래끼가 생길 듯 하면 곧바로 눈썹을 뽑았거든요. 그러나 돌멩이에 숨지기는 않았어요. 괜히 남에게 옮겨 붙이는 게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었거든요. 나중에 보니 눈썹을 뽑는 일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사실이더군요. 속눈썹 뿌리에 생긴 세균을 뽑아내는 일이거든요.

순옥이의 눈썹을 할머니가 뽑는 장면.

<눈 다래끼 팔아요>의 순옥이는 저와는 달리 여자예요. 남자의 눈에 생긴 다래끼와 여자의 눈에 생긴 다래끼는 다르죠. 순옥이 입장에서는 다래끼가 ‘병(病)’보다 더 치명적인 병(病)이죠. 그 놈의 다래끼는 놀림감이 되고, 급기야는 동네방네 소문을 몰고 다니고야 맙니다. 순옥이 눈에 생긴 다래끼는 사라질 줄 모르고 더욱 커져만 가네요. 그 때 할머니가 내린 처방은 ‘눈썹 뽑기’랍니다. 제가 어릴 때 그랬듯이 순옥이도 자신의 눈썹을 돌멩이에 맡기곤 성공을 하죠.

순옥이 닮은 우리 애들이 있어요. 큰 애 눈에 다래끼가 한 번 난 적이 있어요. 그 후론 다래끼는 우리 애들과 인연이 없답니다. 바로 순옥이처럼, 아니 제가 어릴 때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썹 뽑기’를 한답니다. 대신 재미없게 하는 게 아쉽긴 하네요.

순옥이가 눈썹을 뽑아 몰래 돌멩이에 끼워넣는 장면이 익살맞게 그려져 있다.

우리 어릴 땐 “돌멩이를 차고 간 사람에게 다래끼가 옮겨간다”고 했으나 제 자신은 애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네요. “눈썹을 뽑으면 다래끼를 만들려고 한 세균도 함께 달아나거든.” 순옥이를 통해 다래끼에 얽힌 옛 사람들의 문화를 새삼 탐닉해보니, 제 자신이 너무 재미없게 산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래서 아이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아이에겐 “돌멩이를 차면 다래끼가 사라진다”는 옛 얘기를 들려주고 싶으니까요. 그건 바로 옛 어른들의 참 착한 거짓말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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