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0 10:04 (토)
내 딸들아, 너희들은 영원한 나의 어린이
내 딸들아, 너희들은 영원한 나의 어린이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5.12 09:0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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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동화속 아이들] <2> 로버트 먼치의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애 둘이 훌쩍 커버리니 예전처럼 동화를 들려줄 일이 없군요. 동화책을 손에 쥐고 애들에게 읽어주던 시절…. 햇수로 따지면 오래지 않은 일인데요, 왜 그리 먼 예전처럼 느껴질까요. 문뜩 예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간을 붙잡고만 싶은 건 물론, 시간을 되돌려 앙증맞은 어린 그 때의 모습을 지닌 애들을 품에 안고 싶어요. 그건 바로 언젠가는 애들이 내 곁을 떠나 버릴 것이란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 동화에 나온 이야기들을 들려줄 땐 마주보고 책을 읽어주는 게 아니라, 내 무릎에 애를 앉혔죠. 시선은 동화 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 자신이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애나, 똑 같습니다. 그래야 시선이 통일되고, 스킨십을 통한 교감이 이뤄진다고 하죠.

그런데 가장 읽기 어려운 동화책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쩔지 모르겠는데, 그 책만 읽으려면 울먹이곤 했죠. 그렇다고 펑펑 울거나 한 건 아닙니다. 말은 하되, 평상음으로 동화책을 읽어주지 못했다는 뜻이죠. 지금 그 책을 꺼내봅니다. 로버트 먼치가 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인간의 삶을 담고 있어요. 흥이 나는 것도 아니고, 흥과는 정반대인 우울한 것도 전혀 아니죠. 대신 거기엔 ‘인간의 냄새’가 있어요. 그래서 그 책을 읽노라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왜? 사랑이 담겨 있으니까요.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속의 주인공은 아기에서 출발해 어느덧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어머니의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는, 좀 진부한 이야기죠. 이 책은 노랫말로 시작해 노랫말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노랫말은 어머니가 이야기 속 주인공을 향해 던지는 사랑의 속삭임입니다.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있는 한
너는 늘 나의 귀여운 아기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속의 엄마가 아기에게 노랫말을 들려주고 있다.

어머니는 아기가 태어나자 이 노랫말을 들려줍니다. 품에 꼭 안고 이 노랫말을 들려줍니다. 낮에 실컷 말썽을 피울 때 그 놈의 아기를 ‘동물원에라도 팔아버릴까’라고 생각하지만 잠자는 평안한 얼굴의 아기를 떠올리며 어머니는 다시 이 노랫말을 들려줍니다.

아기는 좀 더 커서 십대 소년이 됩니다. 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음악을 듣고 다니곤 합니다. 그래도 소년이 잠들면 다시 어머니는 소년 곁에서 이 노랫말을 들려줍니다.

소년은 결혼을 한 뒤 어머니 곁을 떠납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을 만나러 먼 길을 갑니다. 그 아들이 사는 곳에 가서는 잠을 자는 아들을 확인한 뒤 그 노랫말을 다시 들려주죠.

엄마는 아들을 만나러 길을 나섭니다. 그러곤 아기가 어렸을 때부터 해오듯 노랫말을 들려주죠.

태어나서, 소년이 되고, 결혼을 한 아들을 찾아가던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 이젠 더 이상 이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더욱이 그 노랫말을 제대로 들려주지도 못할 정도가 돼버렸어요. 그제야 아들은 어머니를 이해합니다. 이젠 아들이 어머니를 안아주네요. 그러곤 노랫말을 들려줍니다.

사랑해요 어머니 언제까지나
사랑해요 어머니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은 늘 나의 어머니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를 가슴에 안고 노랫말을 들려주는 아들.

중학교 3학년이 된 큰 애(미르)는 이젠 내 무릎엔 없어요. 예전엔 둘째(찬이)가 차지한 무릎을 되찾겠다고 나서기도 했지만 이젠 그럴 생각은 아예 없는가 봐요.

이젠 내 무릎은 둘째 세상입니다. 중학교 1학년이지만 틈만 나면 내 품에 들어옵니다. TV를 볼 때, 어딘가 눕고 싶을 때 아빠의 두 다리가 보이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차지하죠. 아빠가 서재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때도 무릎에 슬쩍 들어오는 애입니다. 그러나 첫째가 아빠의 무릎을 떠났듯이, 둘째도 언젠가는 아빠의 무릎을 떠나겠죠. 그러면 내 무릎은 허전해져 시려가겠죠.

중학생인 애들, 그래도 올해 어린이날을 챙겨준답시고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나가고 외식도 하곤 했지만 어린이가 아니어서 좀 아쉽네요.

3년전이군요. 어린이날에 집안 일이 겹치면서 그 날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때가 있죠. 그래서 약속을 했답니다. “미르야, 넌 영원한 아빠의 어린이야.”

애들을 아빠의 영원한 어린이로 남기고 싶지만 행동은 그렇게 잘 되질 않아서 문제군요. 그래서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의 노랫말을 다시 새겨봅니다.

미르 찬이, 너희들을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희들을 사랑해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들은 늘 나의 귀여운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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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땅 2015-05-12 11:47:42
여러 해 전, 사서인 각시가 빌려와서 꺼이꺼이 울며 읽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제가 근무하는 요양원의 어르신들께 읽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오늘 다시 책장에서 꺼내, 눈물 쏟으며 읽어야 겠습니다.
농촌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하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아니, 찾아가서 한번 안아 드리고 와야 하겠습니다.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부모의 마음 2015-05-12 10:34:52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중학생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의 마음과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교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