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7:33 (금)
아이들은 어른보다 존귀한 존재
아이들은 어른보다 존귀한 존재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5.08 14:02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형훈의 동화속 아이들] <1> 김리리의 '검정 연필 선생님'

새로운 연재물을 내놓으려 합니다. 아이들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을 곁에서 지켜보고 쓰는 게 아니라 동화를 읽으며, 그 동화속에 담긴 주인공들의 생각을 풀어놓을 계획입니다. 이름은 이렇게 정했어요. 부끄럽게도 ‘김형훈의 동화속 아이들’이라고요. [편집자 주]

 

첫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엊그제 어린이날이 지났군요. 매월 5월 5일 단 하루가 어린이날이죠. 5월 5일만 되면 사람들은 그러죠. “365일이 어린이날 같아라”라고 말이죠. 과연 그러기나 한 것일까요.

‘365일이 어린이날’이라고 어른들은 떠듭니다. 그러면서 아이가 주인공이라고 하죠. 저도 그렇게 떠드는 어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같이 그렇게 떠들고 있지만 솔직히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각설하고, ‘김형훈의 동화속 아이들’이라는 공간의 주인공은 아이입니다. 아이는 뭘 말할까요? 누가 아이가 될까요. 궁금하시죠.

<검정 연필 선생님> 표지

‘아이’는 폭이 매우 크답니다. 갓난아이일 수도, 다 큰 청년일 수도 있어요.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잖아요. “우리 아이가 빨리 결혼해야 할텐데”라고 말이죠. 이 때 ‘아이’는 어른의 눈으로 바라본 ‘모든 젊은이’라는 뜻으로 확대됩니다.

그래서 이 공간은 어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모든 아이들이 다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동화는 뭘까요. 동화는 ‘어린이들이 읽는 책’ 쯤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동화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상 이야기’입니다. 동화속에는 경구적이거나 교훈적인 얘기만 가득하길 원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건 동화가 아닙니다. 동화를 그렇게 바라본다면 ‘이게 바른 것이다,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외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강요하듯 그렇게 말합니다.

제겐 두 딸이 있습니다. 2000년 용의 해에 태어났다고 ‘미르’로 이름 지은 큰 딸과 2년 터울의 둘째가 있어요. 작은 애가 올해 중학생이 되면서 불쌍하게도 ‘어린이날’이라는 틀을 벗고 말았어요. 그들을 바라보면 한없이 기쁘면서도 씁쓸하고, 슬픔이 밀려올 때도 많습니다. 매일 공부를 해야 하고, 시험에 매달릴 때면 우리 어른들의 어릴 때 모습이 행복했구나 느낍니다.

시험이야 늘 있고, 공부도 평생 해야 하는 것이지만 현재와 과거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과 지금은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올 백’을 단 한 번도 성공해보지 못했으면서도 애들에겐 은근히 ‘올 백’을 기대합니다. 왜 그럴까요. 제 자신이 사회의 학습전쟁에 휘말려들었고,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신세이기에 그렇겠죠. 잠깐 시계를 우리 애들의 초등학교 때로 되돌려 볼게요. 80점이면 ‘잘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을, 한숨만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왜냐고요? 이젠 대부분 아이들은 100점 만점에 90점을 넘는다고 하잖아요. 참 이상한 세상입니다.

<검정 연필 선생님>에 실린 삽화. 검정 연필을 지니고 열심히 시험 답안을 쓰는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선생님께 혼나는 어린이도 있는 등 교실내 풍경이 재미있게 묘사돼 있다.

김리리의 동화집 <검정 연필 선생님>은 ‘올 백’을 맞고 싶어 안달인 주인공 바름이와 주변 얘기를 담고 있어요. 문제집을 숱하게 풀어도 형편없는 점수를 받아오는 바름이에겐 100점은 꿈같은 이야기죠.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학습지 선생님이 등장해요. 그 선생님이 바름이에게 준 건 ‘공부하는 방법’이 아닌 ‘100점을 주는 선물’이었죠. 그 선물은 바로 ‘검정 연필’이랍니다. 검정 연필은 틀린 답을 쓰면 써지지 않고, 정답일 때라야 연필이 써진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검정 연필을 받고 싶으시겠죠. ‘올 백’을 위해서라면 말이죠. ‘검정 연필’은 세상에 숱하게 널려 있습니다. 정답만을 가르쳐 주는 것 말이죠. 그러나 정답만 가르쳐 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올 백’은 어른들이 만들어 둔 울타리입니다. 그 울타리에 들지 않으면 이상한 아이 취급을 하는 세상이 됐어요. 제 자신도 마찬가지고요. 그 울타리에 ‘검정 연필’로 ‘올 백’을 맞은 아이들을 차곡차곡 쌓아둔다고 생각해보세요. 너무 끔찍하지 않나요.

‘아이’들은 ‘어른’과 다릅니다. ‘아이’들은 매우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 말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어로 ‘~이’가 있습니다. 접미어 ‘~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 사람 자체를 높여 부를 때 쓴다고 합니다. 주변에 널린 단어 가운데 ‘이’를 붙이는 ‘어린이’가 있습니다. ‘아이’도 여기에 억지로 갖다 붙이면 역시 ‘~이’로 끝나는군요. ‘아이’나 ‘어린이’는 이처럼 귀한 존재입니다. 아무 사람에게 ‘이’를 붙여주지 않습니다. ‘이’를 붙이는 단어는 ‘아이’와 ‘어린이’가 있고, 나이가 든 ‘늙은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상대 개념인 ‘어른’에게는 ‘이’가 붙지 않습니다. 다만 엄마와 아빠를 합쳐서 부를 때는 ‘어버이’라고들 합니다.

보셨죠. ‘아이’와 ‘어른’ 가운데 누가 존귀한가요. 바로 여러분 곁에서 30점도 맞고, 60점 점수가 적힌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입니다. ‘올 백’만 맞으라고 검정 연필을 줄 게 아니라, 사랑스런 말 한마디를 해 주는 게 바로 존귀한 존재를 위한 바른 일입니다. 그건 미래를 위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슬픈 현실 2015-05-08 15:47:49
참 따뜻한 글이네요. 글을 읽다보니,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들이 떠오릅니다. 이젠 중학교만 가면 아이들은 "인생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세상이 됐군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