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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에서 4·3까지
해방공간에서 4·3까지
  • 미디어제주
  • 승인 2015.04.1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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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50회 제주탐방 후기

해방 직후 제주읍의 '성 안'으로 불리던 동문, 서문, 남문 사거리 안쪽 지역인 지금의 제주시 원도심에는 제주도의 모든 주요기관들이 있었다. 제주도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3년이 채 못되는 기간에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독립국가 건설의 꿈도 잠시, 세계사적인 비극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인민위원회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9월 결성됐다. 제주도 건준은 일제치하에서 공직에 몸 담았던 사람들도 악질적인 친일분자들만 제외하고 건국사업에 참여시켰다. 이후 건준 조직이 인민위원회 조직으로 넘어가면서도 이런 온건한 기조는 유지됐다. 해방 직후 면장으로 추대됐던 사람들이 다수 인민위원장을 맡은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과도 협력관계가 이루어진 것은 항일투쟁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주도하면서 받게 된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와, 인민위원회의 온건성 때문이기도 했다.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있던 자리에는 나사로병원이 들어섰다가 중앙로가 뚫리고 난 뒤 이 건물 '천년타워'가 세워졌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위군중에게 발포한 것이 도화선이 된 10월 봉기는 전국으로 파급돼 두 달 동안 계속되면서 전국에서 200만명이 참여하고, 사망자만도 1천여명에 이르렀으며, 경찰관도 200명 이상 사망하는 등 해방 이후 가장 큰 대중투쟁이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강력한 조직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말에는 전국적으로 좌파세력이 거부한 입법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등 중앙이나 전남 인민위원회 조직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독자성을 보여준다.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으로부터 상당기간 치안활동의 협력기관으로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 인민위원회 산하조직으로 청년동맹, 부녀동맹, 소비조합 등이 있었고 치안대 활동은 주로 청년동맹 간부들이 맡아 보았다. 마을 공동으로 길 닦는 일과 누에치기, 축산, 농사법에 대한 교육을 인민위원회가 시행하는 마을도 있었고, 학습회, 체육대회 등도 주도했다. 야학과 학교 설립 등을 추진하거나 창고에 있던 마른 고구마를 꺼내 주민들에게 배분하는 마을도 있었다. 또 대부분의 면사무소에서는 중요한 행정업무를 추진할 때 인민위원회 간부들과 협의하는 것이 관행처럼 돼 있었다.
 
미군정 요원이던 그랜트 미드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인민위원회는 미군정과 협력하면서 치안유지 활동을 중심으로 자치기능을 수행함으로써 혼란하던 육지부와 달리 제주에서 평온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삼일절 발포사건으로 미군정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제주북국민학교
 
'삼일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1947년 3월 1일 제주읍내는 새벽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상경계에 돌입한 미군정 경찰은 미제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동문교, 한천교, 서문교 등 성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출입자들을 검문 검색하고 있었다. 제주경찰은 원래 330명으로 편성돼 있었으나 일주일 전 충남과 충북에서 응원경찰 100명이 제주로 들어와 보강됐다. 기념대회장인 제주북국민학교와 관덕정 주변은 제주도 전역에서 모인 3만여명의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삼일절 기념대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제주북초등학교. 주말을 맞은 주민과 젊은이들이 한가롭게 운동을 즐기고 있다.

오후 2시쯤 기념대회가 끝나자 가두시위가 시작됐다. 제주북국민학교를 나온 시위행렬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대열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다른 대열은 '북신작로'를 거쳐 동문통으로 이어졌다. 학교와 마을 별로 모인 시위 군중은 미농지에 슬로건을 적거나, 만장처럼 장대에 기를 만들어 오기도 했고, 가마니에 숯으로 구호를 쓴 플래카드도 들고 있었다. 이날 집회의 주최쪽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절대 지지, 즉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것이었음에도 일부 마을에서는 '신탁통치 절대반대'를 주장하는 구호판을 들고 있어 비조직인 면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시위행렬이 지나간 관덕정 광장 주변은 구경나왔던 100여명이 듬성듬성 서 있어 조용한 상태였다. 이때 관덕정 광장 동쪽 교통대 근처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이가 북국민학교 쪽에서 오던 기마경찰의 말에 채여 쓰러졌다. 어린이가 쓰러졌는데도 기마경찰이 그대로 말을 몰고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치면서 몰려나왔고,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기마경관이 급하게 말을 몰아 경찰서 쪽으로 달아나면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이 발포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관덕정 발포사건은 일주일 전 제주에 온 응원경찰에 의해 저질러졌다. 1946년 10월 대구 사건의 경험이 있는 육지 경찰은 시위군중들에게 과민반응을 보일 소지를 안고 있었다. 마침 교통사고로 입원한 경찰관을 보호하기 위해 제주도립병원에 있던 경찰관마저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들을 업고 들어오는 이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난동을 부려 두 명의 중상자를 낸 것도 응원경찰의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이 1987년 6월민주항쟁을 불러왔듯이 이날 발포는 미증유의 비극, 4.3의 서막이었다.
 
제주감찰청
 
제주의 경찰기구는 1946년 8월 1일 제주도가 도로 승격되면서 전남경찰청 산하의 '제22구 경찰서'에서 '제주감찰청'으로 승격됐다. 다른 도의 경찰청 보다는 한 계급 낮은 감찰관(현재의 경정급)이 청장을 맡는 감찰청이 제주에만 만들어진 것이다. 제주경찰서는 감찰청 산하의 제1구 경찰서가 되고 서귀포지서는 제2구 경찰서가 된다.

제주감찰청이 있던 제주북초등학교 동쪽 건물. 이후 제주신문사 사옥으로 사용된 이 건물에는 아직도 신문사 간판이 붙어있다.

제주감찰청장 강인수는 대규모의 시위대가 경찰관서를 습격하려고 했기 때문에 발포하게 됐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경찰의 거짓 발표로 그동안 육지부와 달리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가 들끓었다. 3월 10일 제주도청 100여명의 직원들이 '제주도청 청원대회'를 열고 발포책임자 처벌 등을 주장하며 파업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관공서, 은행, 학교, 통신기관, 회사 등 166개 기관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우익 인사들도 상당수 참여한 이 파업에는 제주출신 경찰관들까지 동조해 나중에 66명이 파면당하기도 했다.
 
삼일절 발포사건의 문제는 사후처리에 있었다.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대거 제주에 내려보내 검거선풍으로 맞섰다. 경찰의 정당방위론에 맞선 제주도민들의 항의는 일찍이 유례가 없는 민관합동 총파업 외에도 희생자의 마을장 엄수, 박경훈 지사의 사표 제출, 제주신보사가 주최한 유가족 돕기 조위금 모금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조위금은 석달 동안 모두 317,000여원이 모금됐다. 당시 공무원 1일 출장비가 숙식 포함 150원이었으니 지금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모금액은 1억5천여만원에 이른다.
 
파업단에 대한 검거선풍은 전남, 전북에서 추가로 파견된 400여명의 응원경찰대가 제주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한 달 만에 고급관리, 경찰관, 교사, 단체 간부 등 당시 제주지역의 지도층 인사들을 포함해 500여명이 체포됐다. 경찰은 매질부터 하고 나서 조사를 시작했다. 4.3 발발 이후 2대 인민유격대 사령관이 된 조천중학원 교사 이덕구도 조천중학원 파업과 관련해 조사를 받으면서 왼쪽 귀의 고막이 터졌다고 한다. 한 달 이상 구금됐다 풀려난 이덕구는 장기휴가원을 내고 학교를 그만 둔다.  
 
1948년 들어서도 경찰의 검거가 계속돼 발포사건 이후 모두 2500여명이 검거됐고, 취조는 더욱 심해졌다. 젊은 사람들이 경찰에 연행되면 죽일 듯이 폭행을 가했다. 이미 제주경찰의 수뇌부는 외지경찰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해 3월 한 달 동안 조천지서와 모슬포지서에서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고, 서청 중심의 경찰대에 붙잡힌 청년이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도의 상황은 최악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서북청년회 본부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제주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일절 발포사건 이후 도지사직을 사임한 박경훈의 후임으로 발령받은 유해진이 경호원 격으로 서청 단원 7명을 데리고 온 것이 시초였다. 4.3 발발 직전까지 제주에 온 서청 단원은 5백~7백명 선으로 추산된다. 빈털터리로 제주에 온 이들은 이승만 사진이나 태극기를 강매하다가 194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노골적인 테러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매질을 하다 보면 이들을 빼내려는 가족들로부터 부수입을 챙길 수 있었다. 이후 4.3이 발발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의 요청으로 5백명, 여순사건 직후 1천명 이상의 서청단원들이 들어와 제주도는 그야말로 '서청판'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의 비호를 받던 서북청년단은 칠성통의 적산가옥 2층을 사무실로 차지했다. 일본인 상점이던 이 건물의 아래층에는 상점 종업원이던 강성옥이 가게를 물려받아 살고 있었다. 아래층까지 탐내던 서청은 강성옥이 부친 제사를 지내는 동안 2층 마루바닥에 구멍을 뚫고 제사상에 오줌을 싸는 짓을 저질렀다. 서청 단장 김재능을 비롯한 단원들은 이에 항의하는 강성옥을 때려 피투성이를 만들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만행을 저지르던 서북청년회. 서청 사무실이던 2층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건물에서는 제주도의 행정 2인자인 총무국장을 때려 죽이는 일도 벌어졌다. 김재능은 도 총무국장 김두현에게 구호물품인 광목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폭행을 가했다. 김재능은 미군 방첩대(CIC)에 김두현이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고, 미군정과 군, 경찰 등 수사기관 어디서도 살인범들을 처벌하지 않고 그들을 군에 입대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부녀자를 겁탈하고, 마을을 돌며 돼지와 닭을 잡아먹는 일은 다반사였고, <제주신보사>를 강제 접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다른 식구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청단원들과 정략결혼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도 많았다. 어느 면에서 4.3 봉기를 유발시킨 것도 서청이요, 전율할 유혈극을 초래한 것도 서청이었다. 그들은 ‘빨갱이를 때려 잡는다’는 미명 아래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으나 이를 제재할 기관은 없었다. 그 배후에는 조병옥과 이승만, 그리고 미군정이 있었다.

미군 방첩대(CIC) 본부
 
삼일절 발포사건 후 미군정은 정보기관과 경찰력 중강, 계속되는 검거선풍으로 강공을 펼쳤다. 미군정 합동조사반이 발포사건 조사활동을 벌인 데 이어 미군 CIC 요원들의 제주 상주가 시작됐다. 방첩대는 관덕정 광장의 옛 식산은행 사택에 자리잡았다.

관덕정 광장 남쪽의 식산은행 자리. 이후 제일은행 사옥으로 사용됐다. 미군 CIC는 이 건물 뒤쪽의 사택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CIC는 표면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경찰과 9연대 정보과, 헌병대, 심지어 서청으로부터 매일 일일정보보고를 받는 등 제주도내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뿐 아니라 은밀하게 우익 청년단체들을 양성하는 등 제주의 정치상황에도 관여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CIC는 4.3 발발을 앞둔 시점에서 제주사태가 나날이 험악해지고 있음을 예의 분석하고 있었다. 
 
4.3 발발 당시 무장대쪽과 평화협상을 벌이던 9연대장 김익렬은 회고록에서 CIC 사무실에서 미군정장관 딘의 정치고문이 자신을 회유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해놓고 있다. 김익렬은 딘의 정치고문이 "제주도 폭동이 빠른 시일내에 진압되지 않으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고 한국의 독립에도 유해하다"면서 초토화작전을 펼칠 것을 회유했다고 밝혔다. 초토화작전을 감행해 임무를 완수하면 10만달러를 주겠다고도 하고 한국에서 살기 어렵다면 미국에 이민 가 살도록 해준다고도 했다는 것이다. 
 
9연대 정보과 
 
1946년 1월 조선경비대를 발족시킨 미군정은 각 도별로 1개 연대씩 창설한다는 계획에 따라 8개 도에 그 지역 출신들로 향토연대를 만들어갔다. 제주도에는 가장 늦은 그 해 11월 모슬포에서 조선경비대 제9연대가 창설됐다. 4.3이 발발하자 9연대는 제주농업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연대장 송요찬이 이끄는 9연대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인물은 정보과장 탁성록이었다. 탁성록은 1948년 6월 제주도로 와 12월말 제주를 떠날 때까지 즉결총살에서부터 사람을 산 채로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짓까지 집단학살극을 주도했다.
 
놀라운 일은 탁성록이 마약중독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제주에 도착하자 마자 제주도립병원으로 달려가 아편주사를 요구했다. 팔에 주사바늘이 들어가지 않자 겨드랑이에 바늘을 꽂으라고 할 정도로 지독한 마약중독자였다. 재임기간 내내 도립병원에 부하들을 보내 몰핀을 가져갔다. 4.3 발발 직전 조천지서에서 발생한 고문치사 사건의 피해자 사체를 검안해 사실대로 밝힌 의사 장시영은 경찰의 보복을 피해 부산에서 의사 생활을 할 때 제대한 탁성록이 병원으로 찾아와 '살려달라'면서 몰핀을 간청했다고 말했다.

악명 높았던 9연대 정보과 사무실이 있던 자리. 옷가게가 들어섰다.

탁성록은 정보수집을 위해 사무실이 읍내 한복판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정보과 사무실을 원정로로 옮겼다. 상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서청을 하수인으로 부리면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구금자 가족들은 돈보따리를 들고 탁성록을 찾기 바빴다. 탁성록은 제주읍내 명문가의 홀로 된 며느리를 강간한 뒤 강제 동거하다가 나중에 죽여버리는 패륜도 저질렀다.
토벌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즉결총살과 집단학살은 마약중독자가 환각상태에서 저지른 범죄행위였다. 
 
갑자옥
 
갑자옥은 제주읍내의 유명한 모자점이었다. 관덕정 교통대 5거리에 있던 갑자옥은 근처 제주약방, 중앙이발소와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회원들이 주로 모여 어울리던 곳이었다. 갑자옥 사장 이상희는 서울신문 제주지사장을 맡고 있었고, 중앙이발소 주인 김행백은 민전 선전부장, 제주약방의 김두봉은 도립병원 약제과장을 겸하고 있었다.

관덕정 교통대 오거리 코너의 갑자옥이 있던 자리

1948년 10월 17일 9연대장 송요찬은 중산간마을에서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폭도배로 인정해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요지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본격적인 초토화작전의 신호탄이었다. 미군정은 4․3 발발 초기에 이미 초토화작전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제주해안은 포고문이 발표된 다음날 즉각 봉쇄됐다. 10월 19일 제주에 파병될 예정이던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초토화작전은 더욱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초토화작전으로 제주도 전역의 중산간마을이 불태워지고 주민들이 대규모로 집단학살 당하기에 앞서 제주의 유지들이 줄줄이 농업학교로 끌려갔다. 군경의 잔혹한 학살극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에 선이 닿을 만한 유지들을 죽이거나 가둔 것이다. 연행된 유지들은 전직 도지사 박경훈 등 고급관리, 제주지법원장 최원순 등 법조인, 제주중교장 현경호 등 교육자, 경향신문 기자이자 제주지사장 현인하 등 언론인, 독립유공자 조대수 등 항일운동 경력자, 도 부녀동맹 부위원장 강어영을 비롯해 제주읍내 명망가의 아내와 딸들도 포함됐다.
 
이들 중 현직 검사 김방순이 즉결처분 당하는가 하면 학교장 현경호, 김원중, 갑자옥 사장이자 서울신문 지국장 이상희, 현경호의 아들인 제주중 교사 현두황 등 6명은 총살 당한 뒤 사체는 불에 태워졌다. 조천면장 윤창석, 독립유공자 조대수, 제주약방 김두봉도 학살당했다. 중앙이발소 김행백은 사태가 험악해지자 목포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다. 송요찬의 9연대는 1948년 12월 말 2연대와 교체해 제주를 떠나게 되자 이에 앞서 집중적으로 수감자들을 학살했다. 송요찬의 나이 서른살이었다.

제주신보사 
 
유지들 대부분이 농업학교에 갇혀 있을 때 토벌당국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10월 24일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이 읍내 곳곳에 뿌려진 것이다. 당국이 수사결과 삐라는 제주신보사 편집국장 김호진에 의해 인쇄된 것으로 밝혀졌다. 김호진은 삐라를 인쇄한 후 신변이 노출될 기미가 보이자 입산을 시도하다가 관음사 부근에서 토벌대에 붙잡혔다. 김호진은 농업학교에 갇혀 무진 고문을 당하다 사흘 뒤 즉결처분 당했다.

제주신보사가 있던 칠성로 건물. 국제금고와 동쪽 의류점까지 사옥으로 사용했다. 

이후 신문은 매일 헌병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삼일절 발포사건 때 유가족 돕기 조위금 모금을 주도해 도민의 분노를 대변하기도 했던 제주신보사는 현장 취재는 할 수도 없었고 군에서 발표한 것을 그대로 옮겨 적는, 군 정보지 노릇을 해야 했다.
 
1949년 2월, 서청 단장 김재능이 봉개리 일대에서 숨어있던 주민들을 집단학살한 사건을 두고 자신들의 역할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다면서 신문사 찾아가 사장 김석호를 구타했다. 같은 날 밤 편집국장 김용수를 붙잡아 초죽음이 되도록 매질을 한 뒤 죽이려다가 2연대장 함병선의 지시로 목숨을 건졌다. 김재능은 테러와 협박으로 제주신보를 강제 접수한다. 김재능은 사장이 되고 나중에 영화감독으로 이름이 알려진 김묵을 편집국장에 앉혔다. (이상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제1권, 제4권 인용)
 
이덕구 산전(山田)
 
우리는 60여년 전 살륙의 광기가 넘쳐나던 제주시 원도심을 뒤로 하고 조천읍 교래리 '북받친 밭'으로 향했다.
 
초토화작전으로 제주읍 중산간마을에서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2연대장 함병선이 적극적인 토벌을 벌이면서 봉개리에 부대를 주둔시키자 주민들은 더욱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성판악 근처인 이곳은 주민들이 숨어 지내던 곳으로, 나중에는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가 이끄는 무장대가 잠시 머문 곳으로 알려져 '이덕구 산전'으로 불린다.

조천읍 교래리 '이덕구 산전'. 장방형으로 돌을 쌓아 움막을 지었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움막의 흔적과 함께 50여m 떨어진 곳에는 경비초소 모양의 흔적도 있다. 깨진 무쇠솥과 그릇들이 남아있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올랐던 주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증언하고 있다. 탐라미술인협회가 밥상을 조각해 설치했다. 조각가 강문석의 작품에 시인 김경훈의 시가 새겨졌다.  
 
이날 우리를 안내한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의 전문위원이던 김종민 4.3평화재단 이사는 새로운 증언을 소개했다. 1949년 3~4월 경 이덕구가 무장대원들에게 해산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이덕구는 "더 이상 무엇을 도모할 수 없으니 2인1조, 3인1조가 돼서 갖고 있는 무기는 '비장'을 하고 내려가 후일을 도모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1949년 5월 10일 제주도에서만 치러지는 초대 국회의원 재선거를 앞두고 토벌대가 선무공작에 나섰을 때였다. 그러나 무장대원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일부는 자결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경제학부 4학년 재학중 학병으로 일본 육군에 징집됐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 제주로 돌아와 조천중학원 교사가 된 이덕구. 조천중학원의 제자들은 역사와 지리 과목을 가르치던 이덕구 선생이 사상적인 발언은 일체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삼일절 발포사건에 이은 학교의 파업과 관련해 경찰에 연행됐다 풀려난 뒤 학교를 그만 둘 때도 "육지로 간다"는 말만 남겼다고 한다. 4.3 봉기를 결정한 남로당 제주도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봉기의 주동자 그룹도 아니었다. 인민유격대의 1대 사령관 김달삼이 해주로 달아난 뒤 2대 사령관을 맡았다.
 
김종민 이사는 "4.3 봉기의 지도부가 극좌 모험주의자들이었다는 지적과 달리 이덕구의 경우 조선말기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민란의 장두들의 모습과 닮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관의 가렴주구에 항의해 민중의 앞장을 선 장두들은 조정이 백성의 항의를 받아들여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자신의 목숨은 내놓아야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덕구의 행적을 미루어 보면 4.3 봉기를 주도한 인물들과는 다른 모습이 엿보이는 게 사실이다.
 
4.3 68주년을 지나면서 돌아본 역사의 현장에서 참혹했던 당시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증언과 기록에서 나타난 대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를 댄다 하더라도 정당성을 찾을 수 없는 야만, 국가의 공권력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행위 앞에서 화해와 상생을 얘기하는 것은 섣부른 일일지 모른다. 과거사 청산은 진상규명 - 가해자 처벌 - 피해자 배상 보상 - 용서와 화해로 완성된다. 어느 하나라도 건너 뛰어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사는 청산될 수 없는 것이다. 일제 때 벌어진 민족반역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듯이.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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