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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만리, 돌담길 찾아
흑룡만리, 돌담길 찾아
  • 고희범
  • 승인 2014.11.04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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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46회 제주탐방 후기

제주에는 태풍 봉퐁이 북상하면서 간접 영향으로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태풍은 오키나와 남동쪽 해상에서 올라오다가 진로를 틀어 일본 열도를 관통할 것으로 예보됐으니 탐방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거기다 주제가 제주의 '돌'이 아닌가. 오랜 세월 비와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거기서, 여전히, 그렇게 버텨온 '돌' 말이다.

돌 문화는 제주탐방에서 몇차례 다룬 주제였다. 제주의 성곽이나 포구, 돌 조각 예술, 잣성 등을 이미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생활 속의 돌을 찾기로 했다. 제주에서 돌은 아무리 여러 번 돌아보아도 지나치거나 지루하지 않은 대상이다.

제주시 애월읍 노꼬메오름 허리께를 가로 지르는 '잣'은 말들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말 목장의 경계를 짓는 돌담이다. 1.2~1.5m 높이의 겹담으로 쌓은 잣은 얼핏 보기에 밭담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조선시대 국영목장과 농경지, 또는 한라산과 국영목장의 경계였다. 돌로 제주도를 빙 둘러 쌓은 잣은 제주도가 아니면 상상도 못할 시설이다.

노꼬메오름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는 돌담. 이 담은 1700년대에 조성된 '상잣'이다. (사진 이길훈)

잣은 조선 세종 때 제주인으로 한성판윤까지 지낸 고득종(高得宗 1388~1452)의 건의로 설치된 것이다. 고득종은 말 방목으로 농작물 피해가 발생하자 해안지역에서 방목하는 말들을 중산간지역으로 옮기고 국영목장을 설치해 체계적으로 말을 기를 것을 세종에게 건의했다. 세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세종 11년(1429년) 제주도 전역의 해발 120~250m쯤 되는 곳에 제주도를 빙 둘러 담을 쌓아 농경지와 목장의 경계를 삼았다. 국영목장은 제주도를 10개 구역으로 나누어 10소장(所場)을 두었다.

말들이 밭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어 농작물 피해는 사라졌으나 말들이 한라산으로 올라갔다가 얼어죽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1700년대 들어 한라산쪽으로 해발 460~600m 지역에 잣을 쌓았으니 '웃잣' '상잣' '상잣성'으로도 불린다. 해안쪽 잣은 자연스럽게 '알잣' '하잣' '하잣성'이 되었다. 노꼬메오름의 잣은 상잣이다.

한림읍 귀덕리. 돌이 풍성하다. 밭담도 다소 높고, 멀칭한 비닐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눌러놓은 것도 돌이다. (사진 이길훈)
 

머들은 밭을 갈다가 나온 돌들을 쌓아놓은 돌무더기다. 밭 한가운데서 나온 돌을 운반하기 어려워 임시로 모아둔 것이다. 머들은 밭담을 보수하거나 산담을 쌓을 때 사용된다.

이날 탐방을 이끈 미술평론가 김유정씨는 모르는 게 없었다. 제주도의 모든 것을 두루 꿰고 있는 듯 입을 열면 온갖 주제를 다 넘나들며 참가자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는 밭의 종류를 알면 밭담의 특징을 알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가 풀어놓은 밭의 종류는 이렇다.

조 보리 콩 등 일반 곡식을 심는 곡석(곡식)밧, 말과 소가 겨울을 나기 위해 키우는 촐(꼴)밧, 마소의 배설물을 모아 거름으로 쓰기 위한 바령팟, 마소를 공동으로 키우기 위해 돌담을 두르거나 목초지나 산야를 불태워 조성한 캐왓, 집안에 작은 규모로 만든 우영팟, 흙 기운이 시원치 않은 가분밧, 자갈이 많은 작지왓 또는 머흘왓, 마을 안에 있는 가름팟 또는 거리왓, 마을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난전 또는 산전, 푸석거리는 화산회토의 뜬밧, 물이 고이는 물왓, 암반이 많은 빌레왓 등등. 에스키모어에는 바닥에 쌓인 눈, 내리는 눈, 쌓인 눈, 휘몰아치는 눈 등 눈을 뜻하는 단어가 100개나 된다지 않은가.

제주시 한경면 낙천리. '아홉굿마을'이라는 옛 이름이 있다. 옹기를 굽기 위해 점토를 채취하면서 생긴 못이 아홉개에 이르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이 못의 물은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다. 물이 귀한 중산간지역에서 식수의 오염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돌을 깎아 '돌확'을 만들어놓았다.

음식물을 장만하거나 빨래를 하면서 사용한 물이 다시 못으로 흘러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못 앞에 있는 집 돌담에 붙여 '물팡'이 설치돼 있다. 이 못에 물을 뜨러온 아낙들이 '물허벅'(물을 담아 이동하기 쉽도록 주둥이가 좁고 몸통이 둥근 옹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물구덕'(물허벅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대바구니)을 등에 지기 쉽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 마을 아낙들이 힘든 밭일을 끝내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 물을 뜨러 왔을 때 사용했을 것이다. 밭에서 돌아온 남정네들은 집으로 들어가기 전 이 못에서 목도 축이고 돌확에서 손발을 씻기도 했을 것이다. 저녁 나절 마을 주민들이 모여들어 시끌시끌 활기가 넘쳤을 주변 모습이 그려진다.

밭에서 나온 자갈을 밭 구석에 쌓다보니 돌무더기가 벽 같은 모양을 하게 됐다. 대를 이어 농사를 지으면서 이 벽이 길이도 길어지고 높이도 성(城) 처럼 높아졌다. 지역에 따라 '잣', '잣담', '잣벡담'이라고도 한다. 자갈이 많은 제주 서부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비가 오거나 밭에 출입구가 없는 맹지의 경우 잣담 위에 난 길을 이용했다. 이것이 '잣질(길)'이다. 그런 만큼 잣길은 한 사람이 걸어다닐 정도의 너비다. 밭에 무덤을 조성하게 될 경우에는 잣담을 허물어 산담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제주의 성곽, 잣성, 밭담, 집담 등 돌담의 총길이는 얼마나 될까? 제주대 고성보 교수팀의 2008년 샘플조사를 통해 총 3만6천km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검은 색의 현무암이 제주도 전역을 구비구비 감돌고 있는 형상을 두고 민속학자 김영돈 교수는 '흑룡만리'(黑龍萬里)라고 명명했다. 그 흑룡만리의 일부를 환해장성이 차지한다. 외적들이 바다를 통해 들어오기 쉬운 지역 해안에 높이 3~4m 가량의 돌담을 쌓은 것이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진도에 머물게 되자 왕이 김수, 고여림 등에게 군사 1천명을 주어 탐라를 방어하도록 하면서 성을 쌓은 것이 환해장성의 시작이다. 이후 삼별초가 관군을 물리치고 제주로 들어오게 되자 삼별초가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쌓았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계속 성을 새로 쌓거나 보수해갔다. 또한 헌종 11년(1845)에는 영국의 배들이 한달동안 우도 앞바다에 머물면서 흰 깃발을 세우고 측량을 하자 당시 제주목사 권직이 놀란 나머지 도민들에게 성을 다시 쌓게 했다.

역사 속에서 제주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한 환해장성은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지거나 훼손됐다. 진성과 함께 환해장성도 일부 복원되기도 했으나 원형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한경면 판포의 환해장성은 군데 군데 허물어지기는 했으나 그나마 드물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제주의 돌은 화산섬 제주의 주민들이 암반을 걷어내면서 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밭의 경계와 방풍의 효과를 내는 밭담으로, 방어를 위한 진지를 구축하거나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적들을 막기위해 쌓은 성곽으로 흑룡만리를 이루었다. 밭담은 마침내 유엔식량기구(FAO)에 의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고,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운동으로 집담이 블록담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최근들어 돌담이 인기를 누리면서 일부지역에서는 밭담을 훔쳐가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일구어낸 조상들의 피와 땀이 오늘에 이르러 세계인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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