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 묻어둔 58년의 기억, 그 한맺힌 울분
가슴속에 묻어둔 58년의 기억, 그 한맺힌 울분
  • 윤철수 기자
  • 승인 2005.03.28 16: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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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연구소 주최 '4.3증언 본풀이 마당' 28일 열려

이 자리에는 김영훈 제주시장을 비롯해 김두연 제주도4.3유족회장, 양금석 제주4.3도민연대 공동대표 등 관계자와 유족,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해 증언자들의 얘기를 경청했다.

오승국 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은 “올해에는 4.3당시 불법재판 수형인 희생자에 대한 희생자 결정심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4.3당시 수형경험이 있는 분들을 모시고 고통의 기억을 통한 4.3당시의 참혹한 이야기를 듣는 네 번째 자리를 마련했는데, 4.3의 진정한 해원을 다짐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행사의 1부 문화행사에서는 놀이패 한라산의 4.3극 ‘헛묘’가, 2부 문화행사에서는 민중가수 최상돈의 4.3노래공연과 시낭송 등이 있었다.


남편은 58년전 10월 친척집 제사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경찰에 붙잡혀갔다. 밥 한번 가지고 면회한게 끝이다. 내 눈으로 남편 죽은 것을 확인하겠다고, 남편 뼈를 찾으려고 안가본데가 없다. 4.3사건 난 뒷해부터 찾아본다고 ‘어디 뭐 있다’는 소문만 나면 가보곤 했다.

화북1동에 소개가 있을 때 ‘당카름’이란 곳도 가봤다. 그때가 한 사월쯤 났을 것이다. 보리밭 검질 맴직 맘직 추운 때였다. 어린 아기데리고 빨래하러 갔는데 “당카름에 완덜 시신들 찾잰 막 해쌈서”라는 소릴 들었다. 집에 오자마자 그냥 빨래 널지도 않고 맨발인 채로 당카름을 가보았다.

그곳에 조금 옴팡한 밭인데 큰 구덩이가 있고, 그 안에 시신들이 흙으로 덮여 있었다. 죽은 사람들 손을 들여보니까 전부 손발이 묶여 있었다. 갈중이 입은 사람, 국방색 민영으로 만든 쓰붕입은 사람....

이날 사람들이 직각 모여들어 있었다. 너도나도 찾아본다고. 뒷날까지 가봤는데 못 찾고, 고우니모루 오일장했던 데도 가보고, 바닷가도 돌아보고.

억울한 것은 남편 없다고 화북지서에서 잡아가 전기취조를 당한 일이다. 아이하고 같이 화북지서에 오라 해서 갔는데, 방같은 곳에서 손목에 전깃줄을 감고 취조를 했다. 전기고문을 가했는데 이때가 제일로 힘들었다.

그후로 아이 두명 목숨살리자는 생각에 누가 뭐라고 해도 “예”하며 숨죽이며 살았다.

남들은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낸다 뭐한다 하지만 난 글을 잘 쓸줄 몰라서 그렇지 너무 억울하다. 화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합니다만 너무 너무 억울하다.

 

"100여명이 함께 도망했는데, 군인들이 일제사격 가하면서 70~80명이 사살되고 대부분 여자였는데..."

제주시 봉개동에 거주하며 농사를 하며 살던중 4.3사건을 겪었다. 1948년 음력 10월20일 봉개리가 소개되면서 모든 집이 불타 버렸다. 부모님은 해안마을로 피난갔지만 대다수 젊은이들과 많은 주민들은 불타버린 집을 의지해 움막을 짓고 하루하루 살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토벌대는 마을로 들이닥쳤고, 그때마다 죽기살기로 도망다니는 험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 와중에 동생 고윤병은 1948년 12월 토벌대에 쪽기다 토벌대의 총에 즉사했다.

1949년 음력 1월7일, 이른바 ‘동부8리 작전’이 있던 날이다. 이날 오전 7시39분쯤 사방에서 총소리가 나고 동네사람들이 “빨리 도망가라. 군인들이 올라오고 있다. 여기 있다간 생죽음을 당한다”며 피난을 가고 있었다. 나와 큰형도 무조건 도망갔다. 현재 산업도로 쪽에 ‘연못’이라는 곳까지 함께 도망가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데 나는 이왕이면 사람이 많은 쪽으로 뛰었다.

그런데 형님은 칠오름 쪽으로 도망가다 현장에서 즉사했다. 나는 ‘소낭굴’쪽으로 뒤었는데 100여명 정도가 같이 도망을 갔다. 그런데 그곳에 매복해 있던 군인 50여명이 일제 사격을 가해 그 현장에서 70~80명이 사살됐다. 사망자 대부분이 여자들이었다. 나는 다리와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언덕 아래로 굴렀는데 산소를 둘러싼 산소 모퉁이에 처박혔다.

10분쯤 후에 “아직 덜 죽은 사람은 확인 사살하라”는 군인들의 소리가 들리면서 총소리가 났다. 피가 계속 나고 추운날씨에도 저녁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조용해지니까 근처 움막으로 몸을 피했다.

부상당한 몸으로 몇 달간 ‘대나오름’ 인근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군인에게 발각됐다. 당시는 귀순공작이 한창일때라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별다른 혐의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감찰청으로 이송돼 10여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그렇게 1년정도를 유치장에 수감됐다가 광주지방법원에서 1950년 2월에 재판을 받아 7년형을 언도받았다.

총상을 입은 상태로 수형생활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등 몸이 불편하다.

 

"'난 이제 도저히 살지 못허쿠다. 달리당 죽지, 여기 앉아 있지 못허쿠다'며 집나간 후 사흘만에 군인들이 집으로 와서..."

제주시 아라동 대원마을에서 노형동 광평마을로 시집간 후 남편과 농사를 지으며 살던 중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이 모두 불타버리자 이호동 ‘오도롱’으로 피난갔다.

하지만 오도롱도 소개령으로 불타버리고 이호동의 ‘백게’로 다시 피난했다.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세살 난 딸과 함께 해안마을인 백게로 갔지만 이 피난길이 모든 것을 한꺼법에 잃어비리는 길인 줄은 굼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돌아와서 한국말도 서툰 남편은 산간에서 피난 온 주민들을 죽이는데 동원됐다가 도저히 못할 짓이라며 다시 불타버린 고향마을로 돌아가 버렸다.

군인들이 모이라고 해서 모이니까 ‘눈을 감으라 뜨라’ 반복하더니 총소리가 ‘와작착착’하게 났다. 조금 있으니 젊은 청년들 모이라 하니, 남편이 갔어. 나하고 시아버지는 집에 가서 있는데 남편이 왔어. 애비 아들(시아버지와 남편)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난 이제 도저히 살지 못허쿠다. 달리당 죽지, 여기 앉아 있지 못허쿠다”라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려고 할때즘 물 두어번 길어서 와보니 남편은 없길래 시아버지에게 물어보니 “다시랑 나 생각허지 맙서 허멍 나갔다”고 한다.

남편이 그렇게 나간 후 사흘만에 군인들이 집에 와서 나를 데리고 갔다. 아기를 어디 맡길 수도 없어 아기를 안고 나갔는데, 그 길로 제주경찰서에 수감됐다. 그렇게 끌려간 경찰서에서 7개월 동안 살았다. 천장에 매달려 고문도 당해보고, 같이 간 아이는 천연두에 걸려 죽을 뻔했다. 시아버지는 그 다음날 군인들에게 붙들려 ‘백게’에서 처형됐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사망소식은 후에 들어오는 사람에게서 들었다.

유치장에 살다 친정에 와보니 큰오빠도 이미 형무소로 이송되어 있었고, 친정인 대원마을도 모두 불타버려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 주막 한가운데로 끌고 가서 연발사격하고, 울음소리가 나자 다시 연발사격하고 그렇게 세번을 연발사격했는데..."

원동은 서부산업도로 경마장 바로 지나면 길 위쪽으로 있었던 마을이다. 그곳 원동에서 1948년 음력 10월13일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자 한다.

그날 새벽에 군인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마을 맨 윗동네 끝집으로 모아 놓고는 대검이나 창으로 찌르고 결박을 했다. 노인에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렇게 결박을 했는데, 오전 10시가 넘어서 산공비들 사는 데를 가르치라고 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사는를 알 리가 없어 말을 못하자, 사람들을 다시 주막이 있던 마을 한가운데로 끌고 가서 결박을 풀고 다시 묶었다.

처음엔 앞으로 묶었었는데, 두 번째는 뒤로 묶었다. 새벽부터 그렇게 한 것이 저녁 어둑어둑 할 때가 됐다. 저녁이 되니까 군인들이 무전을 쳤다. 애월읍 소길리 원동에 민간인 몇 명을 잡아놓고 있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날은 막 어두워져서 달이 훤히 비출 때가 돼서 애월 쪽에서 차가 왔다.

사람들은 그곳에 모두 앉혀놓고 M1총에 대검꼽고 포위해서는 군인들이 사람 죽여난 얘기를 했다. 조금 있으니까 우릴 어떻게 하려는지 길 건너편으로 옮기려 했다. 산폭도들 사는데를 말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했는데, 살려줄 것이라는 생각이 안들어서 결박을 몰래 풀고 도망을 쳤다. 막 뛰어가다가 가시밭 속으로 푹 들어가서 가만히 숨어 있는데, 옆에까지 와서 “나오라. 나오면 안죽인다”고 말해도 귀 꽉 막고 엎드려서 조용할때까지 기다렸다.

밤 12시는 넘었고, 날이 꼭 밝아질 무렵 총소리가 연발해서 났다. 총소리가 중단하니까 사람 우는 소리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연발해서 총을 쏘다가, 소리가 딱 머졌다. 소리가 머지니까 한두사람 우는 소리가 났는데, 그러니까 또다시 세 번째 연발사격을 했다.

나는 나가면 죽을까봐 숨었다가 사흘 후에 가서 보니까 우리 동생은 총알이 등으로 들어가서 가슴으로 나와있었는데, 그때까지는 살아있었다. 누이동생은 결국 죽어서 그냥 우영밭에 묻어뒀는데, 아버지 시신은 건드려보지도 못했다.

그날 원동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원동사람만이 아니고 지나가던 사람들을 전부 잡아다 죽였으니까 그 숫자가 수십명이 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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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2005-03-29 08:55:06
증언자 글 내용 읽어보니, 평화의 섬 우리 제주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라 생각된다.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부디 영면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