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7:52 (금)
콩나물 부자
콩나물 부자
  • 홍기확
  • 승인 2013.01.16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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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9>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녀온 후 답답한가 보다. 저녁에 여간해서는 밖으로 나가자고 하지 않는데 어제는 소풍을 가자고 유난히 보챘다. 그럼 산책이나 나가자고 했더니, 아이는 가방에 간식을 챙기며 호들갑스럽다.

집사람이 내 눈치를 보며 힘들지 않겠냐고 한다. 나는 아이의 컨디션과 기분에 맞추는 게 내가 피곤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대답하곤 근처 공원을 향했다. 집사람에겐 꿀맛 같은 한 시간의 휴식을 선물했다.

걸매생태공원에는 우리 둘 외에는 사람이 없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는데 가로등의 불빛만 반갑다고 더욱 힘을 내어 빛을 쏠 뿐 곤충들의 지저귐조차 없다. 아이와 손을 잡고 걸었다.
“이훤아, 하늘을 봐. 별이 많지? 저기 구름도 멋있어.” 낭만이 있는 아이는 하늘을 빤히 쳐다본다.

“초승달은 내가 먼저 발견했어! 내가 1등이야!” 나는 동쪽하늘만을 바라봤는데 역시 이 깜찍한 녀석은 동서남북 전체를 두리번거렸나보다. 우리는 가끔씩 이렇게 엇박자다. 이런 엇박자에서 아이에게 배운다. 한 곳만이 아닌 주변도 바라봐야 한다.

아이는 하늘을 보는 것을 끝내곤 다시 걷자고 한다. 잡아달라며 조그만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잡는다. 낯설긴 하지만 아이에게서 동료애를 느꼈다. 우리는 힘차게 세상을 살아가는 동료다. 서로 경쟁도 하지만 도움도 주고받는 끈끈한 동료다.

나는 손이 작은 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이의 손이 내 것보다 작다. 곧 있으면 아이의 손이 내 것보다 더 커져 손을 맞잡으면 내 손을 덮어버릴 것이다. 언제 성큼 자라서 내 손을 놓을지 모른다. 작은 손을 많이 잡아줘야 한다.

공원의 관리사무소를 탐험한다. 아이는 누가 사는지 확인해보자고 한다. 생각이 많아진다. 혹시 무인경비시설이 작동되어 난감한 상황이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이는 거침없다. 벌써 혼자서 현관의 계단을 밟고 있다.

나는 아빠다. 이쯤 되면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수습해야 한다. 하지만 씩씩한 녀석이다. 모험과 탐험은 내가 가르쳐 주었다. 나는 뿌듯한 마음에 잽싸게 노크를 하고 나서는 무섭다며 뛰어온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이 많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있다.

또 다시 아이가 내민 손을 잡고 걸었다. 그윽한 초승달의 따스함과 맞잡은 두 손의 온기는 추운 겨울의 산책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이는 엄마에게 줄 선물이라며 억새를 꺾었다. 아이는 밖으로 놀러 나가면 꼭 자신과 엄마, 아빠에게 줄 선물들을 챙긴다.

선물이라 봤자 나무의 씨앗이나 솔방울, 억새, 나뭇잎들로 대단할 것 없지만, 특별한 선물들이다. 선물하는 버릇은 엄마가 가르쳐 주었다. 선물하는 습관을 들이면 보통의 날들도 특별해진다. “소란한 보통날”이 된다.

내가 아버지에게 자주 들었던 대표적인 말 두 가지를 꼽으라면 “싸가지 없는 새끼”와 “개새끼”다. 시장통에서 한 평생을 보낸 아버지는 말투가 적잖이 거칠다. 이런 말을 어렸을 때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이 말을 하면 나에게 성급히 달려와서는 “아버지의 애정 표현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어른이 된 십여년 전부터는 이 말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애정 표현의 남대문시장 버전쯤으로 여긴다. 오히려 오랜만에 들었을 때는 당돌했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반갑기도 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말처럼 싸가지가 없거나 싹수가 노란 어린이였다. 하고 싶은 말은 다했고 말썽도 많이 부렸다. 내 아들도 싹수가 노랗다. 말장난은 7살 아이 치고는 동급최강이며, 서로를 설득해야 하거나 양보를 위해 협상할 때는 가끔씩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지치지 않는 승부욕에 아빠와 어떤 시합을 하더라도 지지 않으려고 한다.

콩나물은 햇빛을 보면 안된다. 햇빛에 노출되면 싹수가 노란 콩나물이 아닌 독성이 있는 초록색 콩나물이 된다. 그래서 콩나물을 키울 때는 검은색 천으로 항상 콩나물을 감싸준다. 싹수가 노랗더라도 항상 나쁜 건 아니다.

콩나물은 시시때때로 물만 주면 자란다. 뿌리를 보듬어주는 흙이 필요 없는 콩나물은 물을 주더라도 콩나물시루의 바닥으로 주욱주욱 떨어진다. 물을 방금 주고나서 보면 자라는 것 같지 않지만 가끔 확인해 보면 어느새 쑥 자라있다. 콩나물은 아이와 같다. 버릇없고 싹수가 노래 보인다. 물을 주어도 크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예전의 조그맣던 아이는 문득 보면 어느새 커있다.

안아주기에도 아까운 50cm짜리 핏덩이였다. 안아줄 때마다 지구 두바퀴 반의 길이를 가졌다는 혈관, 20초면 지구 두바퀴 반을 돈다는 혈액이, 떨어뜨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1~2초면 지구 한바퀴를 돌 정도로 빠르게 뛰었었다. 이게 과연 사람의 손이 맞나 싶어 가끔씩 손가락과 발가락의 갯수를 세어보았었다. 쌔근쌔근 잘 때는 숨은 제대로 쉬나 귀를 기울여 숨소리를 들어보기도 했다.

“자라라, 자라라, 쑥쑥 자라라. 아빠가 물을 줄게. 네 싹은 노랗지만 아주 예쁘단다. 지금은 어두워서 네 스스로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겠지만 자라고 자라서 검은색 천이 감당하지 못할 때쯤 당당하게 세상에 나오렴. 정말 멋진 모습일거야!”

어제 저녁 산책을 다녀와서 오늘도 같이 나가자고 아이와 약속했다. 이제는 아이보다 내가 더 산책을 나가고 싶다. 아이와 나는 싹수가 노란 콩나물 부자(父子)다. 동반성장. 동료애가 물씬 풍겨난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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