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8 19:18 (목)
택배 왔어요!
택배 왔어요!
  • 홍기확
  • 승인 2012.12.27 17:17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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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5>

어제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택배 아저씨와는 안면이 있는지라 한 번의 눈빛 교환으로 모든 얘기가 통한다. “네가 또 시켰냐?” 하는 택배 아저씨의 눈빛. 받는 사람에 내 이름이 찍힌 걸 보니 내가 시킨 건 맞지만, 왠지 미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90도 인사와 함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겉의 종이박스만으로는 도저히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었다. 묵직한 상자인 터라 사무실에서 뜯진 못하고 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마자 택배 상자를 열어보았다.

 

 

플라스틱 병에 담긴 고추장 두 통, 된장 한 통, 마른 멸치, 콩자반, 인형 4개, 점퍼, 돼지저금통.

고추장, 된장, 마른 멸치는 그럭저럭 이해가 간다. 그런데 웬 콩자반? 아버지의 택배였다. 콩자반까지 서울에서 물을 건너 왔으니, 분명 부모님 집의 반찬 중에서 가장 쓸만한 녀석이 없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점퍼.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누구한테 선물 받았는데 엄마 몰래 나에게 부쳐준 거라고 한다. 엄청 비싼 거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말이다.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입어보니 나에게 꼭 맞는다. 사이즈를 힐끗 보니 105호다. 아버지는 100호를 입으신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기가 다르다. 세일하기에 너 주려고 옷을 샀는데 보내노라고.

분명 이 옷은 아버지가 사셨을 것이다. 물론 어머니에게 돈만 안기고는 사오라고 시켰을 테다. 평소 수줍음이 많은 아버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엄마를 시켜서 자식들에게 줄 물건을 산다.

그리고 그게 옷이라면, 선물 받았는데 본인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물건이라면 필요 없는 거였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 거짓말 패턴은 믿기 힘들지만 십여년간 바뀌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인형 네 마리. 그 중 인형 세 개는 곰돌이 푸에 나오는 이요르 나귀 인형이었다. 크기도 모양도 똑같았다. 그런데 집사람이 내가 공부할 때 힘내라고, 사탕이니 과자를 넣어주던 플라스틱 병에 담겨져 있었다.

또한 나머지 인형 한 개는 요람에 누워있는 강아지인데, 이건 내가 집을 떠나기 전부터 있던 거였다. 돼지 저금통은 저금하기에는 조금 작지 않나 싶었다.

이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항상 그렇듯 아버지가 주는 물건들에는 아버지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스펙터클하고 짜릿한 해석의 세계. 아버지의 속마음과 아들의 올바른 번역. 개봉박두.

우선, 고추장과 된장은 된장국을 좋아하는 손자를 위한 것으로 할아버지의 사랑이다.
두 번째로, 마른 멸치는 멸치볶음을 좋아하는 며느리를 위한 것으로 시아버지의 사랑이다.
세 번째로, 점퍼는 항상 추워 보이는 아들을 위한 것으로 아버지의 사랑이다.

네 번째로, 콩자반은 알‘콩’달‘콩’ 살라는 우리 부부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다섯 번째로, 캔디 상자에 인형 세 개를 어거지로 꾸겨 넣어서 보낸 것은 우리 가족이 새 집을 샀으니 축하하며, 그 안에서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라는 말이다.

여섯 번째로, 따로 떨어져 있는 요람에 담긴 아기 강아지 인형은, 더 이상 손주를 볼 일 없다고 외치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무언의 반항이다. 시간나면 손주 하나 더 낳을 생각은 어떠냐고. 하지만 캔디 상자에 같이 넣지 않은 걸 보니 부담스러워 할 아들을 배려한 듯하다. 손주를 하나 더 보고는 싶지만 부담스럽다면 아버지는 괜찮다고.

일곱 번째로, 돼지저금통. 여행 좋아하고 씀씀이가 큰 우리 부부에게 전하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마지막 메시지다. '집을 대출받아 샀으니 아껴 써라!' 하지만 돼지저금통이 상당히 조그맣다. 문방구에서 파는 500원짜리 조그만 저금통이다.

결국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너희가 놀러 다니길 좋아하는 건 아버지도 알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저축해라. 사람 일 어찌 될지 모르잖니?'

아버지가 나보다 어렸다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똘망똘망하다고 칭찬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리도 귀엽고 치밀한 생각을 담아 택배로 보냈냐고 말이다.

얘기는 결코 말을 통해서만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택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 삶의 낭만은 곳곳에 널려 있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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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com 2012-12-31 12:18:26
아버지의 장난은 항상 뭔가 철학과 의미가 있었습니다.
저 역시 제 아들에게 그런 말장난을 하길 좋아하는데
처음 써먹을 때는 퀴즈처럼 '해석해봐'라고 메모를
남긴다면 자녀의 두뇌발달에도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아름다운 엇갈림 2012-12-31 12:14:02
아버지와 저는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듯합니다.
다만 아버지는 길의 시작부분을 걸었고,
저는 아버지의 정 반대편 길을 걸었습니다.
지금은 결국 길의 중간지점 어디에서 만난 기분이 듭니다.

이제 아버지가 걸어왔던 길을 제가 걸어갈 것이고,
아버지는 제가 걸어간 길을 추억하며 걸을 것입니다.

굿 2012-12-31 11:47:18
언젠가는 써먹고 싶은 아주 좋은 아이디어군요.

아름다운 父子 2012-12-30 19:14:59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담긴 검은 비닐봉지'가 이젠 '택배 상자'로 바뀌었네요.
정이 듬뿍 담긴 아버지의 선물과 그 선물에 기가막힌 해석을 덧붙이는 아들..
정말로 아름다운 父子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