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0 10:04 (토)
있어야 할 자리
있어야 할 자리
  • 홍기확
  • 승인 2012.12.18 10:1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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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

지구의 나이 46억년이나 우주의 나이 150억년에 비하면, 인간의 100년 역사는 그야말로 찰나(75분의 1초)도 되지 않는다.

24시간 개념으로 보면 인간의 100년은 지구의 나이로 치면 0.00002초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구의 인구는 70억명쯤 되니, 숫자로만 본다면 개인은 어쩌면 세상의 부속물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티끌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개인의 삶이란 건 깊숙이 들어가 보면 참 역동적이다. 세월의 흐름도 그렇고 사람이 자라는 것도 그렇다. 심지어 점심을 먹는 것도 단순하지는 않다. 밥을 먹으러 갈 때까지 200여 걸음을 걸을 것이고, 300번 정도 이를 움직여 음식물을 씹을 것이며, 이 때 자세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만개 정도의 미세한 근육을 움직일 것이다.

한편 혀에서는 수많은 세포들이 음식물의 자극에 반응할 것이고, 뇌에서는 이 음식의 장단점과 내일 또 올만한 곳인지 등의 분석을 해댈 것이다.

작년 가을부터 아내는 제빵 및 제과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사실 흥미라고 단순하게 표현을 한다면 아내가 화를 낼 수도 있겠다. 너무 사무적인 표현이랄까? 다시 수정한다.

작년 가을부터 아내는 쿠키며, 케이크며, 머핀이며 서양이 탄생시킨 각종 먹을거리 만들기에 심취해 있다. 이 현상은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취미 생활이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직업에 가깝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 오븐 두 대를 돌려서 이것저것을 만들어 낸다.

아내가 쿠키를 굽는 것에 대해 불만은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 일에 열정을 갖고 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그리고 그런 열정이 넘치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것 또한 운이 좋은 일이다. 아내 스스로도 무언가를 만들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반찬이든 쿠키든 말이다. 시장에서 파는 반찬을 사오면 맛이 어쩌구저쩌구하며 종알대며 자기 나름대로 다시 양념을 해서 환골탈태시키는 수완도 발휘한다.

아내가 쿠키를 구우면서 생겨난 고민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자기가 만든 쿠키나 케이크를 맛 보고 나서 품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바란다. 아침마다 먹을거리를 싸 준 후 다른 사람들한테도 먹이고 나도 먹어 봐서는 맛에 대해 얘기를 해달라고 한다.

압박이 심하다. 퇴근하면 조르르 내 앞으로 와서는 “맛이 어땠어?”라고 물어본다. 이 때 표정은 뭐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눈꼬리를 한껏 치켜 올린 기대만발, 초롱초롱 눈동자의 순정만화 여주인공이다. 게다가 이 얼굴을 얼마나 가까이 들이대는지 서로 이마가 부딪치겠다.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 이 상황에서는.

두 번째 고민은 설거지를 할 때이다. 보지도 못한 많은 종류의 베이킹 도구들을 설거지 한 후 어디에 정리해 넣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설거지 역사 십여년동안 이렇게 당황해 본 적은 없었다. 나도 남자인지라 한두가지 주방용품을 찾지 못해 아내에게 물어본 적은 꽤 많이 있었다.(물론 찾지 못하는 건 주방용품뿐만이 아니다.) 하지만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 때 쿵하고 머리를 때리는 것이 있었다. 혹시 내가 아내가 빵을 굽는 일에 무관심한 건 아닐까? 분명 베이킹 도구들도 제 자리, 있어야 할 자리가 있을 텐데 왜 내가 이 도구들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는 거지? 아내가 몇 개월동안 쿠키를 구우며 신나하고 있는데 내가 도와준 것은 뭘까?

내 칼럼의 제목은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이다. 설거지하다 느낀 감동이라고 해서 하수구에 흘려보낼 수는 없다. 나는 이 느낌을 받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주방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베이킹 도구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이 작업은 상당히 어려운 거다. 내가 도구를 정리한 후 다음에 쓸 때는 꼭 아내가 놓던 자리에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이내 포기했다. 여느 주부가 그렇듯이 싱크대 서랍을 뒤지다 보니 정리할 게 보여 쭈그리고 앉아 꼼지락대며 서랍만 정리했다. 시계를 보니 10분간 꼼지락대기만 했다.

나는 결국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이 베이킹 도구들 어디다 놔야 돼?
아내의 답변은 항상 간결하다. 싱크대 서랍을 열어서는,
“베이킹 도구들은 다 여기에 놓으면 돼.”

아, 여기? 그렇구나. 서랍에 분산되어 있는 각종 통들과 수많은 비닐봉지들에 넣으면 되는구나. 참 쉽네. 그냥 포기할까봐. 좌절을 겪고 나서 나는 여전히 식기들을 정리한 후, 나머지 베이킹 도구들만은 그릇을 말리는 선반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물론 몇 번 정리하려고 다시금 시도해 보았지만, 아내는 어디서 구하는지 베이킹 도구들은 하나 둘씩 늘어만 간다.

역사가인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고 했다. 나의 10년 설거지 역사에 대한 위대한 도전이 나에게 주어졌다. 그릇 세척과 제자리 정리 중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 도전에 나는 응전하고 있다.

삶이란 건 깊숙이 들어가 보면, 참 역동적이다.

아이의 장난감을 일제 정리 후 아이가 가끔 좋아하는 장난감을 찾아달라고 할 때가 있다. 이 때 어디에 있는 지, 어디에 뒀는지 긴급히 떠오르지 않으면 얼굴이 빨개지며 가슴이 요동친다. 못 찾으면 후폭풍이 두렵기 때문이다. 아이의 작지만 예리한 질문.

“아빠, 레고블럭 중에 모자 쓴 사람 어디에 있어요?”
너 혹시 가로 약 1.5센티, 세로 3센티의 구척장신 사냥꾼에 인상착의 대략 험악하며 카우보이 모자(손에 잘 안 잡힘)를 쓴 그 녀석 말하는 거냐? 아빠가 어디 놨는데….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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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2012-12-18 16:51:06
ㅎㅎ~ 행복한 일상이 그려지네요.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는 아내와 설거지 베테랑 10년이라는 자상한 남편.
"엄마는 요리사"라서 매일매일 신나는 아이들.
아침마다 쿠키를 싸준다고 자랑하는 건 아닌지 ㅋㅋ~
같이 근무하는 분들은 좋겠네요^^

쿠키 여섯마리 2012-12-18 15:16:21
아침에 집사람이 쿠키 6개를 싸줬습니다.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는지 제 것을 못챙기고 모두 나누어 줬습니다.
쿠키를 싼 비닐봉지를 먹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쿠키의 맛을 집사람에게 보고할 수가 없겠네요.

오늘은 최대한 숨죽이고 일찍 잠들어야겠습니다.

명품조연 2012-12-18 11:33:38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